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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간행도서

정재서, <동양학의 길을 걷다>

by 푸른사상 2021. 12. 6.

 

분류--동양학, 인문

 

동양학의 길을 걷다

 

정재서 지음147×217×15 mm320

26,000ISBN 979-11-308-1857-3 03800 | 2021.11.30

 

 

■ 도서 소개

 

동양학을 산책하며 길어낸 깊고 넓은 사유

 

국내 동양학 연구의 권위자인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동양학의 길을 걷다』가 푸른사상에서 출간되었다. 한국 동양학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험로를 걸으며 학문의 길을 닦아온 석학이 바라본 세상사와 학문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동양학의 다양한 단상이 담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넓혀준다.

 

 

■ 저자 소개

 

정재서

신화학자, 중문학자, 문학평론가. 현재 영산대 석좌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의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일본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하였다. 계간 『상상』 『비평』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신화학, 도교학 등을 바탕으로 주변 문화론, 제3의 동양학, 제3의 신화학 등을 제창하고 동아시아 담론, 동아시아 상상력 등과 관련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계명대 중문과 교수,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중국어문학회 회장, 비교문학회 회장, 인문콘텐츠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산해경 역주』(1985) 『불사의 신화와 사상』(1994) 『동양적인 것의 슬픔』(1996) 『이야기 동양신화』(2004)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2006)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2007)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2010) 『제3의 동양학을 위하여』(2010) 『동아시아 상상력과 민족서사』(2014) 『산해경과 한국문화』(2019) 등 및 다수의 공저, 편저, 번역, 논문들이 있다. 상훈으로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1994), 비교문학상(2008), 우호학술상(2008), 이화학술상(2015)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목차

 

∎ 책머리에

 

1장 동양학으로 읽는 세상

 

사유의 시작:걸으면 길이 되고, 행하면 도가 된다

 

[논설]

코로나 19, 절멸? 혹은 공존?

귀신도 감동시키는 트로트

한국 문화, 비슷함 속의 정체성

자연의 허상을 깬 아침 살풍경

본격비평이 필요한 영화 <명량>

명재상이 그리운 시대

고통은 꽃처럼 피어난다 ― 세월호의 비극에 부쳐

산수화 속 정물이 된 아이들

창조적 모방 설파한 『논어』

헤이세이(平成) 25년 경성중학

경희궁 안내판 유감

눈 속에 홀로 핀 설중매(雪中梅)의 고고함

죽창무정(竹窓無情)

웃은 죄

이 시대의 회재불우(懷才不遇)

제로섬 게임의 전통을 넘어서

세대교체의 신화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동묘(東廟)를 생각한다

남이의 비극, 이창동의 영광

유, 불, 도를 넘나드는 미(美), 국화

대숲의 공포

밥 먹는 매너

보호와 간섭

실종된 예의지국(禮義之國)

 

[서평]

중세에 살기의 욕망과 소설의 갱신 ― 김탁환, 『나, 황진이』

섬, 시와 삶이 만나는 곳 ― 이생진, 『걸어다니는 물고기』

모든 단단한 것들이 사라진다 해도 ―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한국의 도교학이 거둔 큰 성취 ― 김낙필, 『조선 시대의 내단사상』

궁핍한 시대의 사표(師表), 선비 ― 정옥자,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문화론적 해석의 선구 ― 안확, 『안자산국학논선집(安自山國學論選集)』

번역, 변혁! ― 마루야마 마사오 외, 『번역과 일본의 근대』

‘나’라고 대답할 수 있는 거울 ― 사빈 멜쉬오르 보네, 『거울의 역사』

학문, 부끄러움과 곤혹 사이 ― 앨런 소칼 외, 『지적 사기』

인류의 새로운 이념적 비전 ― 에드가 모랭, 『20세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2장 동양학의 새 길을 찾아서

 

사유의 시작3의 중국학론

 

[논설]

당나라 시절 꿈꾸는 중국

중국이 왜 이럴까?

베이징의 밀물과 썰물

동아시아의 정체성

동아시아와 디지털

동아시아 문화의 고유성과 보편성

갈홍과 안지추, 난세적 삶의 두 표본

남녀상열지사 그리고 궁체시(宮體詩)와 성 ― 『시경(詩經)에서 장한가(長恨歌)까지

아시아 시의 상상구조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상상력

아시아를 누빈 명마들

 

[서평]

동아시아 담론을 다시 숙고하다 전형준,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보는 중국문학

근대와 탈근대의 동아시아를 위한 서사(序詞)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동양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동아시아사의 전통과 변용』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동아시아인의 동양인식19~20세기

중국 문화를 꿰뚫는 독창적 시각 김학주, 장안과 북경

한자, 그 파르마콘적 의미 김근,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고분벽화에서 화상석으로의 인식 확대 전호태, 화상석 속의 신화와 역사

탈근대를 위한 근대의 추체험 민두기, 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험후스의 사상과 활동

