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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간행도서

문창재, <대한민국의 주홍글자:국민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

by 푸른사상 2021. 6. 21.

 

분류--인문, 역사, 한국사, 한국근현대사

 

대한민국의 주홍글자

: 국민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

 

문창재 지음|147×217×19 mm|320쪽|22,000원

ISBN 979-11-308-1802-3 03910 | 2021.6.22

 

 

■ 도서 소개

 

대한민국 역사에 새겨진 주홍글자의 흔적을 찾아서

 

문창재(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대한민국의 주홍글자 : 국민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전쟁의 전화 속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에 주홍글자를 새긴 굴곡진 현대사의 실상을 언론인의 눈으로 탐색한다.

 

 

■ 저자 소개

 

문창재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일본 게이오대 신문연구소에서 ‘사건보도와 명예훼손론’을 배웠다.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주로 사회부에서 활동했다. 『한국일보』 논설실장을 거쳐 석간 내일신문 논설고문으로 일하면서 매주 한 편씩 시론 또는 칼럼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서당’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대학생들에게 고전 읽기를 지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경 특파원보고서』 『나는 전범이 아니다』 『바다만 아는 6·25전쟁 비화-증언』 『역사는 하늘보다 무섭다』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제주 사용 설명서』 등이 있다.

 

 

■ 목차

 

책머리에

 

제1장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현장:국민보도연맹 사건

대한민국의 주홍글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성분과 가입 백태

얼마나 학살되었나

학살 명령자는 누구였나

악명 높은 학살처, 경산 코발트광산

바닷속에 가라앉은 원혼들

대전 산내 골령골

‘골로 가는’ 가창골

제주도 ‘백조일손’ 무덤의 기막힌 사연

형무소마다 벌어진 ‘피의 제전’

인민군으로 위장한 경찰의 학살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자

재심 및 손해배상 소송과 판결

 

제2장 나라가 군인을 죽이다니:국민방위군 사건

해골들의 행진

국민방위군의 탄생

남으로, 남으로… 죽음으로 가는 길

쏟아지는 증언들

수사와 재판

걸주(桀紂)가 부럽지 않은 주지육림

비호세력이 없었다면

 

제3장 수복 후의 피바람:6·25 부역자 처단

피란 못 간 죄

고양 금정굴 사건

방방곡곡, 비탄의 산하

 

제4장 의문투성이 전쟁, 6·25

적은 왜 사흘을 머뭇거렸나

해주 점령 오보 파동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대전에 앉아 ‘서울 사수’ 방송

미국의 치욕―사단장, 포로가 되다

한국전쟁 10대 미스터리 논란

 

제5장 꺼지지 않은 풍전등화:격전지를 찾아서

피로 지킨 다부동 전선

서북 축선, 중앙 축선

춘천 승전이 없었다면

구국의 전투, 영천 탈환전

 

참고문헌

찾아보기

 

 

■ 출판사 리뷰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된 6·25

인류 역사상 전쟁과 내전, 쿠데타 등에 휘말려 민간인이 희생되는 일은 많았다. 6·25전쟁 때도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전사자의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정부와 군대가 적대 세력이 아닌 자국민들을 대량학살한 사건은 흔하지 않다. 그런 일이 70여 년 전, 바로 이 땅에서 벌어졌다. 사회부 기자로 주로 활동해온 언론인 문창재가 국민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단 등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참담한 민간인 대량학살의 실상을 파헤친다.

 

통곡조차 허락되지 않은 보도연맹 희생자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좌우의 대립이 극심했던 때, 정부는 좌익인사를 관리하기 위해 그들을 교화 및 전향시킨다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에는 좌익의 핵심인물보다는 목표치 달성을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가입시킨 무고한 민간인이 더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원들은 무차별적인 즉결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사건의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정확한 해명과 사과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에 배신당한 국민방위군

국민방위군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다. 전쟁 중 자국의 청년들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하여, 제대로 된 보급과 훈련도 없이 끌고 다녔다. 거액의 예산을 타냈음에도 군 수뇌부부터 하급 장교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으로 그 예산을 착복하는 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 발발 후 정부가 아무 대책 없이 한강교를 터뜨리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발이 묶여 인공 치하의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 역시 서울 수복 후 ‘피란 못 간 죄’로 부역자로 몰려 처단되었다.

