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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간행도서

정연수 시집, <여기가 막장이다>

by 푸른사상 2021. 6. 7.

 

분류--문학()

 

여기가 막장이다

 

정연수 지음|푸른사상 시선 144|128×205×8mm|140쪽|10,000원

ISBN 979-11-308-1800-9 03810 | 2021.6.11

 

 

■ 도서 소개

 

광부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의 기록

 

탄광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정연수 시인의 시집 여기가 막장이다<푸른사상 시선 144>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산업사회와 자본의 모순이 집약된 탄광의 역사와 광산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재현한다. 탄광 노동의 구체적 경험에서 파생된 이야기들과 광부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감동을 준다.

 

 

■ 시인 소개

 

정연수

강원 태백에서 태어나 2012년 『다층』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시집으로 『한국탄광시전집』을 엮었으며, 산문집으로 『탄광촌 풍속 이야기』 『노보리와 동발』 『탄광촌의 삶』 등이 있다. 2020년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를 설립하여 활동 중이다.

(E-mail : bich402@hanmail.net)

 

 

■ 목차

 

제1부

오래된 동굴 / 휘파람 / 하늘에 계신 아버지 / 밤길 / 나한정역에서 마시는 커피 / 불꽃의 시작, 거무내미 / 어머니, 순례의 길 / 제노포비아 / 표준어 / 고드름 / 쥐새끼 / 강원도의 산 / 갱구가 전하는 이야기 / 막장의 세월 / 화력의 배후, 도계에 가면

 

제2부

바람기 / 신에게 가는 길 / 일 년에 두 번씩 태백 가는 사연 / 매화 씨 / 여자 광부 / 진폐병동에서 1 / 진폐병동에서 2 / 진폐병동에서 3 / 진폐병동에서 4 / 진폐병동에서 5 / 진폐병동에서 6 / 진폐병동에서 7 / 진폐병동에서 8 / 진폐병동에서 9 / 진폐병동에서 10

 

제3부

새 길 / 광부 / 가장 아름다운 여자 / 아름다운 수당 / 굴진 작업 / 굴밖엔 비가 내리우와? / 탄광 아리랑 / 여기가 막장이다 / 사람으로 살기 위해 / 탄광노조 어용노조 / 광부들이 살아 있다 / 광부가 된 단군 / 막장에서 만난 시인 1 / 막장에서 만난 시인 2 / 막장에서 만난 시인 3

 

제4부

연탄재 일기 / 내 젊음은 시퍼렇게 멍들었어 / 막장은 막장에도 없더군 / 광부 아리랑 / 사북은 봄날 / 폐광, 관광 / 카지노 불나방 / 카지노 앵벌이 / 재생산 / 해고된 고흐에게 / 사북에서 만나다 1 / 사북에서 만나다 2 / 사북에서 만나다 3 / 사북에서 만나다 4 / 사북에서 만나다 5

 

작품 해설 : 갱구의 연대기-남기택

 

 

■ 시인의 말

 

갱 속에서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압축공기다. 압축기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자랐는데, 광업소 십년 근무의 절반도 그 압축기실에서 보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선생님을 비롯한 주위 어른들은 우리에게 광업소에 취직하는 꿈을 심어주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태백기계공고에 합격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 취직했다. 나는 퍽 일찍 꿈을 이룬 셈인데, 그제야 서러움과 부조리를 알았다.

 

부르디외의 『재생산』 같은 책만 읽었더라도 나는 광부가 되기 위해 공고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못 배워서 광부가 되었고, 나는 너무 많이 배워서 광부가 되고 말았다.

 

산다는 건 늘 허물을 만드는 일인가 보다. 침묵과 외침의 때를 몰라 늘 어정쩡하게 살면서 허물을 제대로 들추지 못했다. 탄광촌에 대한 맹목적 애정만 지녔는데, 이 시집이 사람 도리 좀 시켜주면 좋겠다. 탄광은 문을 닫지만, 나는 시를 통해 그 문을 붙잡는 중이다.

 

 

■ 작품 세계

  

탄광의 문학적 형상화에 있어서 시인 정연수는 한국의 졸라를 꿈꾸는 듯하다. 그는 첫 시집『꿈꾸는 폐광촌』(1993)과 두 번째 시집 『박물관 속의 도시』(1997)에서도 탄광에 관한 비망록을 중심 모티프로 삼았던 바 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등장한 정연수의 세 번째 시집도 탄광을 내건 『여기가 막장이다』이다. ‘폐광촌’과 ‘박물관 속의 도시’가 ‘막장’으로 재림한 형국이다. 이 시집의 많은 시상을 이끄는 서정적 주체는 에티엔 랑티에의 시적 형상에 비견된다. 그런 만큼 『여기가 막장이다』는 표제 그대로 막장을 소재로 한 일련의 시적 기획물 성격이 강하다.(중략)

