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산문)
파지에 시를 쓰다
정세훈 지음|푸른사상 산문선 25|147×217×17 mm|272쪽
16,000원|ISBN 979-11-308-1457-5 03810 | 2019.9.13
■ 도서 소개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이
정세훈 시인의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가 <푸른사상 산문선 25>로 출간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시인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스스로 ‘실패’와 ‘패배’를 말하지만 그의 삶과 문학이 누구보다 치열했음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시인 소개
정세훈 鄭世薰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노동해방문학』, 1990년 『창작과 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이 되었다. 시집 『맑은 하늘을 보면』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등 다수와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등을 간행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대표), 한국작가회의 이사, 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추진위원장, 소년희망센터 운영위원, 위기청소년의좋은친구어게인 이사, 서해평화포럼 평화인문분과위원, 인천민예총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또다시 문학의 꿈을 접다
닭잘뫼 흙담집 / 엄동 바람, 낡은 문풍지 / 제비 무덤 복숭아나무 / 그 주홍빛 핏방울, 진달래 / 꿈을 버리기 위한 의식 / 소꿉동무 희자 / 냉동고와 가마솥에서 숨어 지내다 / 충무로 2가 ‘진미’ 분식식당 /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소년범 미결수 / 미성년 수감 생활 / 싹이 괜찮았던 놈 별스럽구나 / 또다시 문학의 꿈을 접다 / 나 하나만 생각하면 그깟 공부 하나 못할까
제2부 공장 파지에 시를 쓴, 실패한 시인
그녀에게 미안한 40년 / 남근을 붕대로 싸맨 노동 /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그리고 다시는 신학을 않기로 했다 / 공장 파지에 시를 쓴, 실패한 시인 / 이쁜이 / 전문가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 실패한 노동 / 시 한 편을 쓰고 사표를 썼다 / 완전한 실패와 완전한 패배 / 할 수만 있다면 선한 것을 캐어내고 싶다
제3부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가는 노동운동
부평 / 석면 가루 / 긍정적 마인드 / 어머니 이옥금 / 안전망과 허허벌판 / 그와의 인연을 결코 가볍게 할 수 없다 / 수면무호흡증 / 이외수 형님과 국어사전 / 아프지 말라 / 불화와 화해 /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가는 노동운동 /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 기독교문화대상, 그리고 상금
제4부 실패한, 노동의 귀향
천상(天上)의 개밥바라기 지상(地上)의 개밥바라기 / 『문학청춘』의‘ 시식남녀’ / 또 눈물이 나온다 / 에라, 이 밥통들 같으니라구! / 밤하늘, 떠돌이별의 소원 / 수장된 세월호! 수장된 비정규직! / 박환성, 김광일 독립PD / 기득권 왜구 세력과 천민자본주의 / 실패한, 노동의 귀향
■ 시인의 말
17세. 너무 이른 나이에 육체노동자가 되어 노동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노동자를 알게 되었고 노동을 알게 되었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임을, 노동은 자본의 노예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았다. 이러한 노동판이 문학을 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공정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한 그 노동판에서 어린 노동(자)는 너무 일찍 병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자본의 병이 급습했다. 자본에 피를 팔고 뼈를 팔아 피골이 상접해 쓰러져도 한순간쯤은 성공하고 싶었다.
어린 노동(자)이었던 나는 올해 우리 나이로 65세가 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것이 아니라 혹독한 자본에 맞서 견디어왔다.
견디어온 삶이기에 어느 한때 어느 시기를 살펴보아도 제대로 내세울 만한 성공한 삶이 한순간도 없다.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결과가 이를 막고 있다.
실패한 노동! 그 삶들을 호명해 기록한다.
