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순국
<상> 박정선 지음|푸른사상 소설로 읽는 역사 3|150×213×24 mm|384쪽
ISBN 979-11-308-1694-4 04810 | 20,000원| 2020.08.16.
<하> 박정선 지음|푸른사상 소설로 읽는 역사 3|150×213×24 mm|392쪽
ISBN 979-11-308-1695-1 04810 | 20,000원| 2020.08.16.
■ 도서 소개
삼한갑족 익명의 독립운동가의 거룩한 순국
박정선 소설가의 역사 장편소설 『순국』이 푸른사상사의 <소설로 읽는 역사 3>으로 간행되었다. 조국해방을 위해 이만 석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바친 삼한갑족 명문가 이석영의 족적을 소설로 그렸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6형제의 만주 망명부터 독립운동 기지 건설까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도 익명으로 존재했던 그의 순국은 더욱 거룩하고 장엄하다.
■ 작가 소개
박정선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장편으로 『백 년 동안의 침묵』(2012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외 『동해 아리랑』 『가을의 유머』 『유산』 『새들의 눈물』 『수남이』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청춘예찬 시대는 끝났다』(2015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사업 선정) 외 5권이 있다. 시집으로 『바람 부는 날엔 그냥 집으로 갈 수 없다』 외 8권, 장편서사시집 『독도는 말한다』 『뿌리』가 있다. 에세이집으로 『고독은 열정을 창출한다』 외, 평론 및 비평집으로 『타고르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혁명성』 『인간에 대한 질문-손창섭론』 『사유와 미학』 『해방기 소설론』 등이 있다. 심훈문학상, 영남일보문학상, 천강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해양문학대상(해양문화재단),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아라홍련문학상 대상, 부산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명진초등학교 교가를 지었으며 현재 문예창작, 인문학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 목차
<상권>
■ 작가의 말
1. 고독한 신념
2. 후계자
3. 세신가(世臣家)의 지조
4. 가문의 이름을 위하여
5. 가문 정신
6. 변화
7. 유산
8. 회오리바람
9. 날카로운 발톱
10. 진혼곡
11. 사면초가
12. 통분
13. 엄숙한 선택
14. 귀족 가문의 대이동
15. 낯선 땅에서
<하권>
16. 곧 나라를 찾으리라
17. 위기
18. 사투
19. 서울 하늘의 먹구름
20. 공허
21. 새로운 출발
22. 소용돌이
23. 오랜만의 동거
24. 고난을 먹고 피는 꿈
25. 동지
26. 도피
27. 자금
28. 석양
29. 절대 비밀
30. 마지막 길
31. 이별
32. 비탄
■ 이석영, 이회영 6형제 가문의 삼한갑족 계보
■ 귤산 이유원 연보
■ 영석 이석영 연보
■ 참고 문헌
■ 출판사 리뷰
삼한갑족이라 일컬어지는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정승을 바라보는 고위관료였던 이석영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모두 바치고 유골마저도 망명지 허공에 흩어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오늘날 그를 기억해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 작가 박정선은 이석영의 동생인 우당 이회영의 독립운동을 그린 소설 『백 년 동안의 침묵』에 이어 이번에는 이석영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 형제의 가슴 뜨거운 희생을 소설로 그려냈다.
이석영은 이회영의 형님으로 당시 영의정 이유원의 양자로 출계 했다. 굴욕적인 경술국치의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그는 독립군을 양성할 신흥무관학교를 만주 서간도에 세우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6형제와 함께 망명을 결행했다. 낯설고 험한 만주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까지 형제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주 독립운동의 토대가 된 그들 형제의 망명은 한인들의 자치 조직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는 꿈을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숱한 항일 무장투쟁의 전위부대를 형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여 밀정을 처단했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용기와 희망의 불을 지폈다.
