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준 시인의 세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푸른사상 刊
한국 시문학사에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을 담아낸 역사와 함께 살아온 시인의 역작들
“남민전” 사건과 “민청학련”, “2차 인혁당사건”은 모두 기획된 ‘공안사건’이다.
기획된 ‘공안사건’이라는 말은 정권이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어떤 목적이라는 말은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며
박정희정권은 공안사건을 날조하여 반체제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어 극형과 중형으로 처벌 조작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만을 종신 대통령으로 하는 ‘유신헌법’이 제정되었고
곧이어 ‘유신체제’가 발족 되자 여기저기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 박석준 시인
유신정권은 1974년에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해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다.
유신 정권은 군사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나 일반 시민들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 하였다.
그럼에도 국민의 저항이 계속되자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등을 날조 조작하여 발표한 뒤 관련자들을 극형과 중형으로 처벌 하였다.
박석준시인의 큰형 박석률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구속돼 7년을 선고받은 뒤 10개월의 수감 생활을 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 때 김남주시인 등과 다시 함께 구속돼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10년 수감 생활을 했다.
이때에 작은 형 박석삼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큰형 박석률은 1995년 "범민족대회"와 관련해서 또 다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때 조사 과정에서 참혹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속에 살아야 했다.
큰형 박석률은 2017년에 6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박석준시인은 1958년 광주 계림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의 파산, 대학교 1학년 때와 선생님이 되어서 까지 이어지는
"남민전" 사건 "민청학련"사건 "범민족대회"에 관련된 형들의 수감은
한가정의 비애와 맞물려 있다.
박석준시인은 전남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했다.
형들 사건 때문에 1983년에 안기부에서 각서를 쓰고 교사의 길에
들어섰는데, 그는 다시 형들의 길을 따라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위해 해직을 선택 했다.
박석준시인은 1994년 복직하고 인생을 생각하다 쓴 「카페, 가난한 비」로 2008년 등단했다.
빚을 다 갚고 60세에 명예퇴직 자서전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시집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는 자본주의에 침몰하는 인간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
두번째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발표 했고
이번 시집은 그 시집의 연장선에 맞닿아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온갖 고문과 조작속에서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 개인의 비극적인 개인사와 내면의 처절한 고독을 마주한 그의 통찰력
깊은 시어들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말>에서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겠다.
자유를 바라고 피폐하지 않는 삶을 바라는 나를
자본주의의 세계;말과 돈과 힘, 문화가
소외시키고 통제하기도 하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내가
말을 섬세하게 하려는 데 의지를 쓰면
많은 돈과 새 문화가 빠르게 굴러가는 세계, 도시에서
획득한 표상에
가난한 내가 욕망에 덜 시달릴 테니까.
하지만 세상살이 사람살이에서
나는 비애일지라도
현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섬세하고 신중하게 살아가겠다.
〈시집의 시 감상〉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신 살구 같은 유동의 유월 밤비 속을 49살인
나는 걷고 있다. 불빛 흘리는 상점들이 비에 젖는데
돈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어서,
나는 은행 앞 우체통 앞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케이크를 떠올려 가려버린다.
나는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 5만 원을 찾고는,
제과점 속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쇼윈도 속 케이크를 돈 주고 사면서 가려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가난하여
나의 결여로 인해 조직에서 소외되어
전망이 흐릿한데도, 살아가려고 한다.
나는 퇴근하면, 순천 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고
도착하면 시내버스를 탔고 유동에서 내렸다.
그런데 오늘 나는 유동에 오자 유월 밤비를 맞고 걸었다.
사람들이 흘러가고 2층 카페 스토리가 흘러가고
불빛 흘리며 상점들과 돈과 차들이 흘러가는데.
전당포 같은 어두운 방 슬픈 눈이 다시 떠올라서,
방 안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서,
나는 결여가 있어서 괴로워서, 어리석어서,
신 살구 같은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걷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산다고 마음먹어라. 내일 새벽에 수술을 할 거다.”
서 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 침대 뒤 유리창으로 눈길을 주는데,
창틀에 파란색 표지의 작은 성경책이 놓여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까?
