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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그가 쓴 시 앞에서 '미안합니다'만 거듭했다

by 푸른사상 2013. 1. 18.

 

그가 쓴 시 앞에서 '미안합니다'만 거듭했다

20년 동안 현장노동자로 일한 시인 정세훈, 새 시집 <부평 4공단 여공> 펴내

 

 

 




늘 그녀들로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내 처지만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공돌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면박을 줄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펜팔을 했다
펜팔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그녀는
부평 4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 작업, 휴일 특근작업, 36시간 교대작업,
공장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부평 4공단 여공' 모두

 

지난 2006년, 삶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시집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를 펴냈던 시인 정세훈. 그가 마침내 노동현장에서 얻었던 그 몹쓸 병마를 훌훌 떨치고 새 시집 <부평 4공단 여공>(푸른사상)을 펴냈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 곳곳에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지닌 속내를 제대로 훑는 참시들로 가득하다.    

모두 4부에 64편이 실려 있는 이 시집은 10대 때부터 집안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공장생활부터 아프게 되짚는다. 시인은 그 힘겨운 노동 때문에 얻은 몹쓸 병과 싸우다 실의에 빠진 나날들... 그 나날들을 딛고 마침내 거듭나 이 힘겨운 세상을 다시 품는 사리알 같은 시편들을 푸성귀 잎사귀처럼 펼치고 있다.       

'2012년 노동판', '이건 시가 아니다', '외상 노동', '채 아물지 않은 노동', '맑은 하늘 하나 낳아보리', '병든 몸을 바꾼다', '혈관에 스며드는 마취제처럼', '시가 울 듯 울었다', '희망버스에 승차하지 못한 날', '밥은 촛불이고 촛불은 밥이다', '나는 언제나 빨갱이가 될 것이다', '어머니가 우신다', '차가운 사랑', '흉터', '옛 고을 호미' 등이 그 시편들.

시인 정세훈은 '시인의 말'에서 "누가 묻는다. 자본주의가 싫으냐고 묻는다. 분명하게 대답한다. 민주를 파괴하는, 그러한 자본주의는 싫다"고 못 박는다. 그는 "민주를 꽃 피우는, 그러한 자본주의라면 좋다. 자본을 살찌게 하는 그만큼 노동도 살찌게 하는, 공생의 자본주의가 좋다"라며 "민주주의보다 우선시 되지 않는 자본주의가 좋다. 그렇지 않은 자본주의는 나에게 무의미하며, 싫다"고 확실하게 썼다.

그는 왜 이처럼 자본주의에 대해 대못을 쾅쾅 박는 것일까. 그 까닭은 따로 있다. 그는 "공장에서 얻은 병으로 투병 중이었던 내 육신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상황"에서 "천행으로 이를 극복하고 재생"했기 때문이다. 죽을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난 삶이니 "더욱 공공선(公共善)에 투신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다.

나는 20년 동안 노동현장에서 일한 그 시인에게 할 말이 없다


1972년 중졸 소년이 노동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탄을 캐내는 광부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도 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늘 자기처럼 되지 마라 했다
아버지 같은 노동자가 되기 싫었다
그러나 소년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큰 공장에 들어가 일하고 싶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중학교만 졸업했다는 이유로
규모가 작은 영세 공장에 들어갔다
노동법 하나 적용받지 못하는 공장이었다
공장은 석면가루를 날렸다
화공약품 악취를 풍겨댔다
통풍이 안 되어 40도를 오르내렸다
                                             -'2012년 노동판' 몇 토막

 

시인 정세훈이 쓴 시... 그가 살아온 삶을 들추면 가슴이 시려오면서 갑자기 오슬오슬 추워진다. 젊은 날, 우리들 바람과는 전혀 다른 현장노동자가 되어 둘 다 거칠게 살아왔지만 시인이 겪은 노동현실과 내가 겪은 노동현실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창원공단에 있는, 그나마 괜찮은 큰 공장에 들어갔지만 그가 들어간 공장은 "노동법 하나 적용받지 못하는" 영세공장이었다.