『여기가 막장이다』의 시편들은 대개 일상 어법을 활용한 설명적 진술 방식으로 주조된다. 사유화된 미적 거리나 극단의 긴장을 취하지 않기에 시어를 접함과 동시에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단순한 구조로 반복되는 외형이 “바람 부는 삶은 이별들의 연속”「(바람기-선탄부 일기 1」)이라 대변되는 선탄부의 일상을 닮았다. 이 지극한 매너리즘의 이면에 자리한 시적 생성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막장의 중층성에 대한 정치한 재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집에는 수많은 막장의 물성이 서로를 대상화하며 길항하고 있다. 막장은 “한 해 이백오십 명씩 죽어 나가는”(「진폐병동에서 5」) 처절한 죽음의 현장이자, 희망을 위해 무거운 동발을 받치고”(「갱구가 전하는 이야기」) 있는 마지막 희망의 보루이다. 또한 막장은 “낙타가시풀을 씹는 낙타의 입”(「새 길」)과 같은 비의의 정동이면서, “가도 가도 끝없는”(「굴진 작업」) 수준의 불가항력적 좌표이기도 하다.

다양하고도 절실한 막장의 인식이 반복되고 있는 형국은 스스로의 진정성을 증거하려는 포즈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탄광 노동의 구체적 경험이나 그 과정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두루 포함된다. 그중 연작으로 구성되는 「진폐병동에서」 1~10, 「막장에서 만난 시인」 1~3, 「사북에서 만나다」 1~5 등은 시인의 핍진한 체험을 대변한다. 탄광 문학사의 기념비가 될 만한 이 시집이 아주 오랜 기획 속에서 모색되어온 결과임을 방증하는 작품류임이 분명하다.

― 남기택(문학평론가·강원대 교수)

 

 

■ 시집 속으로

 

갱구가 전하는 이야기

 

바람은 밤에도 쉬지 않았다

희망은 막장에 있었고

막장은 희망을 위해 무거운 동발을 받치고 있었다

어느 바퀴라도 빠지면 기우뚱 무너질 세발자전거처럼

희망과 막장이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

 

제 가난에 제 발목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폐광 공고 나붙은 게시판에다가는 가래침도 뱉었다

너도 크면 아비만큼은 돼야지

어미의 그런 말을 들으며 아들은 뭉클 아버지를 존경하곤 했다

만 원짜리야 개도 물고 다녔어

뒷주머니에 인감 차면 동네 처녀 줄을 섰지

이젠 전설이 된 얘기를 바람이 전할 뿐이다

 

친구 떠난 빈집을 바라보던 아이가

도시로 전학 보내달라며 생떼를 쓰는데

철없다고 야단칠 일만은 아니다 차라리 세월을 탓하자

고스톱 칠 때는 껍데기로 광도 먹었는데

어쩌다 세상이 화투판만도 못 해졌는지

서울을 향해 주먹질하는 사내의 뒤집힌 손바닥으로

까칠한 세상이 찍혀 나온다.

 

 

막장의 세월

 

배가 기우는 사이, 배는 막장을 기억했다

 

막장의 옆구리 어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석탄 합리화가 아닌 자본의 합리화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

원망할 여유는 없었다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

산 자의 마지막 인사는 핏물 든 꽃처럼 붉다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나고

터 잡았다고 폐광촌 동료 부르던 세월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

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고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우는 동안

막장은 바다에서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탄광촌으로, 폐광촌에서 공단으로

끝없는 유랑의 세월

바다에다 자식 묻기까지 끝없는 막장

 

막장은 막장이었다.

 

 

여기가 막장이다

 

삽질을 한다

아무리 퍼내도 끄떡 않는 막장

사람답게 살고 싶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서

굳은살 박이도록 삽질해도 줄지 않는 절망

여기가 막장이다

 

광부도 사람이다, 투쟁 뒤에

광부에서 광원으로 이름 바꾸고

노동자에서 근로자로 해마다 달력만 새로 갈았다

도시락 반찬이야 매일 바뀌어도 여전히 가난한 식탁

여기가 막장이다

 

이 땅의 광부는 가고

근로자, 근로자의 날, 모범근로자 표창

더 쓸쓸한, 여기가 막장이다

 

내 딸년만큼은 광부 마누라 만들지 않겠다

내 아들놈만큼은 광부 만들지 않겠다

하찮은 걸 소원하는 여기가 막장이다

 

탄광촌 올 때 다짐했다

삼 년 지나면 떠난다

삼 년만 죽어지내자던 게 삼십 년이 지나도 까마득하다

굳어 가는 폐는 알까

천년만년 썩은 석탄처럼 알 수 없는 까만 세월

여기가 막장이다

 

내년에는 꼭 떠나자 그렇게 떠나고 싶더니만

정부까지 나서서 떠나라고 등 떠미는 석탄 합리화

탄광촌 들어올 때도 누가 그렇게 등 떠밀더니만

나갈 때도 또 그렇게 등 떠밀린다

발걸음조차 내 의지로 딛지 못하는 땅

여기가 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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