나는 왜 지금에야 이 책을 삶과 관련하여 생각하는가?
나는 얼마 살지도 않았으면서 삶이 저지른 죄가 있다.
병실에선 사람의 소리가 삶을 생각게 하는데’.
그 성경책을 집어 넘겨보는데
‘없어져버린 삶!’이라고 생각이 일어난다.
‘너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2, 3개월밖에 살 수 없어!
수술 성공할 확률은 1프로다.’
마른나무 가지들이 공간에 선을 그은 12월 말인데
살아 있다, 움직이는 말소리, 사람 발소리,
사람 소리를 담고 시공간이 흐른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형상을 공간에 그려낸다.
유리창을 본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나의 귀가 병실의 다른 침대들이 있어서 내가 20살임을,
보호자 간호원 환자의 말하는 소리를, 살아 있는 소리들을
그리고 내 어머니의 소리들을 뚜렷하게 감지한다.
어머니는 내가 50살인 12월 말에 입원했는데
다음 날부터 15개월 넘도록 의식이 없었다.
사망하기 하루 전에야 의식이 돌아와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어라. ”
말소리를 너무 약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전했다.
“산다고 마음먹으세요. 내일 낮에 수술을 할 겁니다.”
순환기내과 장 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유리창이 출판하지도 않은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공간에 그려낸다.
‘심실중격에 구멍이 다시 생겨서 피가 새고
심장병과 동맥경화가 깊어요,
수술 성공할 확률은 1프롭니다,
밥 거르지 말고,’
말소리가 그 사람의 형상을 병실에 그려낸다.
말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형상을 시간에 그려낸다.
63살 2020년 2월로 온 나는 삶이 저지른 죄가 있지만,
사람의 소리, 시이면 좋겠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시와 의식
시를 쓰고 싶어요. 충일해야죠.
내가 시를 썼는데, 눈뜬 어머니가 의식이 없네요.
시는 감정인데.
시는 감정으로 써야 하니까 만들지 말라.
문자가 이미 나를 가두었는데
그런 시가 나올까?
근데 색깔이 세 개가 있네!
색깔이 하나만 있는 세상이 있을까?
목소리가, 음색이 하나만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 숨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시를 쓰고 싶어요? 한 색깔의 목소리만 가지고?
눈뜬 어머니 의식이 없어도? 세상에 숨지도 못하면서?
목련꽃
사람들이 찾아오긴 해도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어쩌다가 간혹 한두 사람이 말을 남기고 갔을뿐.
내가 무서워서일까?
내가 힘없는 잎을 달고 있어서 그럴까!
사람들은 사람 생각, 일 생각을 주로 하면서
산책에 잠긴다.
그러다가 피곤해져 고개를 돌렸을 때
봄 나무들 속에
홀로 떨어져 하얗게 꽃을 피운 나무의 꽃을
아름답다고 한다. 잠시 후엔 애절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도
광주에 오늘도 고층 아파트가 움직이고 있다.
누나가 사는 13평 영세민 아파트 창 안 베란다에선
꽃들은 봄을 젊다고 소리 없이 말하지만
빨랫줄의 허름한 옷들은 창밖 움직이는 돈을 동경한다.
시인은 사람의 가난을 값있어 미적으로 표현하지만
가난한 삶은 미의 밖에서 존재하는 비애이므로
가난한 삶을 감상한 시인의 시는 패러독스다, 불안이다.
아파트가 제 몸값으로 사람을 골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서울, 서울 쪽에 젊은 최신의 시공간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려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 서울 쪽으로 갔으나,
늙은 누나는 날마다 젊음보다는 돈을 생각한다고 한다.
가난한 나는 오후에 부모님 성묘하고
가난한 누나를 비좁은 아파트로 찾아갔지만
가난한 누나의 삶의 애환은 들어도 알고 싶지는 않다.
슬픔
슬픔은 의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수용에서 일어난다.