 

6·25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다

한국전쟁의 참혹한 참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은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이제야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이제 71주년을 맞이한 6·25전쟁은 수수께끼 전쟁이었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사흘을 머뭇거리는 의문의 행보를 보였고, 뜬금없이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다는 뉴스가 퍼져나갔다. 누구보다 빨리 피란을 떠난 정부는 대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내보내 서울 시민을 기만했고, 처음 참전한 미군 사단장은 어처구니없이 포로가 되었다. 언론인의 눈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미스터리를 파헤친 이 책은 한국 전쟁사의 중요한 자료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6·25전쟁 70주년인 2020년 6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이었다. 6·25전쟁의 수수께끼를 주제로 ‘이상한 전쟁’ 이야기를 쓰면서,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이 죽은 전쟁이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화(戰禍)에 민간인이 휘말리게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전사자의 5배에 달한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6·25 공식 전사자는 국군 유엔군을 합쳐 17만 5천여 명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 명을 헤아린다. 100만이라는 수는 여러 유형으로 죽은 사람들의 전체 추계다.

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인공에 협조한 부역자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학살된 사람이 제일 많았다. 그 다음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훈련소 이동 중 또는 교육 중 굶어 죽거나 병사, 또는 동사한 사람들이다.

인공 시절 공산당에 의하여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도 수만 명에 이르며, 피란 길이나 주거생활 중 유엔군 폭격에 의해 죽은 사람들도 많다. 또 군경의 공비토벌작전 때 빨치산과 접촉했거나 협조한 혐의로 몰려 피살된 사람, 수복 후 민간인끼리의 보복살해와 사형(私刑) 등으로 인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중략)

일상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런 불만은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사건과 갖가지 이슈들의 물결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 버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각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가권력이 그 많은 국민을 참살하고도 쉬쉬하면서 사건 자체를 덮어버렸고, 억울하다는 유족들의 절규를 빨갱이로 몰아 틀어막은 사실을 알고부터 언론 종사자로 살아온 경력을 숨기고 싶어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그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 1980년대 후반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걸 들추는 일 자체가 반체제, 반국가적 행위로 인식되었던 탓이다. 근년 현대사 재조명 붐이 일면서 그 사건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시작되었고, 과거사를 밝혀내 사건을 청산하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조금씩 진상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힘입은 바 크다. 미력하나마 사건기자 출신 언론인의 눈으로 사건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 보고, 현장을 찾아 오늘의 그 자리를 스케치해보고 싶었다.

 

 

■ 책 속으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내 나라 국민을 국가권력이 무참히 살해하여 암장하고 수장했다. 이유는 그들이 북한 인민군 편이 되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그렇게 한 것은 인류의 이름으로 심판받아 마땅한 국가범죄다. 그러고도 국가는 여태 말이 없다. 그 범죄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다 영전하고 잘 살았다. 죽어 국립묘지에 묻힌 사람도 많다. 그 후손들도 영달을 누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한 이념의 혼란기에 좌익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들은 북한으로 잠입하거나,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발생한 제주도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또 한 차례 좌익 숙청 바람이 휩쓸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국가가 ‘관리’하겠다고 보도연맹을 조직했다. 조선공산당이나 남조선노동당 가입자, 또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 및 인민위원회 조직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선부녀동맹 등 좌파 단체 관련자는 모두 가입 대상이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골수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대부분 잠적해버린 뒤였다. 보도연맹 가입자 대다수는 몰라서, 속아서, 강제로, 또는 권유를 받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가입하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으름장에 겁을 먹고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양민 학살이라 불렸다.

(17~18쪽)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의 반전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성공 확률이 5천 분의 1이라던 상륙작전과 국군의 반격은 파죽지세였다. 10월 1일 밀물처럼 삼팔선을 넘어가, 그달 말에 국군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 1951년의 1·4후퇴다. 두 번째 서울 함락이 멀지 않았던 1950년 11월 20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6·25 때 피란을 가지 못해 인공치하에 놓였던 젊은이 수십만이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끌려간 일이 뼈 아픈 교훈이 되었다. 그들을 전원 제2국민병에 편입시켜 국민방위군으로 훈련시킨다는 게 국민방위군법안 발의 취지였다.

법안 제정 설명을 위해 국회에 나온 장경근 국방부 차관은 “그동안 사설 단체에 불과한 청년방위대가 후방 예비군의 역할을 해온 까닭에 잡음과 부작용이 많았다”고 인정한 뒤 “그런 기형적인 형태를 없애고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두려는 것”이라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106~107쪽)

 

6·25 개전 직후 ‘서울 사수’ 방송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면 한강 다리가 끊기기 전에 많은 국민이 피란을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훨씬 많았으리라는 게 정답일 것이다. 서울을 사수하겠으니 ‘미동도 말고 군작전에 협조하라’는 기만 방송이 없었다면 당연히 일찍 피란을 서둘렀을 테니까.

대통령과 정부와 군이 다 서울을 떠난 다음 날 아침까지 국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은 계속되었다. 전쟁 발발 제1보는 25일 오전 7시였다. 그때부터 한강 다리들이 폭파된 28일 오전 2시 30분까지는 43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 군과 정부와 대통령은 끊임없이 “서울은 안전하다”는 방송을 거듭했다. 동요를 예방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민을 속여 희생을 키웠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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