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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오동나무 꽃 진 자리] 임진왜란 최초 의병, 누군지 정확히 아십니까

by 푸른사상 2016. 7. 14.

임진왜란 최초 의병, 누군지 정확히 아십니까

 
경상남도 김해시 송담서원 사충단

  

 

 

 사당과 사충단을 제외한 송담서원 전경. 송담서원의 사충단은 1592년 4월 20일 김해성 전투 때 왜적에 맞서 싸운 송담 송빈 등 네 분의 충신을 기려 세워진 기념물이다.
ⓒ 정만진

 

…(전략)…

 

비닐하우스 농업만이 아니라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일어난 의병도 김해가 최초였다. 예나제나 김해는 서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부산과 붙어 있는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는 임진왜란 당시 김해 소속이었다. 그런즉 김해는 부산 침탈에 성공한 일본군의 바로 다음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4월 14일 부산진 전투, 15일 동래성 전투에 이어 김해, 밀양, 경주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김해로 몰려온 적군은 일본군 제3군이었다. 가장 먼저 상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소서행장의 약 1만8700여 제1군은 중군이 되어 밀양으로 올라가고, 뒤이어 뭍에 오른 가등청정의 약 2만8800여 제2군은 동로를 맡아 경주를 향해 북상했다. 흑전장정의 약 1만3000여 제3군은 서쪽으로 진입, 김해를 공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만 듣고도 조선군은 무너졌다 

 

1592년 4월 13일 <선조실록>은 '(적이 밀려오자 경상좌도) 병사 이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수령 김해부사와 부장격인 초계군수는 승산이 없다 싶자 제각각 줄행랑을 쳤다.

 

김해읍성은 한양 도성처럼 그렇게 전투도 없이 함락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칼도 쓸 줄 모르는 선비들이 평생 논밭에서 일만 해온 농꾼 의병들과 마음을 모아 적과 맞설 것인가? 100년 세월 동안 통일 전쟁을 계속해온 터라 칼싸움이라면 병사 개개인이 모두 수준급인 것이 일본 침략군인데, 과연 김해읍성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임진왜란 최초 의병에 대한 기록은 1592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실록은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변란(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해 달아났다. 그러다가 (중략)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서(충청도)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最先起兵)'라고 말한다.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정인홍, 조헌이 처음 창의

 

이 기록은 '국가의 명맥이 의병들 덕분에 유지되었다(國命賴而維持)'면서도  '(의병들은) 크게 성취하지 못했다(不得大有)'라는 사족을 달고 있어 후대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또, 4월 22일 창의한 곽재우만 특칭하지 않고 고경명, 김천일, 정인홍, 조헌을 함께 말하고 있는 까닭에 최초 창의에 대한 명확한 단정은 되지 못한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이라는 사실은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기사에 등장한다. 김성일은 장계를 올려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의병으로)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뒤, 이어서 낙동강 서편 경상우도 일원의 창의 상황과 전투 성과를 전한다.
 

또 김성일은 '(경북) 고령의 김면, (경남) 합천의 정인홍이 그의 동지인 (경북) 현풍의 곽율, 박성, 권양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 의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라면서 '인홍은 정예병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 창을 사용하는 군사)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고을의 가장(假將) 손인갑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우고 있고, (경남 합천) 삼가의 윤탁, 노흠도 의병을 일으켜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김면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바야흐로 병사들을 모집하는데, 적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왜적들이 패전하여 달아나므로 10여 리를 추격하여 거의 큰 승리를 거두려는 찰나에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퇴각하였습니다'라고 승전 소식도 보고한다.

 

 

 

 송담서원 사당 서쪽의 사충단. 임진왜란 초기 김해성 전투 때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네 분을 기려 세워졌다.
ⓒ 정만진

 

 

…(중략)…

 

그러나 임진왜란 최초 창의는 곽재우 의병군이 아니라 송빈(宋賓, 1542~1592), 이대형(李大亨, 1543~1592), 김득기(金得器, 1549~1592), 류식(柳湜, 1552~1592)을 비롯한 김해 의병들로 보아야 마땅하다. 이들은 홍의장군이 창의한 4월 22일보다 이틀 전인 4월 20일에 이미 전사했다. 분명히 시기적으로 앞선다. 그럼에도 김해 의병의 창의와 전사 사실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별로 없다.

 

4월 14일의 부산진성과 그 이튿날인 15일의 동래읍성은 첨사 정발과 부사 송상헌이 관군을 지휘하며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는 그날 바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숱한 일반 백성들이 수령을 도와 왜적과 싸우다 순절했지만, 수령의 지휘를 받아 전투를 치렀으니 창의는 아니다. 그 두 가지 점에서 김해 의병은 다르다.

