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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간행도서

영국 문학의 숲을 거닐다

by 푸른사상 2011. 12. 8.

 



영국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기철 저127×188|46240값 12,000

 

 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고요함과 그리고 쾌락뿐

운하들이며 온 거리거리, 보랏빛과 황금빛

세상은 잠들리라, 저녁놀 훈훈한 빛 속에


                            -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부분


 ‘호화로움, 고요함과 그리고 쾌락뿐’이라고 보들레르가 노래한 여행,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신기와 흥분과 쾌락과 유혹이다. 방탕과 부도덕과 아편장이, 그리고 천재 시인이었던 보들레르에게도 여행은 ‘황금빛 세상’과 ‘훈훈한 보랏빛 저녁놀’을 제공해주는 마음의 자유천지였다. 그가 배를 타고 인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기항했던 모리셔스 섬에서의 3주는 그의 시의 원천이 되어 마침내 그는 19세기 말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기에 이른다. 그는 천성적으로 반항아였고 자유인이었다. 그에게는 여행보다 더 신선한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양식은 없었다. 보들레르가 아닌 누구에겐들 여행이 동경의 대상이 아닌 사람 있겠는가?


저자가 도서의 앞머리에 가져온 시 「대필(代筆)」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느낀 저자의 송연한 마음을 시라는 형식에 담아 2010년 7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다. 대작 여행기인 『열하일기』의 허두에는 다음과 같은 연암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밤에는 약간 취하여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내 몸은 별안간 심양성 안에 있고 궁궐이며 성곽이며 주택 시가들이 번화하고 질펀하여 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장관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하면서 ‘당장으로 집으로 돌아가 자랑을 하리라’ 하고는 이내 훨훨 날아가니 산이고 물이고 모두가 발밑이요, 빠르기는 날아가는 솔개나 다름없이 순식간에 옛집까지 와서 안방 남창 아래에 가 앉았다.


이런 구절로 보아 연암 박지원이 얼마나 열하(燕京)를 동경했으며 얼마나 청나라 문물을 보고 싶어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경(燕京)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으니 지금은 북경을 의미한다. 연암의 이 글을 떠올리며 저자는 또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을 순서 없이 스케치한다. 저자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작가’라는 말이 지나간다.


‘작가’라는 말은 문학에서는 소설가를 지칭하지만 때론 시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가끔 작가라는 말로 부르긴 하지만 이땐 작가보다 화가가 더 편하게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저자가 읽은 가장 오랜 기록으로는 고려 때, 진각국사 혜심의 「진각국사 어록」에는 ‘죽존자전(竹尊者傳)’이라는 설화에서 였다. 진각국사는 고려 고종 때 고승이지만 단순한 고승이 아니라 국사(國師)였다. 국사였으니 왕을 가르쳤던, 임금의 스승이다. 법명은 혜심(慧諶)이고 생몰 연대는 1178년에서 1234년이다. 향년 56살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죽존자라 불리는 고승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존자라 일컬어진다면 응당 번뇌가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눈물을 받습니까?”

(아마도 이때 죽존자가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두 왕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다툼을 쓴 대목을 읽으며 눈물을 보였던 모양이다.)

존자가 대답했다.

“얼굴에 뱉은 침도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하물며 눈물 흔적의 아롱짐이겠는가?”

또 그 사람이 물었다.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다섯 달에 열세 번 미혹합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으니라.”

그 사람이 또 물었다. 

“치욕을 멀리하여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거늘 어찌하여 쇠문을 떼고 우리 스승의 얼굴을 헐려 합니까?”

(아마도 존자가 어떤 불사(佛事, 절을 허물고 짓는 일)에 참가했던 것 같다.) 

“해탈이 문수를 때렸을 때 사람들은 대장부라 일컬었고, 운문이 석가를 때렸을 때 세상에서는 참 ‘작가’라 불렀었다.”


이때 죽존자가 말한 ‘작가’가 오늘날의 작가를 부르는 말과 같은지는 의문이라는 저자는 아마도 아닌 것 같다는 추측을 한다.


저자는는 한국의 한 작가 혹은 시인으로 서양 나라 여행길에 오른다. 바릿대를 짊어진 도사였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저자는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 그러므로 바릿대 대신 두 개의 트렁크를 끌며 먼 서양 나라를 향해 떠났다고 한다. 행색은 초라하지만 의식은 늘 과잉 상태인 작가 혹은 시인, 그래서 그럴까? 저자는 무심코 읽은 어느 책 가운데서 ‘작가’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만난다.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를 빗는 법이 없다. 늘 화를 내거나 늘 우울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술집에서 역시나 헝클어진 머리칼에 안경을 걸친 다른 작가들과 격론을 벌이는 데 일생을 바친다. 작가는 매우 심오한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며, 가장 최근에 출간된 자기 자신의 책을 몹시도 혐오한다.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따분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동시대인들에게서 이해받는 건 천재로 간주될 기회를 송두리째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끊임없이 다듬고 수정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삼천 개 내외인데, 진정한 작가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도 사전에는 아직 십팔만 구천 개의 단어들이 남아 있는 데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은가.


행색은 초라하지만 의식은 늘 과잉 상태인 사람, 머리를 빗는 법이 없고, 언제나 화난 얼굴을 하고, 당대에 이해받지 않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는 사람인 작가, 그렇다. 어찌 당대의 관습에 젖은 사람들이, 당대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당대의 끼니에 급급한 사람들이, 50년 혹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글을 쓰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작가라는 말이 저자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그런 까닭이리라. 


2008년 6월 17일, 첫 발을 내딛는 여행. 2008년 여름은 그래서 나에겐 뜨겁다. 이제 예정된 서른여섯 날의 여행길이 발 앞에 펼쳐진다. 내 어지러운 발 앞에는 안내자 없는 외톨이의 시간이 때로는 저녁놀처럼, 때로는 벌레 울음처럼 흩어지고 감길 것이다. 매일처럼 다가오는 낯선 풍경들이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을 들끓게 할 것이다. 가슴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발길은 풍랑처럼 어지러울 것이다. 이 설레는 조바심, 이 긴장된 호기심, 이 잠재울 수 없는 엑조티시즘, 이 거두어들일 수 없는 여행에의 유혹. 


저자는 깨닫는다. 영국 문학은 거대하다. 그렇다고 반드시 영국 문학이 범접하지 못할 우상으로서의 존재만은 아니다. 영국은 내 문학의 눈록이고 엽맥이다. 무수한 이름의 문인과 예술가들, 그런 꿈의 육체 위에 발을 디뎌보려고 저자는 40년 분필 만지던 손을 풀고 참으로 오랜만에 여행의 설렘에 젖어 든다.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미지의 여정, 그것이 미지이기에 더욱 매혹인 여행길. 그 시간 속에서 저자는 될 수 있대로 많은 작가를 만났다. 걸음마다 피어오르는 낯설지만 웅장한 풍경들과 동양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로서 가진 상상과 감성의 자리를 마련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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