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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간행도서

백정희 소설집, <가라앉는 마을>

by 푸른사상 2021. 6. 3.

 

분류--문학(소설)

 

가라앉는 마을

 

백정희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30|146×210×16 mm|312쪽

16,500원|ISBN 979-11-308-1792-7 03810 | 2021.6.5

 

 

■ 도서 소개

 

삶의 존재 근거를 향하는 아득한 길

 

백정희 작가의 소설집 『가라앉는 마을』이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며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소설 8편을 소설집에 실었다. 계급과 자본의 논리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껴안는다.

 

 

■ 작가 소개

 

백정희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99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가라앉는 마을」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박화성문학상(「싹」) ,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대상(「탁란」), 전태일문학상(「황학동 사람들」)을 수상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2회 받았고, 소설집으로 『탁란(托卵)』이 있다.

(E-mail:imbjh1@hanmail.net)

 

 

■ 목차

 

작가의 말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외양간 풍경

말바우시장

가라앉는 마을

계단 위에 있는 집

바람은 길이 없다

진혼교향곡

마지막 집

 

작품 해설 : 계급도시와 인간생태학 - 이명원

 

 

■ 추천의 글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 신성(神聖)의 소설

백정희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문학을 왜 하는가 하는 전통적인 질문에 바로 마주치게 된다, 백정희는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으로 반대편에 있는 제도와 인간을 질타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백정희의 두 번째 소설집 『가라앉는 마을』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문학관이다.

이를테면 단편 「계단 위에 있는 집」의 여자 주인공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 그녀가 세 들어 사는 연립주택은 비가 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통 금이 가서 관청으로부터 철거 통고를 받은 지 오래다. 월세도 내지 못해 보증금도 다 까먹었고 계약직은 해고당했고 생활비도 없다. 시도하는 돈벌이는 모조리 실패한다. 간절히 기다리던 문학창작지원금도 받지 못한다. 쌀통에는 쌀도 없어 우연히 날아와 식구가 된 새 모이도 줄 형편이 못 된다. 베란다 시멘트 틈새에는 잡초 바랭이가 자리를 잡고 자라다가 말라죽어간다. 여기서 바랭이는 백정희 문학과 등가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죽음 이후를 생각한다. 죽음 이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을 생각한다.

이 정도라면 백정희에게 문학은 생계 수단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운명처럼 달라붙어 있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존재의 전부이기에 길이 있든 없든 백정희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길이 환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백정희의 바랭이가 씨를 뿌려 모두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다.

― 하응백(문학평론가)

 

 

■ 출판사 리뷰

 

백정희의 소설집 『가라앉는 마을』은 소외된 계층과 약자들을 향한 속 깊은 애정으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를 짚어낸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존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 속에서 착취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도시 공간의 재개발과 농촌 개발에 따른 거주민의 계급적 분리와 생존에 직면한 현실은 주거 난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는 이유만으로 뿌리내렸던 곳으로부터 주변부로 배제되고, 개인과 사회의 폭력에 직면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표제작이자 작가의 등단작인 「가라앉는 마을」은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거주자인 인간을 추방하고 배재하는지 잘 보여준다. 마을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농촌 지역에 개발되는 생수공장의 취수 작업으로 인해 마을이 가라앉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터전인 ‘땅’이 자본과 문명화에 의해 상실되고 파괴되고야 만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자본의 새로운 축적 논리에 급변하고 있는 현재, ‘뉴타운 재개발’의 광풍으로 휩쓸려간 도시의 주거지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바람은 길이 없다」와 「계단 위에 있는 집」 「마지막 집」의 등장인물은 낡은 연립주택부터 임대아파트까지 주거 공간에서 가진 자와 빈곤한 자 사이의 차별과 폭력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 외에도 백화점 식육부에 근무하는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다룬 「외양간 풍경」, 관광 개발에 따른 자연 파괴와 이주를 결정하는 동물들의 비상회의를 그린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작품 표절과 도용의 문제를 조명한 「진혼교향곡」은 우리 앞에 펼쳐진 인간 문제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집에서는 폭력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습니다. 국가가 국가에게 가하는 폭력,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개인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인간이 자연에게 가하는 폭력 등. 인간에게 폭력을 당한 자연은 다시 인간에게 재앙이 되어 되돌아오는 폭력을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에게 상처 입은 흙이 눈물 흘리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무와 꽃과 새들의 울음소리, 바다와 강에서 들려오는 물고기들의 눈물과 울음소리, 땅속 지렁이들의 눈물과 울음소리, 인간 외의 이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 생명체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울음소리가 제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 생명체들의 눈물과 울음소리를 제 펜으로 받아 적어 인간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모든 생명체들에게 가한 인간들의 폭력은 곧 인간 자신을 향한 폭력이 되어 되돌아오니까요.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폭력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제는 이 모든 폭력이 멈추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생명체들의 울음소리를 제 펜 끝으로 외치고 싶었습니다.

