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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간행도서

박석준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by 푸른사상 2023. 3. 15.

분류--문학()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박석준 지음|푸른사상 시선 173|128×205×9mm|152쪽|12,000원

ISBN 979-11-308-2019-4 03810 | 2023.3.20

 

 

■ 시집 소개

 

역사에 마주한 강인한 삶의 의지와 불굴의 응전

 

박석준 시인의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가 <푸른사상 시선 173>으로 출간되었다. 한국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갖은 고통을 겪었던 한 개인의 가족사를 비롯해 음울한 도시의 풍경과 소시민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시대적 수난 속에서 온몸에 새긴 삶의 감각과 절망의 노래에서 시인의 강인한 삶의 의지와 응전 의식을 느낄 수 있다.

 

 

■ 시인 소개

 

박석준

1958년 광주 계림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의 파산, 대학교 1학년 때 남민전 사건에 관련된 형들의 수감, 너무 가볍고 허약한 몸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형들 사건 때문에 1983년에 안기부에게 각서를 쓰고 교사가 되었는데,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위해 해직을 선택했다. 1994년 복직하고 인생을 생각하다 쓴 「카페, 가난한 비」로 2008년 등단했다. 빚을 다 갚고 60세에 명예퇴직했다. 자서전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시집 『카페, 가난한 비』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발간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 목차

 

제1부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기억의 지속

콧수염 난 꼬마 청년 ―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 1 / 우산과 양복 ―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 2 / 옷과 시간과 시력 ―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 3 / 기억의 지속 / 十자가 목걸이를 찬 / 언덕의 말 / 객지 / 발을 다쳐서 ―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 4 /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 광주 유동 박제방(光州 柳洞 朴弟方) / 시와 의식

 

제2부 청산청산별곡

청산청산별곡(淸算靑山別曲) ― 감시(監視) / 네 사람과 없어져버린 나 / 하동포구 ― 일어나자 곧 시(「하동포구」)를 읽고, 사(思) 문병란 / 축제 ― 대인예술야시장에서 / 밤과 나와 담배가 멈춘 시간, 어느 날 / 주의해야 할 인물의 명단 / 떠나야 할 사람은 빨리 떠나야 / 기대한 까닭에 앞에 있는 사람에게 / 택시 안에서 / 네 사람과 없어져버린 나 ―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 5 / 동행(同行) / 핸드폰과 나와 쐐기가 걸어간 오솔길

 

제3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산책을 하다 비가 내려 / 밤과 더 깊어진 밤 / 조제(調劑) / 세상은 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어서 / 슬픔 / 변신 ― 통증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 거리, 카페, 가난한 비에 움직이는 사람들 / 길가 커피와 담배와 겨울 아침 / 사(思) 시간을 남긴 아름다운 청년 / 아포리아(Aporia) / 인생을 패러디한 예술 ― 원본 패러디 인생 / 소라 껍질과, 두 사람과 나 / 목련꽃

 

제4부 무비즘

오후에 내리는 봄비 / 얼굴 책 / 깁스 상률 / 아침 10시 무렵 못생긴 개하고 산책하는 여자 /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도 / 간월도(看月島) / 인생과, 비 내리는 시간에 만든 알리바이 / 무비즘(movieism) / 라 코뮌(La Commune) ― 역사외 개인의 의식 1 /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 2022년에 온 월상석영도 / 서시 ― 역사외 개인의 의식 2 /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 ― 역사외 개인의 의식 3 / 그리운 시간

 

발문 : 자서(自敍)한 회고의 비망록 - 조성국

 

 

■ '시인의 말' 중에서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겠다.

자유를 바라고 피폐하지 않는 삶을 바라는 나를

자본주의의 세계;말과 돈과 힘, 문화가

소외시키고 통제하기도 하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내가

말을 섬세하게 하려는 데 의지를 쓰면

많은 돈과 새 문화가 빠르게 굴러가는 세계, 도시에서

획득한 표상에

가난한 내가 욕망에 덜 시달릴 테니까.

 

하지만 세상살이 사람살이에서

나는 비애일지라도

현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섬세하고 신중하게 살아가겠다.

 

 

■ 추천의 글

 

애잔하다 싶으면 그의 격정에 놀라고, 가냘프다 곰곰이 마주하면 그의 강인한 삶의 의지와 불굴의 응전에 경외하게 된다. 가족사를 덧붙인들 무엇하랴. 아슬아슬한 게 천생 시인이다 싶지만 깊은 데서 배어 나오는 설움의 힘에 망연하게 포획될 수밖에 없는 저 유장함.

그런 ‘이야기’와 ‘사건’들과 ‘사람’들로 가득한 박석준 형의 이 시집의 시들. 서럽고도 질펀하다. 촉촉한 ‘시간’의 세계로 교묘하게 끌어들이는 늙은 청년의 고스란한 삶의 감각이 가슴을 에인다.