슬픔은 나에게서, 나 아닌 것에서 일어나
나를, 나 아닌 것을 어둡게 하지만
슬픔은 나에게 있을 뿐이며, 상황에 있을 뿐이다.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을 의식했을 때
슬픔은 상황에 내재한, 나에게 내재한 사정이 내 감정을
엮을 때,
나의 시력과 경험과 처지와 인지를 순간적으로 붙잡아 내
게 일어난다.
슬픔은 눈물, 고독, 좌절 따위를 수반하고, 슬픈 일을 내
의식에 저장한다.
일이 벌어진 후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픈‘을 생각할
때, 슬픔은 존재한다
노동의 시간을 날개 아래에 감추고
주 52시간 노동을 말하고
취업에 어려워하고, 알바를 하고, 비정규직 파업을 하고
해고 노동자 농성 1인 시위를 공중에서 하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추락해서 죽고
먹고살기 어려운 생활고로 가족이 같이 죽고,
휴가를 해외로 가지만, 일본 여행은 감소했다 한다.
정부는 9억 이하를 서민용 주택이라 하고
나는 1억도 없어,
6억인 아파트를 5억 5천에 샀다는 선전에
슬픔을 느끼는데,
TV 방송에서는
사람들이 검찰 개혁하라, 공수처를 설치하라 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공수처 없애라 한다.
그런데 슬픔이 일어난 사람, 슬픈 일을 본 사람은
슬픔이 쓸쓸함으로 기억되나, 슬픔의 바닥은 볼 수 없다.
슬퍼질 때, 슬퍼할 때, 슬픔을 생각할 때, 슬픔이 존재하
니까.
오후에 내리는 봄비
술 한잔 하고 싶네요.
비 오니까 선생님 생각나요.
우산 쓰고 집 앞에 계시세요.
제가 다섯 시까지 모시러 갈게요.
제자 현주, 광휘의 말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렀다.
64살 3월이 다 가는 날
가늘게 떨어지는 비가 뛀궈버린 벚꽃 꽃잎들,
빗물이 흘러가는 사거리,
흐르는 빗물에 떠는, 신호등의 빨간색 혹은
초록색 두 줄기
토요일 오후 5시의 술집 쪽
푸른마을의 불 켜진 아파트 앞
에 서 있는 나.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일베 같은 소리를 하더란께, 아들 녀석이!
어디서 배웠을까?
유튜브에서 배웠을 거야.
다른 사실들 곁에 살짝 올려놓거든.
현주와 광휘의 21살 아들을 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도 곧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 셋이
21살 재원과 광휘, 녹두대 현주가 뇌리에서 이어졌다.
(중략)
산책을 하다 비가 내려
밝고 가볍고 느긋한.
그런 시간은 잠시였어도
산책하다 비를 본 사람이 생각하겠지.
산책을, 비를, 우산을, 갈데를, .....
이게 콩이란다.
콩이예요?
콩이란다!
어린이집 아이 다섯이 쪼그려 앉아 있다
일어서서 좋아라 하며
여선생님을 따라간다, 유모차 쪽으로 산책을
한다.
그 시누이 말이야.
여자 셋이 걸음을 빨리하며 팔 흔들며 대화를
나눈다.
행인들이 앞지른다,
애들을, 아기를.
시간을 쪼개 삶을 만들어가려는 걸까?
산책을 하다 비가 내려,
선생님과 아이들이 뛰어온다,
행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돌아온다,
엄마가 유모차 돌려 걸어온다.
비를 맞고 사람들이 걸어가고
산책로가 빨간 장미꽃들이 젖어간다.
언덕의 말
시간의 길을 따라 계절아 열두 번 가고
나는 그 골목길을 걸어가네
골목길을 걷다가
내 그림자 벽에 져서
낮이 사라진 벽을 보았네
떠났어, 거울 속 얼굴들아 조선대 언덕의 말들아.
사람들한테 들어선 낯익은 말들인데,
마음이 궁글어
무디어진 사람의 얼굴이 모습이
나를 그곳에서 망설이게 하네
그 사람의 말 없음에, 사랑을 잃고
내 젊음이 사라졌네
국민뉴스, "박석준 시인의 세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푸른사상 刊", 조현옥 기자, 202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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