인간들이여, 이제 그만 폭력을 멈추십시오!

 

 

■ 작품 해설 중에서

 

나는 백정희의 소설이 ‘계급도시 안에서 살아가기’라는 인간생태학의 물질적 토대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시각을 제시하고 싶다.

물론 이 소설에 수록된 작품들의 공간적 배경은 ‘도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데뷔작인 「가라앉는 마을」의 공간적 배경은 농촌으로, 도시인이 소비할 생수를 대량생산하게 될 ‘취수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공동체와 상호부조의 문화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되는 모습이 펼쳐지는 곳이다. 산업화 이후 우리가 끈질기게 목격해온 대도시의 ‘자본 식민지’로 전락한 농촌의 풍경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는데, 농민들의 생업/생존과 무관하게 ‘물’로 상징되는 자연을 수탈/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축적해가는 현대판 시초 축적의 풍경을 조망하고 있다.

백정희의 소설에서는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metro-polis) 안에서, 도시문화를 구가하면서 소비에 골몰하는 식의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향인 섬마을에서 상경해 백화점 식육부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착취당하다가 버려지는 「외양간 풍경」의 갑철의 생활 세계가 묘사되거나, 공간적 배경은 지방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이지만, 차라리 전통적인 상호 부조의 공동체를 환기시키는 ‘말바우시장’을 배경으로 신산스런 인생 역정이 회상되는 「말바우시장」의 공간적 성격은 ‘익명성’이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작동되는 소비도시로서의 풍경과는 다른 것이다. 요컨대 도시공간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백정희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드러난다.(중략)

요컨대 백정희는 그의 소설을 통하여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삶의 근거는 물론 예술적 존엄을 훼손당하는 자본에 의한 수탈과 착취의 현실을 도시 개발의 과정 속에서 추방당하는 원주민의 시선과 중첩시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는 여러 작품들은 계급적 분리에 의해 작동되는 도시 안에서의 풀뿌리 민중의 고통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중략)

농민들에게 ‘땅’은 도덕경제의 토대이다. 땀 흘린 만큼 소출을 거둘 수 있고, 이를 통해 가족경제를 지속할 수 있다는 오래된 희망이 농민들의 집단적 심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윤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개발주의는 그런 도덕경제를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성장경제를 구가한다.

 

순태가 팔아버린 논 가까이에 상여가 이르렀을 때였다. 기계소리는 성난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집채만 한 굴착기가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빨로 탐욕스럽게 흙을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논바닥은 취수 공을 박아놓은 구멍이 늘어날 때마다 흙에서는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순태네 논만이 아닌 황 영감네나 근처의 모든 논밭들이 몸을 비틀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흙의 살결에 육중한 쇳덩이 취수공이 박힐 때마다 굴착기가 뿜어내는 돌가루 물이 솟구쳐 나와 분수가 되고 또 다른 논으로도 흘러들어 갔다. 생살이 찢겨지는 흙은 아픔을 견디지 못해 회색 피를 낭자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생살 밖으로 흘러나온 회색 액체는 벼 포기와 양파와 마늘 등 다른 농작물을 뒤덮고 아무데나 찰싹 찰싹 엉겨 붙어 농작물의 일부분인양 굳어갔다. 굴착기 입을 통해 토해진 액체는 시멘트 가루를 물에 타놓은 것 같았다. 양파와 마늘 벼 포기들은 그 액체를 뒤집어쓰고 숨을 쉬지 못해 헐떡거리는 회색식물로 변모해갔다. 처음부터 그런 모양새로 돋아난 식물인양.

- 「가라앉는 마을」

 

위의 인용문에서 “근처의 모든 논밭들이 몸을 비틀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는 의인화된 땅의 비명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압살당하는 농민들과 생태 평형의 붕괴 모두를 지시하는 표현이다. 백정희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렇게 개발주의가 인간 삶의 근원적 기초인 ‘땅’을 화폐에 의해 교환 가능한 ‘토지’로 변모시킨 후, 인간과 자연 모두를 생명의 순환적 질서 바깥으로 추방해버리는 폭력적 양상이 자주 나타난다. 「가라앉는 마을」에서의 월산댁의 죽음은 이러한 개발주의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비판하고 애도하기 위한 의도에서 서사화되고 있는 것일 터이다.(중략)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동강댐 건설과 유역 개발에 따른 리조트화에 대항하는 서식지 동물들의 항의 행동이 우화로 쓰여진 작품인데, 회의에 모인 동물들의 입을 통해서 이러한 행태가 직정적으로 비판되고 있다.(중략)

