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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시선

김광렬 시집, <내일은 무지개>

by 푸른사상 2017. 12. 1.

 

 

김광렬 시집

내일은 무지개

 

128×205×9 mm1448,800979-11-308-1238-0 038102017.11.30

 

 

도서 소개

 

김광렬 시인의 시집 내일은 무지개<푸른사상 시선 83>으로 출간되었다. 깨어 있는 시인으로서의 단호하고 분명한 결기 이면에는 일상을 살아나가는 시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시인의 결기는 허공 속으로 공허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끌어안으며 세상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넘어서려고 한다.

 

시인 소개

 

김광렬

1954년 제주 신산에서 태어났다. 1988창작과 비평봄호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가을의 』 『희미한 등불만 있으면 좋으리』 『풀잎들의 부리』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모래 마을에서가 있다.

 

 

차례

 

시인의 말

 

1

나의 시 / 수련 / 뼈다귀를 문, 시인 / 무르익지 않겠다 / 나는 나다 / 꽃을 꺾다 / 새의 부리 / (), 날아오르다 / / 악기를 든 여인들 / 겨울 편지 / 차를 마시며

 

2

/ 등나무 꽃길에서 / 관객 모독 / 안개 / 피톨들의 물음 / 신화 / 채널 바꾸기 / 촛불 광장에서 / 촛불 편지 / 꿀잠을 위해 / 물속에서의 마지막 독백 / 감자 냄새 맡는 사람

 

3

핵 꽃 / 빵부스러기들 /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다 / 전쟁과 평화 / 사랑과 평화 /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 / 공포제작소 / 꽃 피는 봄날에 / 하늘 감옥에서 / 아프겠다 / 스토커 / 강정의 내세

 

4

제주 바다는 젖어서 돌아온다 / 나의 뿌리 / 혈족(血族) /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 1 /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 2 /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 3 / 따뜻한 숨결 / 돼지감자 밭에서 / 맑은 소리 /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 한나절나기 / 옛집에서

 

5

상강 무렵 / 네팔, 그 어느 강가 / 쩔걱거리는 소리 / 한라산 구상나무를 바라보며 / 적셔주다 / 내일은 무지개 / 임 씨를 위한 노래 / 입동(立冬)/ 초승달 / 가볍게 사라져가는 것은 없다 / 새 발자국 / 불안한 대낮 / 불꽃과 풀꽃 / 맑은 바다 풍경

 

6

사막 한 귀퉁이에 서서 / 잔인한 기억 / 어린 성자(聖者) / 연꽃이 처음 가섭을 만난 날 / 혜초가 서역으로 떠나던 마지막 날 밤의 독백 / 비천(飛天) / 카라반 / 슬픈 디아스포라 / 살아남는다는 것 / 사막 한가운데 풀집 가게를 내고 싶다 / 교하 흙벽에 기대어 / 떠나보내다

 

작품 해설하산하는 예술혼과 비천(飛天)하는 현실 - 홍기돈

 

작품 세계

 

시집 내일은 무지개에는 김광렬의 면모가 선명하게 배어 나온다. 그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령 몽둥이를 들거나/달콤한 말로 달래보아도 시를 붙들고/죽어라고 놓지않겠다는 결의의 표백인 뼈다귀를 문, 시인을 보라. 어떠한 폭압이나 회유에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그의 오기가 드러난다. 무르익어 화분처럼 곱다랗게전시되는 순간을 아주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편은 어떠한가. 무르익는 대신 한 천년 세월/독한 가시를키우면서 그 가시로 나를찌르겠다는 태도에서 스스로에 대한 엄중한 성찰을 끝까지 이어나가겠다는 결기가 엿보인다(무르익지 않겠다). 또한 나는 나다에서는 굳이 자신의 귀를 마이산(馬耳山) 모양으로 만들지 않겠노라는 다짐도 나타난다. “나는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그것이 삶이다/작고 볼품없어도 나는 나다”. 진리(眞理)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일리(一理)에 근거하여 삶을 가꾸어나가겠다는 지향인 것이다. 이렇듯 시를 매개로 한 그의 방향 설정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반면 일상을 살아나가는 시인의 태도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로 집약된다. 그는 왜 부끄러운가. 첫째, 자본주의 체제의 일상이 자연 및 인간을 착취함으로써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집에 묶인 시들을 써내려갈 즈음 대한민국 현실이 비정상적이었던 사정도 여기에 개입한다. 너저분한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할 경우 자의식 강한 자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간혹 예술을 종교 층위에서 파악해나가는 경우를 접할 수 있는데, 김광렬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술을 통한 상승(=초월) 가능성에 침윤해 있기 때문이다. 새의 부리에 등장하는 화가 강요배는 다랑쉬오름 분화구에/솥처럼 풍성한 낮달을 앉혀두었다가하늘로 띄워 올리며, 막고굴 불화 속 고뇌를 풀기 위해 하늘 춤을 추는 저 여인세속세계와 천상계, 그 경계 어디쯤에서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비천(飛天)). 이처럼 김광렬에게 예술은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수단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예술이기도 하다.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보고 써나간 에서 이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중섭으로 표상되는 예술가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뼈다귀들/재빨리 주워 모아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이다. “두 눈 딱, 부릅뜨고/뿔 당차게 앞으로 내밀고/쇠뭉치 같은 콧김 내뿜으며/발가락 으스러져라 흙바닥도 긁으며/금방이라도 그림 속을 뚫고/뛰쳐나올 것 같다그와 같은 시인의 인식이 악기를 든 여인들에서는 귀 닫힌 베토벤도 마음으로 영혼의 소리를 들었듯/마음으로 그림을읽는다거나 죽어서도/저승의 쓰리고 아픈 말씀/화폭에 옮겨 심어야 하느니란 표현으로 변주된다.

