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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간행도서

이기헌 시집, <유랑하는 달팽이>

by 푸른사상 2020. 8. 3.

유랑하는 달팽이

 

이기헌 지음푸른사상 시선 130128×205×8 mm1249,000

ISBN 979-11-308-1691-3 03810 | 2020.8.3

 

 

■ 도서 소개

 

일상의 존재들을 품는 사유 깊은 사랑

 

이기헌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유랑하는 달팽이<푸른사상 시선 130>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일상에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약하고 상처 많은 존재들을 관찰한다. 이웃은 물론이고 개미나 비둘기까지 품는데, 참신한 어법으로 그들의 존재성은 부각된다. 시인의 사유 깊은 시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되짚어가는 것이면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다.

 

 

■ 시인 소개

 

이기헌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1때 푸시킨 시집을 처음 접하고 감명받았다. 그 후 중고 시절 내내 청계천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국내외 명시집을 읽었다. 학업을 마친 뒤 문학인의 삶 대신 한 가정을 부양하기 위한 장사꾼의 삶을 살았다. 불혹의 나이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하여 2008년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시집 고깔모자 피자가게를 내고 문단에 나왔다. 2015년에는 등단 이전 젊은 시절의 시를 엮어 만든 두 번째 시집 당신이 문득 떠나고 싶을 때를 내놓았다. (E-mail : peter5869@naver.com)

 

 

■ 목차

 

시인의 말

 

1

양은 냄비 / 유랑하는 달팽이 / 개미굴로 출근하다 / 절뚝발이 비둘기 / 종점다방 / 소화제를 먹으며 / 버스 정류장에서 / 고달픈 어미 고양이 / 화살표 / 변종 왕거미 생태 보고서 / 티라노 타워 / 폐차장으로 가는 버스 / 마음정신과의원 / 측은지심 / 냉장고를 정리하며

 

2

눈을 치우며 / 저녁기도 / 건조주의보 / 소멸의 시간 / 기도의 시간 / 진눈깨비 / 흘러가는 도시 / 148번 버스를 타고 / 구토 / 박쥐 / 빈방 / 출근열차 / 천사를 만나러 갑니다 / 1999 / 당고개행 열차를 탄다

 

3

노송의 다비식 / 꽃 배달하는 할아버지 / 죽은 참새와 아이들 / 나무 고아원 / 가을 친목회 / 아버지와 아들 / 어느 택배 기사의 봄날 / 민들레의 꿈 / 까치집 정원사들 / 매미 / 떠돌이 개미 / 행복슈퍼 / 고양이 통장 / 도토리나무 / 봄나들이

 

4

1972 / 울 엄마 / 목련꽃 피면 / 반문 / / 윤회 / 벌초 / 황천길 / 정신대 훈 할머니의 기억 / 유통기한이 남아 있었다 / 개꿈 / 성 바오로 병원 근처 / 매듭 / 봄나물 / 고려장

 

작품 해설생의 애환을 넘어 시적 환멸로 백인덕

 

 

■ 시인의 말

 

이번 시집을 내기까지 참 긴 시간이 필요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는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쉬운 언어로 시를 구현한다는 것,

그것은 나의 오래된 고집이었지만

한 발 물러나 상대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내 작품의 평범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세월이 제법 흘러 내게도 깨달음은 있었다.

비록 시가 못나고 투박할지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거였다.

 

 

■ 작품 세계

  

도시, 일상, 주체, 생활과 같은 어휘들을 나열하면 우리는 은연중에 마치 우리가 진공 상태에 갇힌 어떤 개별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잠깐의 날숨에도 곧바로 우리는 여러 현상, 특히 생명 현상과 비대칭, 비위계적으로 얽혀 있고 어쩌면 그것이 현존의 진정한 근거임을 깨닫게 된다.

