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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친구가 보낸 책 때문에 며칠 앓았습니다 시인 이소리, 등단 33년 만에 첫 산문집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 펴내

by 푸른사상 2012. 11. 12.

미자야
잘린 네 손가락에도 핏물 돌아
금방이라도 손가락이 쑥쑥 자랄 것 같은
피에 젖은 봄이 온다

삼팔선 같은 철망 밖
파릇파릇 쑥이 돋는 남천둑 위로
별똥 같은 어지럼 이는데
완성품으로 잘 다듬어진 총무과 뜰에서
해마다
잘려나가는 여공들 손가락 세며
창백한 얼굴로 목련이 핀다
칩장에 수복이 쌓인 서러움 사이로
시뻘건 녹물이 핀다

못 참아
더러워서 더 못 참아
모여라
어깨 끼고 나가자
피 토하듯 소리치는 미자야
이제는 네 부은 얼굴 위로도
눈물 떨쳐낸 목련이 핀다
마른 살을 떨면서
새벽안개 같은 새하얀 목련이 핀다
- <봄이야기> 모두

 이소리 산문집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때까지>
ⓒ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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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마이뉴스>를 통해 알게 된 친구가 자신이 쓴 산문집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를 보냈다. 그가 내게 보내준 산문집은 나를 열여덟 살 시절로 한 번에 보내버렸다.

그때, 나는 구로1공단에서 공돌이로 살았다. 카메라와 쌍안경을 생산하는 대한광학 연마실에서 밤과 낮을 번갈아가며 교대 근무·연장 근무를 하면서 보냈다.

그 시절은 하루하루 참 암울했다. 기회만 되면 그만둔 학업을 연장하기 위해 모진 애를 썼지만, 공장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6개월 만에 사표를 쓰고 고향에 내려와 학업을 이어갔다.

<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를 며칠 동안 반복해 읽으며 그 당시 암울했던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을 빙빙 배회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같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살아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의 시 <봄 이야기>는 그 시절 공단에서 무시받고 괄시받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공장으로 뛰어든 어린 여공들과 공돌이들이 흘려야 했던 아픔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지금이야 공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의 저자 이소리(본명 이종찬)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다. 그는 지난 2003년 자신이 공돌이로 살 당시에 쓴 노동시를 연재했다. 이번에 나온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는 당시 집필했던 글을 모은 산문집이다.

시인은 1959년에 창원에서 태어나 1980년 <씨알의 소리>에 시 <개마고원> <13월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창원공단 현장 노동자로 일했으며 무크지 <마산문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간사·한국문학예술대학 사무국장·<시와 사회> 편집인 겸 편집주간·<울산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인터넷신문 <뉴스 Q> <시사포커스>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시 집으로는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웁니까> <바람과 깃발>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미륵 딸>, 편역서 <미륵경>, 막걸리백과사전 <막걸리>를 펴냈다. 현재 그는 한국작가회의 이사 겸 회보편집위원장·일간문예뉴스 <문학in>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공단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이소리(이종찬) 시인
ⓒ 마동욱 제공




추워
저 금형만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마구 떨리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

배고파
프레스기 앞에만 앉으면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떨려오면서
별들이 반짝거려

달아나고 싶어
진종일 검은 햇살만 쏟아지는
이 무시무시한 공단이 없는 곳으로
마구 도망치고 싶어
- <공돌이의 꿈> 모두

춥 다. 그랬다. 그 시절 공장 안에만 들어서면 춥고 떨렸다. 분명한 이유는 몰랐지만, 추웠다. 작업복 위에 두꺼운 방한복이라도 입어야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공장 밖에서는 느끼지 못한 추위였다. 내가 겪은 추위는 구로공단, 그리고 내가 서울구치소 교도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느낄 수 있는 추위였다.

담장 안에만 들어서면 추웠다. 담장 안에 근무하는 교도관들은 늦은 봄까지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담장 안 생활을 한다. 공장 생활을 하던 그 시절도 그랬다. 추위는 가난하고 무시 받으며 괄시받은 사람들에게 더 혹독했다.

프 레스기는 사람 손가락뿐만 아니라 손목까지도 금세 자를 것처럼 시퍼렇고 무섭다. 수많은 어린아이들은 프레스기 때문에 손가락을 잃었다. 지금은 산업재해라고 해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는 보상은커녕 직장에서 쫓겨날 걱정을 해야 했다.