■ 출판사 리뷰
우연히 읽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접하고 처음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홍성 소년’의 노동과 문학의 역정을 담은 산문집이다.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전전한다. 잘 곳이 없어 대형 냉동고나 가마솥에 숨어 지내야 했고, 취객에게 얻어맞다가 징역까지 살았다. 어렵사리 영세 에나멜 동선 제조업체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석면과 독한 화공약품 등에 노출된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다.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한 대가로 얻은 것은 직업병뿐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공장 작업장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파지에 시를 썼다. 세상은 그를 노동자 시인이라 부른다. 시를 통해 그는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다.
정세훈 시인은 자신을 ‘실패한 노동’이라고 규정한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성찰하며 그렇게 규정할 수 있겠지만,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온 그의 삶을 누가 감히 실패라 할 수 있을까.
■ 추천의 글
실패는 아프다. 그것은 자기 생의 내력을 온통 부정하는 행위이자, 부조리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유예하는 인정 형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시를 스스로 ‘실패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훈 시인은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실패한 노동’의 연대기로 규정한다. 그러나 실패의 자인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투쟁 결과에 대한 반성과 책임일 뿐, 노동(자)의 가치를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워온 시인의 분투 과정과 삶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도량이 아니다. 그는 충남 홍성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본의 축적 공간인 서울과 부산을 거쳐 인천의 부평공단에서 평생을 보낸 노동자/시인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정초하기 위해 공장 파지에 꾹꾹 눌러 쓴 시어는 노동자의 계급적 목소리를 발화하는 미적 사보타주인 동시에, 정규화 된 노동조합이나 계급적 거처를 갖지 못한 프레카리아트를 감각하는 심미적 통각이다.
시인은 자본의 생존 논리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언어로 환수되지 못하는 노동/문학의 틈새까지 감지하고 기록함으로써, 노동 혐오를 조장하는 지배 질서의 통치 헤게모니에 파열음을 내며, 모든 인간을 생명의 대지 위에 안착시키고자 투쟁해왔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저 실존의 아카이브는 가난과 상처 그리고 병마로 얼룩진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언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권리 장전’과 다르지 않다. 4차 산업 혁명과 노동의 종언이 강조될수록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노동의 존엄이다. 정세훈의 『파지에 시를 쓰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홍성 소년’의 무력한 패배 과정을 통해 노동/사람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박형준(문학평론가,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주간)
■ 시집 속으로
한 집안의 가운이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고 이미 기울어버린 그 가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일을 다시 시작한 지도 어언 1년이 넘어섰지만 나와 우리 가족들은 여전히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있었는데 내가 틈만 나면 시 습작을 한답시고 원고지를 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대입 검정고시 독학을 하면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현대시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던 것이다. 청계천 고서점을 배회하다가 두 번째 접었던 문학에 대한 미련을 세 번째로 다시 끄집어내게 되었다.
시라는 틀에 나와 같은 소시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싶었다. 공장에서 쓰다 버린 포장지 파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 내가 담아내고 있는 것들이 제대로 한 편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열심히 담고 또 담았다. 한 2년간을 그렇게 담고 나니 웬만한 분량이 되었다.
(99~100쪽)
당시 지식인들이 말했듯이 어찌 보면 투쟁의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은 선진 노동자들이고 그렇지 않은 나와 같은 노동자들은 후진 노동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선진 노동자, 후진 노동자로 나누는 말조차 거부감을 갖고 있다. 굳이 나누어 보아야 한다면 노동자를 상, 중, 하, 이렇게 계층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선 엄연히 노동자 계층도 상, 중, 하로 나뉘어 있다. 상류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층에서 생활이 제일 나은 부류들로 기득권을 많이 가진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대기업체 노동자들로 조직화되어 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자본가 못지않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자신들보다 못한 중류, 하류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투쟁하지만 자신들보다 더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투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마치 하류 노동자들까지도 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철도노조의 활동으로 철도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10퍼센트포인트 올랐다고 하여 어느 공단 후미진 영세 사업장의 하류 노동자의 임금도 덩달아 10퍼센트 올라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도 나보다 더 못한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내 나름대로 시를 붙잡고 씨름을 해보았지만 그 결과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
실패한 시인이 된 것이다.
(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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