앞의 인용 시에서 때늦은 점심식사야말로 한참을 정신없이집중해야 할 나의 생활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자꾸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 발이 불구인 비둘기 한 마리에게 신경이 간다. 어떤 감정이입이나 의미 부여 이전에 비둘기는 시인의 세계에 틈입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시장 골목의 길고양이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출산했기에 아니 그 사실 때문에 시인의 일상 속에 관찰의 대상으로 위상이 변한다. 이 위상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시인의 인식이 경험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기 이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와 새끼가 로드킬 당한 어미 고양이는 시인 자신의 변신이거나 치환물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자기 성찰의 시적 계기로 작용한다.(중략)

이기헌 시인의 이번 시집은 크게 여기-지금삶의 애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연의 얽히고 맺힘을 생기로 전환하는 나와 시간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이미 시적 환멸(還滅)의 경지, 아픔과 슬픔을 초월해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백인덕(시인)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그의 시를 인용해 말하자면 시인은 제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 메고”(유랑하는 달팽이)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이다. 시에 드러난 대상들의 모습을 통해 그의 유랑이 향하는 지점을 읽을 수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약하고 상처 많은 존재들이다. 절뚝발이 비둘기」 「고달픈 어미 고양이」 「나무 고아원등 제목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걸음은 온전히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에게로 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들이 절망을 끌어안고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어둠 속 희미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빛”(기도의 시간)을 다시 기억해낸다. 시인이 이렇듯 고달픈 유랑 중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 어머니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은은한 밥 냄새로 남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난한 행복조차도” “든든하”(1972)게 바꿔놓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유랑은 어머니의 사랑을 되짚어가는 과정이며, 또한 그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써내려가는 유랑이기에, 그의 시는 한 행 한 행 달팽이가 그려놓은 길처럼 희미한 별빛에도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길상호(시인)

 

 

■ 시집 속으로

 

유랑하는 달팽이

 

해남에서 온 채소를 다듬다가

잎사귀 사이로 웃으며 걸어 나오는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깜짝 놀라 일손을 멈추었지만

조금은 귀여운 몸짓에 안도하며

나 또한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제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 메고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도시를 유랑 중이라며 일박을 청했다

나는 배낭 속 소지품이 궁금했지만

달팽이는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루하던 식당이

배낭 멘 여행객으로 생기가 돌았다

농수산물 시장을 둘러보고

싱싱마트를 경유해 왔다는 달팽이는

주방 구석에 마련된 숙소에서

하루의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 출근한 나는 여행객에게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벌써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의 개천을 둘러보고 싶다고

넌지시 도움의 손길도 내밀었다

주방 아줌마가 챙겨준 간식거리를

비밀의 배낭에 꼼꼼히 챙긴 다음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개천까지 잘 배웅해주었다

 

 

개미굴로 출근하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출근 시간

집을 나선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다

지하철역 입구를 서성거리다가

길가 보도블록에서 걸음을 멈춘다

꽤나 흥미로운 행렬이 오가는 중이다

개미 왕국으로 가는 페로몬 길

문득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사람의 탈을 벗어버리고

부지런한 일개미로 변신한다

그 낯선 오솔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왕국으로 들어간다

눈앞에 활짝 펼쳐진 개미 나라,

일개미들은 끊임없이 일만 하고

여왕을 위한 역정은 끝이 없다

노동에 지친 개미들이 병들어 쓰러지면

청소개미들이 어디론가 실어 간다

그래도 여기는 할 일이 있어 좋다

시름을 잊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틈틈이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다닌다

날이 저물어 집이 그리워지면

여왕의 애장품 하나 슬쩍

품에 감추고 굴 속을 빠져나온다

서둘러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퇴근한다

 

 

진눈깨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 안의 일상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넋 놓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오후가 지날 무렵 집을 나와

발길 가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마침표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미로처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진 길을 따라서

혼돈의 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저녁노을이 멀리서 물들어가고

걸어온 길은 쓸쓸히 저편에 머물렀다

뒤엉킨 심정을 뒤로한 채

되돌아가는 발걸음은 허전했다

어둠이 물들어가는 아스팔트 길 위로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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