이석영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아우 이회영의 항일운동을 자본으로 뒷받침했다. 이회영이 항일의병을 도왔던 것도, 인삼밭과 제재소를 차린 것도,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로 한 것도 모두 이석영의 자금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석영은 이만 석 재산을 모두 바치고 말년에는 굶어 죽는 비극을 맞이했다, 아들 형제까지 바치고 혈육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유해조차 찾을 수 없도록 그는 조국을 위해 철저히 산화했다. 조국 해방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질수록 더욱 불타올랐던 노 혁명가가 끝내 맞이한 비참한 죽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유골마저도 망명의 땅 허공에 흩어버린 이석영, 감히 필설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그의 순국은 너무나 비참, 처참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혈육 한 점, 뼈 한 조각 남김없이 철저히 산화하고 말았다. 이만 석 재산을 소진하고도 모자라 자식까지 모두 바쳐버린 그는 옷 한 벌, 사진 한 장, 신발 한 짝 남기지 않았다.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었고, 기억해주는 이 없었다. 해방의 만세 소리가 산천을 흔들고 애국지사들이 앞다투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도, 그 후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략) 한국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극이 있지만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는 없다. 이석영이야말로 독립운동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긴긴 세월, 기약 없는 세월을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익명성으로 일관하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것은 79세의 고령까지 무서운 고통을 인내하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음에도 그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현충원에는 수많은 애국자들이 잠들어 있지만 그의 묘는 없다. 다만 서울 현충원 현충탑 지하에 무후선열(先烈無後,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선열) 영전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석영은 더욱더 거룩하고 장엄한 순국을 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이해할 능력이나 알아줄 능력이 없었다. 자기를 부인한 채, 마치 한 자루 촛불처럼 마지막 숨결까지 남김없이 산화해버린 그를 우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그를 기억해야 한다. (하략)
■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지금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석영 선생의 업적이 뒤늦게 조명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석영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관련기사
「국가보훈처,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선정」, 『충청투데이』 2020.8.3.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5783)
「‘독립군 3500명’의 아버지…600억 재산 바쳐 독립운동 후원한 이석영」, 『경기신문』 2020.8.13.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597886)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으며」, 『아주경제』 2020.8.13.
(https://www.ajunews.com/view/20200813122956739)
■ 책 속으로
오늘도 노인은 국숫집 여자가 내준 국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노인이 아내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내는 힘겹게 일어나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경술년(1910)까지만 해도 서울 정동 대궐 같은 집, 아흔아홉 칸 집에서 하인들이 차려준 9첩 반상을 받던 아내였다. 12첩 임금님 밥상 다음가는 밥상이었다. 9첩 반상보다 더 귀하게 국수를 먹는 아내를 바라보며 노인은 “먹는 일이 사람을 이다지도 좌우하다니!”라고 한탄했다.
먹는 것 때문에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배가 고파 변절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제가 주는 밥으로 배를 채운 다음에는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 동지들의 목을 내주었다. 노인은 수많은 그들을 봤고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변절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똑같았다. “일제가 준 밥, 결국 독으로 배를 채웠습니다.”라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용서조차 빌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상권, 24쪽)
노인은 경만을 토방으로 이끌었다. 경만은 정작 토방을 보자 넋을 잃었다. 방 안에는 그 고귀하던 안방마님이 백발을 하고 버려진 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아, 이럴 수가!”
경만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해도, 해도, 어찌 이 지경까지 되셨단 말씀입니까!”
경만은 울면서 또 옛날처럼 원망을 쏟아냈다.
“이만 석지기 재산 다 털어 바친 대가가 이거라니요.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조국이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도대체 조국이 어디에 있는지요?”
경만은 울분을 참지 못해 집 밖으로 뛰쳐 나가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경만의 울분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경만의 말대로 조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국이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조국은 너무 깊이 숨어 있는 탓에 보이지 않았다. 숨어 있는 조국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보일 뿐이었다.(상권, 37쪽)
대감은 그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선 채로 멀리 들녘을 바라보았다. 보광사에 오르자면 마을을 지나야 하고 들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천마산에 올라 절을 향해 가는 길 중간쯤에서 바라보면 대감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보였다. 대감은 자신이 소유한 땅, 끝없이 펼쳐진 넓은 땅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불쑥 “너는 가문의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권력과 명예이더냐”라고 했다.
