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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간행도서

우한용 소설, <붉은 열매>

by 푸른사상 2017. 10. 31.

 

 

 

우한용 소설

붉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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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붉은 열매, 생명 순환 과정의 생채기

 

우한용의 소설집 붉은 열매<푸른사상 소설선 15>로 출간되었다. 새빨간 보리수 열매처럼 싱싱하면서도 무르익은, 생명력으로 가득 찬 열네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도서 목차

 

책머리에작가의 나이와 작중인물의 나이

 

추사의 소나무

붉은 열매

칼 한 자루

가을날

()

맥놀이

바람의 언덕

낯선 진두(津頭)에서

청풍리 과수댁네 모과나무

다리 건너는 사람들

수연산방기(壽硯山房記)

유정/무정

마누라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 시고

 

덧붙이는 글내 소설 전개의 간단한 내력

 

 

저자 소개

 

우한용

소설가. 월간문학고사목지대로 등단한 이래, 단편집 불바람, 귀무덤, 양들은 걸어서 하늘로 간다, 멜랑꼴리아, 초연기-파초의 사랑, 호텔 몽골리아, 중편집 도도니의 참나무, 장편소설 생명의 노래 1, 2』 『시칠리아의 도마뱀등을 출간하였고,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으로 있다.

 

 

출판사 리뷰

 

작가는 언제나 젊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시작하는 작가의 말이다. 그것은 자신감일까 아니면 다짐일까. 젊은이의 발랄한 상상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인해 소설은 언제까지나 젊을 수 있다. 작가가 젊었든 늙었든, 등장인물이 젊었든 늙었든 상관없이 소설이 영원히 젊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상상력이 독자를 새롭게 매혹하기 때문이다.

붉은 열매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돌발적인 소설이다. 작가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헛발을 디디고 비틀거린다. ‘추사의 소나무는 화폭을 벗어나 다시 태어나야 하고, 아픈 역사에 고통받았던 붉은 열매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히말라야 용병의 후예는 날카로운 칼 한 자루로 자신의 카르마를 끊어내고, 무력한 독일 유학파 지식인에게 지난 여름이 위대하지 않더라도 가을날은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소설 읽기는 언제나 즐거움이 되고, 나이는 들었어도 젊은 작가의 상상력이 얽어낸 세계를 독자는 자유로운 사유와 함께 여행할 수 있다.

 

 

책머리에 중에서

 

작가는 늙어도 작중인물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이광수가 살아 있다면 125세쯤 된다. 그런데 무정에서 그린 이형식은 아직도 20대 청년으로 연애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내가 쓴 꽃자리의 강인정은 아직 청순하기 그지없는 여선생인데 나는 고희니 칠순이니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는 언젠가 늙어서 죽는다. 작중인물은 나이를 먹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소설이라는 예술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실시간을 살아가는 인생이고 작중인물이 예술에 속한다면, 작가와 작중인물 사이의 거리는 아스라이 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금언에는 비애감이 감돈다. 여기서 예술은 그리스어로 τέχνη[tekhnê]인데 이는 뛰어난 기술(technic, )이나 솜씨의 의미이다. 이 문장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tekhnêars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ars는 기술과 예술을 동시에 뜻하는데 영어의 art를 예술로 번역하는 관행을 따라 예술이 되었다. 원래 삶이 덧없지만 의술은 오래간다는 뜻일 터이다. 작가의 인생은 덧없을지라도 작중인물은 오래 남는다고 하겠지만, 그것도 작중인물 나름이다.

젊은 작가가 늙은이를 작중인물로 해서 소설을 쓸 수 있다. 늙은 작가가 젊은이를 작중인물로 그리는 것이 금지될 까닭이 없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가와 작중인물이 같지 않다는, 작가와 작품의 분리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여러 층위에서 작가의 그림자가 소설 문면에 묻어나게 마련이다. 작가론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을 꽤 공부한 이들도 작가와 작중인물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은 사람들 사랑 이야기를 썼는데, 그거 당신 체험이냐고 묻고 나오면 질겁을 하게 된다. 작가와 작중인물을 같은 존재로 치부하는 이들 가운데, 당신 나이에 걸맞는 이야기를 쓰라고 훈계하려 드는 이들도 있다. 젊은 애들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풍신을 해친다는 투다. 나이를 먹으니까, 늙으니까, 손자를 보니까 그런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들은 대개 은근히 나이를 앞세워 상대방을 눌러놓으려 한다.