스스로의 인식틀로 세계 읽기 심재상, 노장적 시각에서 본 보들레르의 시세계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

보편화의 계기를 맞은 동아시아 서사 가오싱젠, 영혼의 산

중국 문화 속의 성 ― 『노자와 성·중국의 성문화·중국의 남자와 여자

중국 대중문화에 대한 냉철한 분석 멍판화, 중국, 축제인가 혼돈인가

중국 소설사의 고전 루쉰, 중국소설사략

프랑스에서 꽃핀 도교 연구 앙리 마스페로, 불사의 추구

 

 

3장 동양학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다

 

사유의 시작논쟁의 미덕

 

[대담]

신과학과 문학의 운명 ― 서울대 장회익 교수와의 대담

 

[토론]

모옌, 최원식, 박이문 선생의 발표에 대하여

프린스턴대 앤드루 플랙스 교수의 논고 고전 중국 소설에 나타난 자아의 유가적 개념에 대하여

가라타니 고진 선생의 논고 「동아시아의 이상에 대하여

김우창 선생의 논고 「생태적 숭고미산수화의 이념에 대하여

베이징대 원루민(溫儒敏) 교수의 발표에 대하여

게리 스나이더와 김종길 선생의 발표에 대하여

 

찾아보기

 

 

■ 책머리에 중에서

 

나는 반세기 동안 동양학의 길을 걸어왔다. 조부께 보학(譜學)을 배우던 유년 시절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평생을 동양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셈인데 아직도 이 길은 끝나지 않았고 나의 발걸음도 계속될 것이다. 바야흐로 노자가 학문을 하면 날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지고 도를 닦으면 날이 갈수록 할 일이 없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고 한 말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학문 활동을 걷기에 비유한 것은 걷기야말로 실로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사람다운 본질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영웅은 언제나 집을 떠나 길을 걷는다. 그들은 괴물을 퇴치하거나 보물을 얻기 위해, 또는 궁극적인 앎을 위해 험난한 지상의 길을 걸어갔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우리의 일생은 각자 나름대로 이와 같은 신화 속 영웅의 행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략)

예상대로 동양학의 길을 걷는 여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 길은 평탄하지 않았고 험로에는 모험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정에는 간혹 조력자가 있어 힘을 덜 수도 있었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로 인해 걷기가 불편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곧 분발하여 보속(步速)을 회복하곤 했는데 왜냐하면 이 험로는 스스로 즐겨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길이란 다니면서 생긴 것이다(, 行之而成).”라는 장자의 언명에 의지하여 이 길을 걸어왔다. 내가 꾸준히 다녀서 생긴 이 길을 후인들은 편하게 걸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중략)

이 책은 상술한 나의 길고 긴 동양학의 도상(途上)에서 학계 활동의 소산이라 할 연구논문, 전공서가 아닌, 주로 문화계 활동을 통해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논설, 서평, 대담, 토론문 등을 거둔 것이다. 이것들은 잡문, 에세이 등의 성격을 띠기도 하고 학술 측에서 보면 주변적인 가치 정도를 지닌 것이겠으나 나의 동양학적 토대를 근거로 외연을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동양학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나의 동양학 농사에서 파생한 낙수(落穗) 같은 것으로 일찍이 밀레의 관심을 끌었던 이삭 줍기라는 행위가 주는 감흥과 취지는 다르지만 학문적 이삭 줍기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나름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아울러 나는 이것들이 비록 잡문, 에세이이고 낙수 같다고는 하나 구상과 글쓰기에서 일점일획도 연구논문이나 전공서를 작성할 때보다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확언할 수 있다. 아니, 독자의 폭이 넓은 일반 문화계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오히려 학술적인 글을 쓸 때보다 더 고심하고 퇴고를 거듭한 것이 사실이다.

 

 

■ 추천의 글

  

정재서 교수의 말대로 학문 활동이란 길을 걷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정 교수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험난한 지상의 길을 걷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동양학에서 인기 없던 험로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에 새로 난 길을 따라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대기의 맑고 깨끗함과 주변 경관의 경이로움을 있는 그대로 체험케 한다. 이로써 우리는 누구나 걸어온 평탄하고 훤하게 뚫린 인간 세상의 대로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신선함을 그의 학문 여정에서 감지하게 된다. 모름지기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자라면, 정 교수와 같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적 모험심과 학자적 결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 교수가 걸어온 학문의 길은 실로 값지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 교수의 이번 저서 ?동양학의 길을 걷다?는 그가 동양학의 영역에서 고산지대에 해당하는 곳을 탐사하고 또한 길을 내는 과정에 언뜻 저 아래 인간 세상에 눈길을 주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사에 대한 사유를 담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글들에서 우리는 동양학의 고봉에 머물면서도 현실에서 결코 마음의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정 교수의 인간적 면모까지 읽을 수 있거니와, 그 모든 글에서 확인되는 정 교수의 균형감각은 학자라면 누구나 배우고 본받아야 할 덕목일 것이다. 어떤 학문 영역의 길을 걷든 진지한 마음의 학자라면, 또한 동양학의 새로운 영역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라면, 정 교수의 이번 저서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 장경렬(서울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 출판사 리뷰