나는 8년 동안 그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했지만 다른 병은 얻지 않았다. 그는 그 콧구멍만한 공장, 석면가루가 날리고, 화공약품이 악취를 풍겨대고, 통풍이 안 되어 40도를 오르내리는 그런 지옥 같은 공장에서 몹쓸 병까지 얻었다. 그때부터 그를 괴롭히는 그 '진폐증'이란 괴물은 그를 노동현장에서조차 떠나게 만들었다.

"함께 일하던 소년노동자들"은 "가슴이 답답하다며 고향으로 갔"고,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했"지만 "그 누구도 왜 죽었는지 몰랐다". "1972년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가 / 1992년에 어쩔 수 없이 나온 노동판"은 그에게 계속 악몽으로 이어졌다. 그 악몽 속에는 "최저 임금제가 생겨났지만 / 노동판은 죽이고 자본만을 살찌우고 있었"고, "비정규직을 만들어 / 노동판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 "노동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부를 누린 자본"은 급기야 "정리해고라는 칼을 들이대"며 "일방적으로 공장 문을 닫아 버렸"고, 그렇게 쫓겨난 노동자들은 "후진국으로 더 싼 피땀 값을 착취하러" 가야 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그들은 "든든한 비호세력 정권과 함께 / 종북세력 빨갱이로 매도"까지 했다. 그랬으니, 진폐증을 앓고 있는 시인 마음이 오직 속이 탔겠는가.

시인 정세훈은 어쩌면 그 때문에 그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끝내 이겨냈는지도 모른다. 억울해서, 너무도 분해서 기어이 살아남아 그 어긋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 그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글만 써서 먹고 살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악만 쓰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시인 정세훈에게 할 말이 없다. 20여 년 동안 그 열악한 작은 공장에서 일하다 몸만 망가진 그에게, 8년 동안 그나마 환경이 나은 대기업체 노동현장에서 일했던 내가 '나 몰라라' 큰 빚을 떠안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앞부터 그가 쓴 시를 읽으며, 그 시 앞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과 자본을 이어주는 '공공선'을 찾는 시 

살려 주십시오
빈다
나의 신께 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죄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죄
공장에서 병든 죄를
까닭 없이 지었으나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으며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게으름 피우지 않았으며
열심히 땀을 흘려 살아왔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빈다
나의 신께 빈다

살고 싶다
정말 살고 싶다
허다하게 병치레를 해왔으니
시름시름 해왔으니
한번쯤은 병들지 않은 몸으로
살고 싶다
                          -'혈관에 스며드는 마취제처럼' 몇 토막

 

시인 정세훈이 노동현장에서 얻은 진폐증은 잔인하고 무서웠다. 오죽 심했으면 "살려만 주신다면 / 인간답게 살겠다고 / 나보다 더 힘든 이를 위해 /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 가망이 희박하다는 수술대에 누워 / 혈관에 스며드는 마취제처럼" 빌었을까. 오죽 지독했으면 당직 간호사들이 그를 보고 "난 여자인 줄 알았다 / 하도 몸이 야위어서 나도 여잔 줄 알았어 / 어쩌면 남자 몸이 이처럼 말랐을까"라고 중얼거렸을까.

진폐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시인. 그때 시인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어쨌든 살아남아야 그가 바라는 노동과 자본을 이어주는 '공공선'(公共善)을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고 느꼈다. 시인이 이처럼 그 험악한 노동이 몸에 남긴 죽음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끈질긴 몸부림은 이 시집 곳곳에 피멍으로 박혀 있다.

"김사인 형 앞에 / 내 좋아진 얼굴을 보여주기까지 / 공장에서 일했을 때나 / 공장을 떠나 있었을 때나 / 오직 온갖 병치레로부터 / 살아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제대로 한번 살아야겠다)라거나 "왜 자꾸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지 몰라 / 분명히 그 무덤은 내 무덤이 아닌 게 확실한데 / 어쩌면 그 무덤은 내 무덤이라는 생각이 든다네"(무덤) 등 여러 편이 그러하다.