 

김광렬의 결기는 가볍게 비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즉 허공 속으로 공허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끌어안으며 세상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넘어서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막이 낙타의 고통인데, 그는 얼마 전에는 사막의 낙타를탔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통증을 당연하게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진술하고 있는 시편이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의 일절이다. 이러한 구절을 써내려갈 때 그는 부끄러움의 반대편까지 바라보고 있다. 어린 성자(聖者)가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탄/다섯 마리의 낙타 고삐를 끌고 가는 아이/모자도 쓰지 않고/얼굴 가리개도 없이/모래에 맨발 푹푹 빠지며 걷는/그 아이가 다름 아닌 성자였다”. 아이/어린 성자/불타로 인하여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어린 성자와 하나가 되어 부끄러움을 넘어서지 못한 데 대하여 자책한다. “나도 낙타에서 내려/허공 연꽃 피워내며 함께 걷고 싶었지만/용기가 없었으므로/아이도 성자도 불타도 될 수 없었다/나는 왜 그때 낙타에서 내리지 못했던가”.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부끄러움이 피어나는 지점을 넘어서는 것이 김광렬의 초월론인 셈이다. 따라서 세계 인식의 방식을 보건대,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가 부끄러움을 매개로 하여 쩔걱거리는 소리와 대칭하여 마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광렬이 미움의 대상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점이다. 부끄러움이 나를 부스럭거리게 한다에는 내가 켠 촛불이 사람들의 찢긴 가슴이라는사실을 되새기며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진술도 나타난다. 적폐가 창궐하는 현실과 대면하여 이를 무기력하게 방치해왔던 데 대한 자책일 터이다. 그런데 채널 바꾸기에서는, “광장의 촛불을 품고 다른 세상이열리자 그가 촛불 들고 맞섰던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얼마나 수렁 같은지 아는 사람은 안다/내 안의 나가/또 다른 나를 힘껏 밀어내버리는 것 같다적폐 청산에 동참하면서도 동시에 불교에서 말하는 공업(共業) 개념에 입각하여 스스로에 대한 성찰까지 수행하려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청산하되 청산의 대상까지 자기 안으로 끌어안는 이러한 관점이, 투쟁과 해방의 직선적 역사 인식보다는, 대대(待對) 관계에 근거하는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역사 인식에 다가서 있다는 사실이다.

홍기돈(문학평론가·가톨릭대 교수)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여기에 실린 시들은 다른 누군가 쓴 것 같다.

시집으로 엮으려고 정리하다 보니

내 안에 이런 마음들이 부스럭거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참 불편했었다.

허나, 내 안의 못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다른 누군가도 넓게는 나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시들은

내가 아파하며 낳은 자식들임이 분명하다.

 

 

추천의 글

 

글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지요?

김광렬의 시를 보면, 그가 천생 시인인 것을,

사람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고교 선생을 그만둔 지금까지

시의 끈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여잡고 있으니,

그때부터 그를 지켜봐온 나에게 그가

온통 시로 보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그와 함께 길을 걷거나 술잔을 나눌 때마다

그의 속내가 종종 궁금해지곤 했는데

이 시집으로 안부의 답장을 보내왔으니,

그의 시를 읽으며 그의 세계를 엿보는 일이

이 겨울 한층 더 즐겁지 않겠습니까.

김석희(번역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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