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산문)
바람개비는 즐겁다
정정호 지음|푸른사상 산문선 42|150×217×20mm(하드커버)|240쪽
19,000원|ISBN 979-11-308-1841-2 03810 | 2021.11.25
■ 도서 소개
인생길에서 마주한 일곱 가지 바람 이야기
영문학자인 정정호 중앙대 명예교수의 산문집 『바람개비는 즐겁다』가 <푸른사상 산문선 42>로 출간되었다. 해방공간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며 살아온 유년을 지나 창작의 바람이 불어온 현재까지의 일곱 가지 바람을 회고하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며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로 우뚝 서고자 한다.
■ 작가 소개
정정호(鄭正浩)
아호 소무아(笑舞兒). 서울에서 1947년에 태어났다.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어영문학과 석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 위스콘신(밀워키)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와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국제PEN한국본부 전무이사,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 부회장, 사랑의교회 교수선교회장, 제19차 국제비교문학회 세계대회 조직위원장(2010, 서울),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집행위원장(2016, 경주)을 역임했다. 김기림문학상(평론), PEN번역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최근 저서로 『피천득 평전』(2017), 『문학의 타작:한국문학, 영미문학, 비교문학, 세계문학』(2019), 『번역은 사랑의 수고이다』(공저, 2020)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명예교수, 국제PEN한국본부 번역원장,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한국통일문인협회 국제교류위원장이다.
■ 목차
작가의 말 일곱 개 바람 이야기
제1부 봄, 사라진 나의 그림자를 찾다
나의 뿌리
꿀꿀이죽
소금의 꿈
4월 14일
“해”바라기의 편지
두 딸 이야기
제2부 여름,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다워
길영희 교장 선생님
기적을 만드는 사람
비엔나에서 만난 이합 핫산
도산, 춘원, 그리고 금아
피천득의 담요
산소 같은 남자
제3부 가을, 책 세상이 바로 낙원이네
글 쓰는 검투사, 새뮤얼 존슨
『피터 팬』 나이 들어 “다시” 읽기
엘리엇의 유령
펄 벅의 수양딸, 한국계 혼혈인 자서전
“동물 되기”의 시적 상상력:사슴과 연어
코로나 감염 시대의 일상 회복:최근 시 읽기
제4부 겨울, 내 마음의 지도 새로 그리기
백두산, 천지, 그리고 숭고미
내가 만난 예수님
서울의 산들이 그립다
한반도 통일은 “언어”로부터
세계문학 단상
웃으며 춤추는 어린아이
발문 : 풍차는 누가 돌리나 _ 우한용
■ 작가의 말 중에서
일찍이 중·고교 시절부터 시, 에세이 등 창작에도 뜻이 있었으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오래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 나는 창작보다 남의 글을 읽고 설명만 하라는 공자님 말씀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충실하게 되어 창작하는 작가가 되지 못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와 재미없는 논문을 쓰는 학자로 살았다. 은퇴 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창작하는 작가로 ‘변신’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쪼록 이번에 상재하는 산문집이 내 글을 쓰는 “작이불술(作而不述)”의 새로운 ‘시작(始作)’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변신’은 언제나 느리고 어렵다.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의 8할은 ‘바람’으로, 인생 전반부 최소 다섯 번의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바람은 ‘시대’와 역사의 바람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 바람이지만 아마도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전쟁의 민족 비극이 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것이 틀림없다. 유년기 바람은 내가 얼마나 즐겼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리저리 피난 다니느라 몸 고생을 크게 했겠지만 어려서인지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중략)
전반부와 후반부 인생길에서 나는 일곱 가지 바람을 앞에서 맞으며 바람을 타기도 했지만 거스르면서도 살아왔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산문집 제목이 『바람개비는 즐겁다』인 것은 바람을 타며 노는 바람개비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즐겼다는 말은 바람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바람개비를 함께 돌렸다는 뜻이다. 단계별로 어떤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낙망보다 비전과 희망을 품고자 애썼다. 다른 말로 ‘비극적 환희’를 가지고 살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리라. 바람이 거칠고 세찰수록 바람개비는 더 빠르고 힘차게 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수동적 바람개비가 아니라 휘파람을 불며 내 안에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 능동적 바람개비가 되고 싶다.
노인이 된 인생 후반부에도 계속 바다와 산과 하늘을 생각하며 바람이 잘 부는 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며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다.
■ '발문' 중에서
채민이가 할아버지 곁에 다가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원고를 들춰보았다. 제목이 재미있네요, 채민이 킬킬 웃었다. 너 웃음소리가 왜 그러냐? 하하하 웃는 건 너무 상식적이지 않아요? 우공은 그렇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웃긴다. 바람개비가 즐겁다는 게 말이 돼요? 바람개비 들고 달리는 아이들, 아니 그 ‘사람’이 즐겁지 바람개비는 바람만 있으면 멋모르고 돌아가는 거잖아요? 바람개비보다는 바람 이야기를 하자는 거 아니겠냐? 소무아는 해방공간과 6·25 무렵 월남해서 정착하는 과정을 하나의 바람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에서 이론을 공부하던 시절, 신앙에 은혜를 끌어안은 성령의 은총도 바람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국의 장래와 통일 문제를 지나, 칠십 넘은 소무아는 ‘창작의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 바람개비의 비유가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늦바람이 무섭다는데, 우공은 그 창작이라는 게 그렇게 근원적인가 잠시 생각했다.