토지 위에 사회가 투영된 것이 도시라면(앙리 르페브르), 백정희의 소설 속에 묘사되는 도시 공간은 투기화된 자본에 의해 원주민인 빈자들의 생명과 생존권이 압살되고 박해당하는 차가운 배제와 폭력의 공간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뉴타운/신도시와 같은 미끈한 개발의 용어들을 통해서 괴물처럼 확장되는 것은 공간을 더 촘촘하게 자본화하는 물질적 탐욕과 욕망이다. 그것은 만족을 모르며 비대해지면서 희생양을 찾아내는데, 주거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들이다. 아무런 죄 없이 이들은 단지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는 이유 때문에, 뿌리내리고 싶어 했던 장소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제되고 추방된다.(중략)

작가에게 이 소설에서의 광주의 ‘말바우시장’이나 「외양간 풍경」에 등장하는 갑철의 고향 ‘목포 고화도’와 같은 장소는 인간적 친밀성으로 충만한 ‘실존적 장소 의식’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원체험적 공간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집 연작’에서 날카롭게 파열음을 뿜어내는 ‘계급도시’의 익명성과 이해관계로 점철된 자본의 폭력적 공간과는 의미론적으로 대비되는 공간이다.(중략)

백정희의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내내 ‘존재론적 거주 근거’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계급도시에서 주변화되어 추방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 문학의 영토에서조차 작품을 도용당하고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앓기를 반복하는 인물들. 그런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항상 과거에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끝없는 배제와 폭력에 직면하게 만드는 존재의 무근거성. 이런 것들을 거슬러 작가는 우리에게 진실한 문학과 삶의 존재 근거와 장소에 대해 거듭 묻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소설집이 백정희의 존재론적 거주 근거를 문학과 현실 모두에서 견고하게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계급도시에서 인간화된 도시로 가야 할 길이 우리 앞에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이명원(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작품 속으로

 

물안개가 너울너울 피어오르는 강변 위로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가며 섭새강 여울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골 가득 어둠이 채워지자 황금빛 작은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황금빛 물체는 어둠을 가르며 섭새 강변을 향해 빠르게 날아와서 멈춘다.

“사랑하는 동물 가족 여러분, 모두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어제도 슬픈 일이 있었고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우리 동물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저녁 결정되는 대로 우리는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모두들 고민하고 있는 문제점과 대안을 발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야생동물들의 생사를 나무 막대기 같은 몸에 둥근 머리를 가진 직립보행동물인 인간들이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박쥐들은 동물들의 생명을 인간에게 내어놓고 처분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맑은 물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13~14쪽)

 

낙현이가 팔아버린 산으로 접어들어 몇 발짝을 옮겼을 때였다. 전에는 땅까지도 보이던 오솔길이 잡초가 무성하여 산인지 길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발길도 끊어진 때문이었다. 낙현의 산은 군데군데가 파헤쳐져 상처투성이 환자로 보였다. 순태가 이사 준비를 위해 서두르며 낙현의 산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다른 상두꾼들도 뒤따랐다. 기영은 황 영감을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느린 발걸음을 몇 발짝 옮겼을 때였다. 기영의 발이 갑자기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바람에 황 영감도 덩달아서 나뒹굴어 넘어졌다. 황 영감은 며칠씩 식음을 전폐한 몸이었다. 기영은 황 영감을 부축하려 얼른 일어났다. 그의 발이 어딘가에 걸려 움직이질 않았다. 발만이 아닌 몸까지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밟히는 데가 없고 끝없는 벼랑 같았다. 기영이 발밑을 보니 생수 공장에서 파놓은 폐공 속에 발이 빠져 있었다. 폐공은 풀숲에 가려져 있는 데다 그 위에 비닐종이를 살짝 덮어 숨겨놓은 상태였다. 폐공 속에는 갖가지 쓰레기와 기름덩이 생활하수가 빗물에 씻겨 들어가 지하 100미터가 넘는다는 폐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영이 주위를 둘러보니 물 공장에서 파놓은 폐공들이 폐공 마감 처리도 안 된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라앉는 마을」, 141~142쪽)

 

집주인들은 재개발을 바라보고 몇 채씩 사놓은 이 낡은 건물에 세입자들을 들였으니 오직 투자만이 목적이었다. 세입자들은 늘 낡을 대로 낡은 주택에 몸을 의지하고 살며 재개발이 될 때까지만 집주인의 낡은 집 재산을 지켜주는 충직한 개에 불과했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으니 그저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다. 귀하고 천한 목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나 주머니가 두둑한지 얇은지로 인간을 귀하고 천한 목숨으로 편 가르는 세상이다 보니 그냥 천한 목숨인 척들 살아가고 있었다. (「바람은 길이 없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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