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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뉴스 책동네 고단하고, 낡고, 슬프고 아픈 이 여자들 작가 황영경 첫 단편소설집 <아네모네 피쉬> 펴내

by 푸른사상 2012. 11. 12.



▲ 황영경 단편소설집 <아네모네 피쉬> 작가 황영경이 첫 단편소설집 <아네모네 피쉬>(푸른사상)를 펴냈다
ⓒ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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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여자들은 육지 남자들에 대한 근원적인 환상을 품고 있었다. 아주 옛날 귀양을 살러 온 반역의 죄인들조차도 해룡을 타고 성난 파도를 가르며 나타난 의인쯤으로 여겼다. 따라서 나라의 중죄인이 불어날수록 소라섬 여자들의 행복도 불어났다. 섬 남자들이 수평선 너머 어디쯤의 대국에 대한 향수를 품을 때 여자들은 뭍의 어느 질퍽한 저잣거리를 지난 생의 고향이라고 추측하고는 했을 것이다." - 14~15쪽, '동백나무 열매가 하는 말' 몇 토막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 황영경이 첫 단편소설집 <아네모네 피쉬>(푸른사상)를 펴냈다. 이 소설집 제목인 '아네모네 피쉬'는 말미잘을 방패로 삼아 살아가는 바다 물고기다. 이 물고기는 늘상 말미잘에게 먹이를 주지만 위험에 빠지면 즉시 말미잘에 몸을 숨겨 스스로 삶을 이어간다.

작가 황영경은 이번 단편소설집에서 '바다의 아네모네'라 불리는 말미잘(여성)을 통해 여성에 빌붙어 사는 남성들(피쉬) 속내를 꼼꼼하게 파헤치고 있다. 서로 도우며 살갑게 살아야 할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서로 어긋나면서 빚어지는 슬픈 소설... 지금 여성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이 시대 남성들도 혹 '아메모네 피쉬'는 아닐까.

모 두 8편이 들어 있는 이 단편소설집은 21세기 들어 20~30대 언저리에 있는 청춘들이 지닌 불안한 삶을 그리는 '루저(패배)문학'이나 '칙릿(젊은 여성)문학'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어른문학'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동백나무 열매가 하는 말', '중향', '녹천', '아네모네 피쉬', '돛배가 오는 시간', '황색 바람', '물고기 종점', '곰팡이 시인'이 그 단편소설들.

작가 황영경은 '작가의 말'에서 "너무 오래 묵혀온 말들이다. 소중하고 귀한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그들이 떠난 한참 만에 참말들이 마구 쏟아졌다"며 "그런 것들은 왜 그렇게 언제나 늦게 오는지. 어쩌면 그게 진실의 본 얼굴이 아닐까. 아니, 그것마저도 환은 아닐지…"라고 적었다.

나는 꿈속에서도 그 남자 카메라를 거부했다

" 천국의 남자가 내게 빌리러 온 것은 가이드북이 아니라 천국의 복락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하룻밤의 시간이었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허름한 모텔 수준인 내 숙소의 옆방에서는 비음이 섞인 남녀의 교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이국의 밤 꿈속에서도 그 남자의 카메라를 거부했다. 그 남자가 내게 들이대는 카메라의 렌즈가 마치 총부리의 입구처럼 확대되어 나를 겨냥하는 것만 같았다." - 45쪽, '중향' 몇 토막

황영경 작가 단편소설에 나오는 여성들 삶은 모두 고단하고, 낡아 헤지고, 슬프고, 아프다. 오랜 사랑을 끝냈거나, 직장을 잃었거나 하는 그런 여성들('중향', '녹천', '아네모네 피쉬')이거나 그도 아니면 스스로 바람을 피우거나 경제 능력이 없는 남편과 별거나 이혼을 한 상태('돛배가 오는 시간', '황색 바람')다. 그 때문에 더 외롭고 쓸쓸하다.