석영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어김없이 백사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임진왜란의 난국과 광해가 인목대비를 폐비시킨 것도 모자라 폐모한 일을 거두어야 한다고 충언하다가 유배를 받았던 일을 떠올리면서 한 치 망설임 없이 ‘선택’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힘든 선택을 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게 조선 명문가의 전부이거늘,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는 게냐”
“예, 권력과 명예가 우리 조선 명문가의 전부인 만큼 그래서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어려운 선택이 더욱 빛날 수밖에요. 권력과 명예가 한철 피는 꽃이라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힘든 선택은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
“너도 장차 백사 할아버님의 전철을 밟을지 모르겠구나.”
대감은 백사 할아버님처럼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목숨까지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석영은 그렇게 알아들었다. (상권, 130~131쪽)
울며 토방을 뛰쳐나갔던 경만이 다시 돌아왔다. 경만은 독립운동에 재산을 다 바치고 굶고 있는 석영을 원망하며 통곡하다가 토방을 나갔지만 실은 돈을 구하기 위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가부좌를 튼 채 미동이 없는 석영을 발견한 경만이 정신없이 석영을 흔들었다.
“어르신!”
꼼짝하지 않는 석영이 마지막 숨을 끌어올렸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거라.”
석영은 짧은 유언을 남기고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경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지키기로 했다. 혼자 장례 준비를 했다. 구해 온 돈으로 관을 사고, 쌀과 향을 샀다. 혼자 입관을 한 다음 향을 피우고 쌀밥을 지어 올렸다. 오랜만에 쌀밥 향기가 방안에 퍼졌다.
“대감마님, 고향에서는 일 년 열두 달 흔하디흔한 쌀밥이었는데, 이제라도 많이 드세요.”
경만은 봉긋하게 담은 쌀밥 위에 수저를 꽂고 절을 하며 토방이 허물어지도록 울었다. 경만은 호칭을 예전의 대감마님으로 바꾸어 불렀다. 옛날처럼 고귀한 대감마님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었다. 찾아올 사람 한 사람도 없지만 오일장을 치르기로 하고, 5일 동안 끼니때마다 새로 밥을 지어 올리며 그동안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곡을 했다.
1934년 2월 28일, 상해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경만은 마차를 임대하여 관을 모셨다. 붉은 비단폭에 ‘경주 이씨 백사공파 백사 이항복 자손, 영석 이석영 애국지사 순국’이라고 쓴 명정(銘旌)을 마차에 꽂았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를 향해 길을 잡았다. 앞뒤로 단 한 사람도 따르지 않는 마차는 드넓은 허공을 거느린 채 뚜벅뚜벅 묘지를 향해 걸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눈꽃이 관을 소복소복 덮으며 아름답게 꾸몄다. 관을 끄는 말도 하얗게 변했다. 백마가 된 말은 석영이 젊어서 타던 유휘와 흡사했다.
“대감마님, 유휘가 왔습니다. 대감마님을 모시라고 아마도 큰사랑 대감마님께서 보내주셨겠지요.”
경만이 울며 말을 몰았다. 말은 묵묵히 걷고, 갈수록 눈이 더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경만이 말을 재촉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감마님, 아직도 조국을 못 잊어서 그러시지요.”
말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감마님, 조국을 이대로 두고는 못 가시겠지요. 죽어도 못 가시겠지요.”
말은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목숨까지 바치셨으면 됐지 무엇을 더 바치시려구요”.
그래도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하염없이 내려 쌓였다.
“예! 알겠습니다. 이놈도 목숨 바쳐 나라를 찾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이제 되셨는지요.”
말이 다시 움직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하얀 길을 따라 백마 유휘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례를 끌며,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묘지를 향해 유유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권, 368~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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