나이 꼽는 이들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나이는 계급장도 아니고 훈장도 아니다. 나이 먹었으니 대접해달라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다. 더구나 젊은 사람들 훈계하듯 이야기하는 것은 무람없는 행동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나이 타령을 하는 인사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 어떤 이야기꾼이 지어낸 것일 터이다.

어느 고을에 토끼, 거북이, 두꺼비가 살았다. 이들이 같이 만나 나이 자랑을 했다. 동작 빠른 토끼가 나서서 자기는 천황씨(天皇氏)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났노라고 자랑했다. 중국 신화 시대 삼황오제 가운데 하나가 천황씨이니 참으로 아득한 세월 저쪽에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거북이가 천천히 나섰다. 자신은 중국 신화의 비조인 반고(盤古) 시대에 태어났노라고 뻐겼다. 반고는 천황씨에 비하면 엄청난 선배다. 두 친구가 나이 자랑을 하는 것을 듣고 있던 두꺼비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토끼와 거북이가 두꺼비에게 우는 연유를 물었다. 두꺼비는 한참 울다가 천황씨와 반고 이야기를 들으니, 죽은 아들과 손자가 생각나서 그런다고 했다. 토기와 거북이가 다시 물었다. 아들과 손자가 언제 죽었느냐고. 아들은 반고 때 죽었고, 손자는 천황씨 때 죽었다면서, 토끼나 거북이 너희들은 우리 아들이나 손자보다도 어린 것들 아닌가 하는 과시였다. 내가 너희들 할애비다 하는 도도한 자세였다.

 

이런 우화에서는 먼저 나부대는 놈이 패자가 되기 마련이다. 승자는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자기보다 앞에서 말한 녀석들을 둘러엎을 수 있는 조건을 언제든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 오는 자는 언제든지 앞서간 이들의 실수를, 논리적 허점을 간파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점하게 되어 있다. 힘과 지혜의 대결이라는 맥락에서, 강자를 패배자로 설정함으로써 지혜로운 약자를 옹호하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는 나이를 먹지 말아야 한다. 집안에서 아들 딸이 다시 애를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자연 나이야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작가로서 자신의 정신세계는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두려움 접어두고 이야기하기로 한다. 작가라면 마땅히 풍부한 감수성을 유지하고, 세상 바라보는 안목에 편견이 없도록 정신을 조율해야 한다. 해탈을 한 것처럼 도사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기죽어 물러앉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한마디로 작가는 젊어야 한다. 젊게 살다가 젊게 생을 마감하도록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이렇게 흰소리를 펑펑 해대는 데는 까닭이 있다. 후성유전학(後成遺傳學, epigenetics)을 연구하는 전문가에 따르면 사람은 두 가지 나이를 갖는다고 한다. 유전자 나이테에 새겨지는 자연 시간의 나이가 그 하나이고, 주체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각인되는 후성 나이가 다른 하나라는 설명이다. 유전자 나이는 사람의 힘으로 통제가 안 되지만 후성 나이는 통제가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젊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래서 생겨난다.

나이 든 사람의 경험이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작가 자신이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유지해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감성, 논리, 윤리 차원에서 늙어빠지지 않는 자기 다스림이 작가의 윤리가 아니겠는가 싶다.

 

머리말에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에는 누구를 계몽하거나 훈계하려는 뜻이 전혀 없다. 나 자신의 다짐을 위한 것일 뿐이다. 소설 쓰는 일은 결국 작가가 자기 자신을 자기 시대에 편입해 넣는 일이다. 춘향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조정에 막여작이요 향당에 막여치라.” 조정에서는 벼슬 높이로 사람의 품계가 결정되고, 촌놈들 모인 데서는 나이로 순서를 삼는다, 그런 뜻이다.

작가는 향당에 모이더라도 나이 자랑을 하지 않는다. 젊기 때문이다. 젊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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