시인이 경험한 8년간의 공장생활

시인 이소리는 2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보낸 8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긴, 그 시절에 무슨 자격증이 필요했겠는가. 그저 손발 멀쩡해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됐지.

책 을 읽다 보면 시인의 인내심과 뚝심에 점점 빠져든다. 그 시절은 1970년대 후반 군사독재가 가장 심했던 시절이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떨어지는 낙엽도 멈추게 한다는 공안당국의 서슬 퍼런 감시가 우리나라 곳곳을 살벌하게 만들었던 시기였다. 그런 시절에 그는 공단에서 무크지를 만들고, 노동시를 썼다. 그의 용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당시는 함석헌 선생께서 만들었던 <씨알의 소리>가 불온잡지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시절 자주 <씨알의 소리>를 읽었다.

1980년대 초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초를 겪는 모습을 봐야 했다.

시 인 이소리도 그 시절, 공안당국의 사슬에 위험할 뻔도 했지만 시인 이선관이 가르쳐준 지혜로 혹독한 고초는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지혜는 바로 "나는 시를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 시절은 시를 모른다고, 알지 못한다고 해야만 고초를 피해 갈 수 있었던 비참한 시기였다.

그 비참한 시기에 나는 서울구치소에 근무하면서 수감된 대학생들이 보는 책들을 검열했다. 대부분은 불온서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책들. 그러나 불온서적으로 분리된 책들이 모두 불온서적 목록에 적혀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는 목록에 없는 도서는 가급적 학생들에게 넣어줬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결국 안기부에 두 번씩이나 불려갔다. 다행히도 "불온서적 목록에 없기에 그냥 몰라서 넣었다"고 답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시절은 혹독한 시절이었다.

없는 죄 만들어 징역 보내던 시절

어두운 밤
한 여인이 방망이질을 한다

하얗에 여윈 손가락으로
요리조리 주무르고
헹구어도
헹구어도
날은 밝아올 생각을 않고
들판에 개구리만 무더기로 우는데

여인아
이토록 깊은 밤에
하이타이가
다이알 비누가
무슨 소용 있는가

도깨비 방망이라면 몰라도
요즈음 그런게  어디 있담
- <밤 빨래> 모두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날 내게 전화를 건 군인은 금속성이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 한 구절을 읊으며 나더러 일일이 설명을 하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생산과장 책상 앞에 달랑 한 대 놓여 있는 그 전화로.

왜 하필이면 시 제목이 <밤 빨래>냐? '밤 빨래'는 대체 무엇을 뜻하느냐? '개구리'는 데모나 하는 새끼들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냐? 밤에 빨래를 하는'여인'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 누가 이렇게 쓰라고 시키더냐? 나는 그날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는 아직 어려서 시가 무언지 잘 몰라요"라고. 전화를 건 군인은 그래도 단어 하나, 행간 하나마다 꼬치꼬치 캐 물었다."(<저는 시가 무언지 잘 몰라요> 중에서)

그랬다. 그 시절 비상계엄사·보안사 군인들은 이상하면 절대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전화로 위협하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출두 명령을 내리고, 출두하지 않으면 잡아다 고문시키고, 그리고 없는 죄를 만들어 국가보안법으로 엮어 징역을 보냈다.

공단 보릿고개를 아십니까

"공 장에 조금만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현장 노동자가 눈에 띄면 적당한 핑계를 삼아 시말서를 쓰게 했다. 시말서를 세 번 쓴 현장 노동자들은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서로 보내거나, 심한때에는 다른 지역에 있는 자매공장으로 가차없이 전출을 보냈다.

오 뉴월 보릿고개는 똥구녕 찢어져라 가난한 시골에서 늙으신 부모님들만 겪는 게 아니였다. s라디에타 노조가 깨지면서 창원공단 현장 노동자들에게 찾아온 공단 보릿고개는 오뉴월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와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공단 보릿고개를 아십니까?> 중에서)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는 시인 이소리가 겪은 오랜 세월.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현재도 그와 같거나 더 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 히 노동 현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현장 노동자들의 나이가 그 시절과 달리 성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 정도. 그 시절 공장 노동자들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해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업 일꾼으로 밤잠을 설치며 피눈물을 흘리며 일했다.

어느 날 찾아온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 한 권은 내 옛 기억을 되살리고 지금을 톺아보게 했다.

덧붙이는 글 |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 출판기념회가 11월 15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사동면옥 2층서 열립니다. 문의는 02-735-7393으로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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