단편소설 '중향'은 남성들로부터 상처받은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슬픔과 멍에를 아프게 드러낸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중향'은 "강바닥의 모래알만큼 무수한 붓다의 나라를 마흔 두 번 지나친 후에 중향이란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 나라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체 해부를 하는 인체기학 연구소 이름이 '중향'이기도 하다.

'나'는 한 박사 조교로 일하면서 인체 장기들을 들여다보고 적는 일에 빠져 있다. '나'는 그 때문에 "모든 감각의 뿌리까지 더듬어 내려는 탐색의 자세"로 사람을 살핀다. 이 소설을 이끌고 있는 잣대는 냄새 혹은 향기다. "여자들은 누구나 한쪽 겨드랑이 밑에 향주머니를 차고 있거든요…. 그건 옛 여인들이 치마 밑 깊숙한 속곳 솔기에 달아 놓았던 사향주머니처럼 깊이 감춰진 것"(40쪽)처럼.   

내 죽음 앞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 자신의 죽음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초이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영정 속의 그녀가 이것 봐, 난센스 같지 않니? 하고 속삭이며 큭큭 웃는 것 같았다. / 케니는? 나도 인애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글쎄, 케니가 올까? 인애는 역시나 케니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 87쪽, '아네모네 피쉬' 몇 토막

단편소설 '아네모네 피쉬'에 나오는 여성과 남성들은 이름 석 자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 흐릿한 사람들이다. 초이가 지닌 성은 '최'이고, 초이 두 번째 남편 '케니' 이름은 '김성재'였다. 초이가 죽기에 앞서 마지막 연인이었던 남자는 P로 불린다. 제대로 된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초이는 태어남 그 자체가 난센스였다.

초이는 첫 결혼에서 시집식구들로부터 쫓겨났고,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곧 실패로 끝난다. 깊은 바다 속을 떠돌아다니는 "심심한 어족류"처럼 삶을 낭비하는 P는 초이가 죽은 뒤 초이가 남긴 하나뿐인 재산인 아파트를 가로챈다. P 또한 말미잘(여성)한테 빌붙어 사는 아네모네 피쉬 같은 남성이다.

'상처의 계보학과 애도의 글쓰기-세상을 부유하는 그녀(들)를 기록하다'라는 해설을 쓴 김양선은 "엄마의 엄마, 엄마로 이어지는 삶의 고단한 이력을 물려받았을지라도 나 그리고 초이로 대변되는 상처받은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그 여성의 역사 속에서, 그녀들의 역사를 대신 들려주고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평했다.  

어른들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지닌 날선 모서리 깎는 작가

" 여름내 자주 가는 동네 뒷산에서 아기를 밴 고양이와 만났다…. 너무 이른 나이에 시집을 온 어머니는 첫아이인 내 오빠를 배었을 때, 부풀어 오르는 배가 부끄러워서 장에 나갈 때면 대소쿠리로 배를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들은 어머니의 그 말이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는다." - 237쪽, '작가의 말' 몇 토막

작가 황영경 첫 단편소설집 <아네모네 피쉬>는 20~30대 청춘들이 겪는 불안한 삶이나 젊은 여성들을 밑그림으로 즐겨 삼는 소설에서 벗어나 어른들이 겪는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지닌 날선 모서리를 깎는다. 작가 스스로 "여기(이 소설집) 나오는 애도의 문장들은 결국 나를 위한 비가가 아닐까"라고 '작가의 말'에 적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문학평론가 조형래는 "지난한 인생유전 끝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더 이상의 성장을 거부한 성년이 있다"며 "그들의 방향 잃은 정념이 서성거리는 '녹천'이나 '소라섬' 같은 장소의 텅 빈 풍경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아네모네 피쉬의 주인공들이 머무는 그 황폐한 공백도, 그녀와 그녀들이 해찰하고 있는 대상도 모두 소설이라는 형식이 아니라면 포착될 수 없을 아이러니 자체"라고 썼다.

"한마디 말로써 열락에 닿기를 꿈꾼 적이 있었다"며 "말 속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작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가 황영경. 그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신흥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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