채민이 물었다. 그러면 바람개비 돌리는 바람이 즐겁다는 뜻인가요? 바람 때문에 즐거워 산다는 거겠지. 채민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었다. 어머, 할아버지, 우리 대학 불문과 교수님이 그러는데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 시인이 「해변의 묘지」라는 시에서 말예요, “바람이 인다, 애써서 살아봐야겠다”, 그렇게 썼대요. 너도 그 시 읽어봤냐? 그럼요. 그런데 할아버지이, 죽으려다가 바람이 일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우공은 잠시 멈칫했다. 삶에 지쳐 죽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떠오르지 않았다. 세속적인 삶을 살아내기에 허덕대느라고 아무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실 죽음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할 겨를이 없었다.
- 우한용(소설가, 서울대 명예교수)
■ 출판사 리뷰
해방공간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겪으며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저자의 유년시절을 지나 창작의 바람이 불어온 현재까지 자신에게 불어온 일곱 가지 바람 이야기를 정정호 교수는 이 산문집에서 풀어낸다. 나부끼는 바람을 타기도 하고 거스르기도 했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며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은 저자의 바람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찍이 시와 산문 등 창작에도 뜻이 있었음에도 영문학자로서 연구하고 지낸 세월이 더 길었던 저자는 창작으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건너온 정정호 교수는 4부로 구성된 이 책에 그에게 불어온 일곱 개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1부에는 어려웠던 저자의 유년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탈출하여 월남한 실향민의 후손인 저자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한데 모아 끓인 ‘꿀꿀이죽’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던, 힘들었지만 소중한 흔적으로 남은 그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2부에서는 그의 삶에 소중한 영향을 끼친 인연들을 그린다. 자신의 교육철학에 강한 신념을 가졌던 교장 선생님, 삶의 지표를 마련해준 피천득 선생과의 소중한 인연 등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새뮤얼 존슨, 엘리엇 등의 문학을 읽은 감상과 그에 대한 단상들을 기록한다. 4부는 신앙, 남북통일, 세계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담았다. 불혹을 지나면서 성령의 바람을 맞이한 저자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신앙의 충만함을 고백한다. 저자가 염원하는 남북 통일을 문학과 신앙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서해 바다가 보이는 뒷동산에 올라 불어오는 바람을 품으며 바다 너머의 세계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저자는 이제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 바람개비로 우뚝 서고자 한다.
■ 작품 속으로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나의 계보나 족보도 모른다.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북한을 떠나온 실향민의 후손이라는 사실뿐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북한을 떠나 남한(이남)으로 내려온 이주민의 1대 후손인 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원조 탈북자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 (명천은 맛있는 명태로 유명한데, 명태는 명천 어부가 동해안에서 처음 잡은 생선이라는 말이다. 함흥은 함흥차사로 이름난 곳으로,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데서 유래하였다.)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경 결혼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명천 지방 유지의 장남으로 서울로 유학 와 당시 경성의 보성전문을 다녔고 그 후 일본 대학 법문학부에 재학하다가 귀국하였다. 아버지가 남긴 편지 등의 필체를 보면 한자와 한글이 모두 달필인 것을 볼 때 아버지가 당시 지식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내 어린 기억으로는 휴전 직후 우리 동네에 미군 물차가 와서 식수를 나누어주었는데 아버지가 미국 병사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어린 나는 물론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영어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 같다. 1960년대 중학교 입학할 때 나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나의 뿌리」, 18~19쪽)
내가 라면을 처음 먹은 것은 1964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국수하고는 다른 그 맛이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라면 맛이 아직도 생생한데, 1957년 처음 맛보았던 꿀꿀이죽과는 다른 감동(?)이었다. 꿀꿀이죽은 어렵게 사다 먹으면서도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고 돼지 사료로 허가된 것이라는 생각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도 없어 못 먹던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깊이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라면은 우리나라에서 당당히 생산된 새로운 식품이었고 꿀꿀이죽과는 달리 새벽부터 30리씩이나 걸어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었고 그 가격이 저렴하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된 것은 부대찌개나 라면이 아니라 꿀꿀이죽이다. 어린 시절 내가 스스로 통을 메고 여러 시간 걸어서 사다 먹던 음식(?)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꿀꿀이죽은 인생 초반에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까지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주름과 흔적을 남겨놓았다.
(「꿀꿀이죽」, 30~31쪽)
올 2021년 3월 손주 녀석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태어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학교에 들어가다니 믿어지지 않는 빠른 세월이다. 아무쪼록 아이가 사춘기 등을 지혜롭게 지나고 학교폭력이나 입시지옥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재능(달란트)을 빨리 찾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도할 뿐이다. 되돌아보니 두 딸을 키운 것은 우리 부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두 딸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달란트)을 잘 키워 이웃을 사랑하며 사회에 도움을 주는 한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여 보람찬 나날을 살아가기를 기도할 뿐이다. 일흔의 나이를 훌쩍 지난 나도 스스로 지은 아호 소무아처럼 노년의 시간을 ‘웃으며 춤추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계속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웃으며 춤추는 어린아이」,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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