 

희망버스에 대해
나는 공생을 위한 것이라 하고
그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이라 한다
고공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을
나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투사라 하고
그는 선량한 이들을 선동하는 빨갱이라 한다
                                  -'희망버스에 승차하지 못한 날' 몇 토막

 

이 시집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은 노동(죽음)과 자본(삶), 그 사이를 이어주는 끈을 쥐기 위해 시인이 다시 흘리는 땀방울이다. 정세훈 시인은 자본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선과 악처럼 비치는 노동과 자본이 스스로 주고받으며 함께 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든 무슨 주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세훈 시인만이 지닌 독특한 철학이다.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 달라지지 않은 해고 노동자 / 원직 복직을 위해 / 시가 울 듯 울었다"(시가 울듯 울었다), "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제 몸을 불태워주던 / 가난한 나의 한 자루 촛불이여"(밥은 춧불리고 촛불은 밥이다), "민주가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자본이 민주를 위해 존재하는 / 진정한 민주주의를 선언한다"(민주가 자본에게),

"허어 그런데, 오늘 세상의 허다한 고문들이 나에게 물들어 오네 /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해고 노동자"(거룩한 고문), "배가 고파 / 젖꼭지를 물었다가도 / 배를 채우고 나면 / 더 이상 / 한 모금도 탐내지 않듯이"(먹는 법), "나는 이 흉터를 /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흉터), "새 호미는 / 날이 너무 꼿꼿하여 위험하다며 / 일손을 다치게 하고 / 곡식을 다치게도 한다며 / 한사코 바꿔 쥐어주시던 / 날이 반쯤 닳아 무디어진 호미!('옛 고을' 호미) 등이 그러하다.

 

달동네 단칸 셋방 독거 할머니

달랑,
한 장 남은
금이 간 연탄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노끈으로 동여매시네
                                       -'엄동설한' 모두

하찮고 힘없는 모든 것 짙푸른 잎사귀로 매달다  

 

"그동안, 1990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5편의 시를 발표한 것을 문단에 나온 근거로 삼아 왔다. 근년에 와서 1989년 '노동해방문학' 5월호에 나의 졸시가 실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문단에 나온 근거를 바로 잡으며, 이를 이 지면을 통해 밝힌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정세훈 새 시집 <부평 4공단 여공>에 실린 시들은 '엄살'이나 '치장'이 없이 그야말로 '참살이'만 메아리친다. 십대 때부터 현장노동자가 되어 일하다 병을 얻어 긴 세월을 병마와 싸워 기어이 이겨낸 한 시인이 살아온 지옥 같은 삶이 그대로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은 마침내 새로운 희망이란 씨앗을 싹틔워 이 세상에서 하찮고 힘없는 모든 것을 짙푸른 잎사귀로 매단다.  

시인 정희성은 "그의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는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그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한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선 그의 시에는 푸성귀 같은 생기가 있다"라며 "나는 그의 다짐을 '실직' '푸성귀' 같은 시에서 확인하거니와 일찍 세상을 앓다 간 박영근에게 보여준 각별한 애정에서도 그것을 확인한다"고 썼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사인은 "섧고 고달프고 분한 고비에서도 시선과 목소리에 진실함을 잃지 않고자, 사람에 대한 미움에 발목 잡히지 않고자 그가 어떻게 애쓰고 있는지를"이라며 "'엄동설한' '어머니가 우신다' '첫사랑' '야릇한 통증' 같은, 투명하여 가슴 아픈 가편(佳篇)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여기저기 피어나 있다. 얼마나 힘센 소박함인가. 얼마나 무서운 선량함인가. 무엇이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7살 때부터 자그마한 공장에서 현장노동자로 일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공장에서 얻은 병으로 30여 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1년 초부터 건강이 좋아져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가 있으며,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 송사리 큰눈이>, 포엠 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 향기>를 펴냈다.


                                                                  오마이뉴스 2012년 12월 1일 이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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