 

 

관군 없이 싸운 최초의 의병 단독 전투 김해읍성 싸움

 

김해 의병은 관군 없이 싸웠다. 하루만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나흘 동안 줄기차게 싸웠다. <합천 군지>는  '4월 17일에서 20일까지 4일 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로 기록됐다. 더욱이 관군으로 버티던 부산과 동래가 하루만에 무너진 데 반해 비록 왜군의 한 부대였다 해도 수나 장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적과 대결하여 나흘 동안이나 버텼다는 것이 놀랍고, 특히 이후 7년 간에 걸친 싸움에서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의 <곽재우 의병군의 성격>이라는 게시물에는 '곽재우는 경상우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라는 표현이 있다. '나라 안에서 최초 의병을 일으키고'가 아니다.
ⓒ 정만진
 
 
흑전장정 군대의 진격이 김해 의병에 막혀 사흘이나 지체된 데에는 그 날짜만큼 임진왜란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의의가 들어 있다. 김해 의병이 일본군의 전진을 늦춘 사흘은 선조가 압록강을 향해 도성을 탈출한 4월 30일과 일본군이 한강을 넘은 5월 2일 사이의 시간적 간격 이틀보다 하루 더 길다. 이 단적인 날짜 계산은, 목숨을 던져 일본군을 나흘 동안 가로막은 김해 의병의 투혼이 경상우도 일원에서 한양까지의 전선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흘 동안이나 일본군을 막은 김해 의병들, 전쟁의 흐름 바꿨다

 

대구는 김해 의병의 장렬한 전투가 전쟁의 흐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인지 알게 해주는 지역이다. 대구읍성이 4월 21일 일본군에게 점거되자 대구부민들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대구 선비들은 7월 6일이 되어서야 팔공산 부인사에 본부를 차려 의병 부대를 일으킬 수 있었다.

 

김해 의병이 없었다면 경상우도 일원의 여러 창의들 또한 그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는지 모른다. 임진전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홍의장군의 위대함을 낮추려는 의도는 결코, 조금도 없다. 다만 김해 의병들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비닐하우스의 농민 박해수가 텅 빈 김해의 겨울 들판을 안타까워 했듯이.

 

김해부사와 초계군수가 달아난 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김해 사람 수백 명은 관군 없이 성을 지켰다. 4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비교적 적은 군대로 김해읍성을 공격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군은 4월 19일이 되자 마침내 대군을 몰고 나타났다. 먼저 초계군수가 달아나고, 김해부사는 군수를 잡으러 간다는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고 성 밖으로 도주했다.
 

19일 하루 내내, 잠깐도 그치지 않고 전투가 계속되었다. 수백 명에 불과한 의병들이었지만 하루 낮은 간신히 버텼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적들은 성 주변은 물론 들판의 보리까지 모두 베어와 높이 쌓고는 성 안으로 넘어 들어왔다. 1만3000여 명이 되는 숫자의 힘이었다.

 

 

1만3000여 일본군, 김해들판에서 베어온 보리 쌓아 밟고 성벽 넘어

 

이튿날인 20일, 성은 결국 중과부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적들은 투항을 권고했지만 네 사람은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의병들과 함께 끝까지 적들 한가운데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수백 의병들도 모두 죽었다.

 

며칠 뒤, 송빈의 군사 양업손(梁業孫)이 시쳇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살아나와 김해읍성의 장렬한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 덕분에 네 충신들은 전란이 끝난 1600년(선조 33) 병조참의 등 벼슬을 추증받았다. 하지만 그뿐, 다시 역사 속에 묻혔다.

 

1708 년(숙종 34), 이순신의 현손 이봉상이 김해부사로 와서 <금주지(金州誌)>를 보다가 김해읍성 전투의 전말을 알고 감격했다. 그가 나서서 조정에 건의한 끝에 송담서원이 건립되었다. 1833년(순조 33)에는 표충사(表忠祠) 사액도 받았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지만 1871년(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 등의 상소에 힘입어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서원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후략)…
 
 

다음 아웃도어/오마이뉴스/2016.07.10/정만진

출처 :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60710133507691&RIGHT_LIFE=R1

 

 


 

포털사이트 DAUM의 <아웃도어> 에 김해시 송담서원에 대한 소개가 메인에 떴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라고 하면 '홍의장군 곽재우'를 떠올리는데요,

 

하지만 이건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곽재우 의병군은 나라에서 최초 의병을 일으킨게 아니라 '경상우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임진왜란 최초 창의는 김해의병인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비롯한 김해 의병들이예요.

 

이들은 홍의장군이 창의한 4월 22일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4월 20일에 이미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김해 의병의 창의와 전사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죠.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인 사충단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임진왜란 최초 창의가 사실은 누구인지도 알게 된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불어 저희 푸른사상의 장편소설, 『오동나무 꽃 진 자리를 추천드립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포와 동래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발을 나흘 동안 묶어두었던 김해성 전투.

그 싸움의 주인공들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나 관군이 아니라

네 명의 의병장과 백성들이었습니다.

최초의 의병장 송빈과 송씨 가문 4대에 걸친 충절의 역사가 되살아난 이야기, 『오동나무 꽃 진자리』!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현대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님들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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