  

이 땅에 처음부터 길인 곳은 없지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잘 닦인 길이 된다. 누구도 발 닿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수한 한계에 부딪치고 역경을 넘어야 할 일이다. 동양학의 길을 걷다는 한국 동양학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험로를 불사하면서도 그 길을 걸었던 한 석학이 바라본 세상사와 학문을 담은 책이다. 신화학자이자 중문학자인 정재서 교수는 때로는 장자의 한 구절, 때로는 노자의 한마디를 빌려 동양학을 기반으로 이 넓고 복잡한 세상을 읽어나간다. 저자가 걸어온 학문적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동양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1장의 동양학으로 세상을 읽다에서는 현재 직면해 있는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저자의 소견을 논설과 서평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이를테면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요즘, 고대의 신화서와 문헌을 통해 전염병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또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한국 문화와 중국 문화의 근원을 되짚으며 비교해보는 일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도움이 된다. 2장의 동양학의 새 길을 찾아서에는 동양학의 정체성을 수립하고자 했던 저자의 학문적 활동에서 나온 산물 격인 글들이 실려 있다. 3동양학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다에는 신과학과 문학의 운명을 탐지한 서울대 장회익 교수와의 대담과, 당대 석학들의 논고에 대한 질의를 담은 토론문들이 실려 있다. 각 장의 서두에 실린 사유의 시작은 우리네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해볼 법한 담론들을 사유하여 우리 정신의 근원을 찾는다.

 

 

■ 책 속으로

 

중국문학의 정전(正典)이자 시가문학의 원조인 시경(詩經)이 고아한 클래식이 아니라 주로 당시의 유행가, 지금으로 말하면 트로트(혹은 뽕짝) 가사를 모아놓은 책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시경을 편집한 공자는 이 책을 안 읽으면 사람 구실을 못 할 것처럼 그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사람으로서 트로트를 배우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담을 맞대고 서 있는 것과 같으리라(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歟).”[논어(論語)』 「양화(陽貨)] 후대의 유학자들은 더 강하게 나갔다. “귀신과 천지를 감동시킴에 트로트만 한 것이 없다(感天地動鬼神, 莫近於詩).”[모시(毛詩()] 대충 이렇게 의역해도 될 듯싶은데 젊을 때는 이 말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7080세대의 대학문화는 이른바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에 심취하거나 팝송과 통기타 음악이 주류이었지 트로트는 저 멀리 있었다. 심지어 수준을 낮춰보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미자가 우리 음악을 몇십 년 후퇴시키고 있다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엘레지의 여왕에 대한 이러한 신성모독은 당시 대학생들이 우리 대중음악에 관해 얼마나 무식해서, 용감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28)

 

한국 문화는 중국 문화와 너무 닮았다. 일본 문화는 확 다른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오죽하면 라이샤워(E.O.Reischauer) 등이 동양문화사초판에서 한국 문화를 중국의 복사판이라고 했을까? 그런데도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두고 그들은 언어의 장벽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것만일까? 그렇다면 한민족보다 훨씬 강성했던, 같은 알타이어계 종족인 선비족, 만주족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비슷한데도 동화되지 않는 것, 이것이 한국 문화 정체성의 핵심이다. 한국은 타자의 문화를 자기화하는 데에 뛰어났다. 요즘 탈식민주의 용어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는 문화적 전략을 잘 수행했던 것이다.

혈연의식이 유난했던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가문의 계보학 즉 보학(譜學)이 발달했다. 이 보학 속에는 우리의 언어, 문화가 녹아 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자. 고려 때에 충주 지씨(池氏)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분파하여 창씨를 했다. 그는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서 성을 어씨(魚氏)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슷한 것을 두고 어씨와 지씨 사이 같다고 하여 어지간하다라는 말이 생겼다. 충주 지씨와 어씨는 지금도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

(31)

 

한국은 중국을 제외할 때 가장 오랜 한학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현재 한국 중국학의 수준은 중국, 타이완, 홍콩,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중국학이 분과 학문으로 행세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서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몇몇 분야에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업적을 이루고 있긴 하나 전반적인 수준을 두고 논할 때 한국 중국학의 존재는 국제 학계에서 주목받는 처지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알아주던 한학의 고국(古國)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원인은 한국의 중국학이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있다. 대체로 한국의 중국학은 고증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 분석 방법에 있어서는 구미를 따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현재까지 볼만한 학문적 특색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중국학의 현실인 것이다.

한국의 중국학이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한국 중국학의 정체성, 자기의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한국의 중국학자 치고 젊은 시절 공부하는 과정에서 왜,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중국학을 하는가 하는 물음에 한 번쯤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한국의 중국학자들은 정체성 결핍증에 시달려야 하는가? 다시 이 원인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한국 중국학의 역사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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