그러니 붉어진 눈으로 그리운 벗들 모아 “오후에 내리는 봄비”쯤에 술집으로 흘러나오도록 불러나 볼까. “젊음은 그저 젊은 시간에 있”더라도 “쇼윈도 거리” 밖 “인생무상이 없”는 시인 박석준 형을.

― 조진태(시인,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 작품 세계

  

형은 늘 그랬다. 형의 생애사가 민낯으로 살아서, 진심으로 살아서,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의 숨소리가 살아서 ‘지금-여기’에 이르렀다. 온몸으로 새겨온 먼 길의 발자국, 남몰래 속으로만 삭이고 녹여낸 그날들의 “사람의 소리”가 “시이면 좋겠다”는 형의 바람대로 “누군가에게”(「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살아난다. 기억의 편린을 그러모은 시적 재구성으로 살아나서 천만 가슴을 울리고도 남았다. 담담하게 우리들을 “시공간”으로 데려가서는 세월의 체로 걸러내듯 빚어낸 신념들을 보여준다. (중략)

지금에 와서야 비록 “이순 넘고 병든 것은 하늘의 뜻이어서/결혼 안 하고 늙는 것 따라 시름 오는 걸 슬퍼하”고 “친구들 옛 가족들 그리워함 그침이 없고/못 쓰는 시에 오늘 새벽도 시달렸”(「그리운 시간」)지만 한 길 한뜻으로 살아온,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지 못한 그곳에 형의 신념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과 신념이 곧 자신이고 가족이고 우리의 공동체임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내밀한 진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정당한 시적 순간으로 형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역사외 개인의 의식”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삶에 대한, 삶에 의한, 삶에 가치를 부여한 자기 성찰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여 이미 “박석준(朴錫駿)”화된 이런 시(詩)의 진지한 노력에 많은 귀들이 경청하고, 더 많은 눈길의 신뢰들이 와서 머물기를 진정 바라며. “뒷말이 딴 동네에 있는 ‘대인동식당’”이나 “옛 동아극장 골목, 연이네 집”(「조제(調劑)」) 같은 목로에서, 짙푸른 단골집 소주병에다 숟가락 꽂아 들고 지긋하니 눈 감아 “봄비에 젖는” 형의 노래 한 곡조를 따라 불렀으면 좋겠다.

― 조성국(시인) 발문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신 살구 같은 유동의 유월 밤비 속을 49살인

나는 걷고 있다. 불빛 흘리는 상점들이 비에 젖는데

 

돈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어서,

나는 은행 앞 우체통 앞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케이크를 떠올려 가려버린다.

 

나는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 5만 원을 찾고는,

제과점 속에서

떠오른 전당포 같은 어두운 곳 슬픈 눈의 형상을,

쇼윈도 속 케이크를 돈 주고 사면서 가려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가난하여

나의 결여로 인해 조직에서 소외되어

전망이 흐릿한데도, 살아가려고 한다.

나는 퇴근하면, 순천 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고

도착하면 시내버스를 탔고 유동에서 내렸다.

 

그런데 오늘 나는 유동에 오자 유월 밤비를 맞고 걸었다.

사람들이 흘러가고 2층 카페 스토리가 흘러가고

불빛 흘리며 상점들과 돈과 차들이 흘러가는데.

전당포 같은 어두운 방 슬픈 눈이 다시 떠올라서,

방 안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아서,

나는 결여가 있어서 괴로워서, 어리석어서,

신 살구 같은 유동 거리의 유월 밤비를 맞고 걷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산다고 마음먹어라. 내일 새벽에 수술을 할 거다.”

서 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 침대 뒤 유리창으로 눈길을 주는데,

창틀에 파란색 표지의 작은 성경책이 놓여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까?

나는 왜 지금에야 이 책을 삶과 관련하여 생각하는가?

나는 얼마 살지도 않았으면서 삶이 저지른 죄가 있다.

병실에선 사람의 소리가 삶을 생각게 하는데’.

그 성경책을 집어 넘겨보는데

‘없어져버린 삶!’이라고 생각이 일어난다.

‘너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2, 3개월밖에 살 수 없어!

수술 성공할 확률은 1프로다.’

마른나무 가지들이 공간에 선을 그은 12월 말인데

살아 있다, 움직이는 말소리, 사람 발소리,

사람 소리를 담고 시공간이 흐른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형상을 공간에 그려낸다.

유리창을 본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나의 귀가 병실의 다른 침대들이 있어서 내가 20살임을,

보호자 간호원 환자의 말하는 소리를, 살아 있는 소리들을

그리고 내 어머니의 소리들을 뚜렷하게 감지한다.

어머니는 내가 50살인 12월 말에 입원했는데

다음 날부터 15개월 넘도록 의식이 없었다.

사망하기 하루 전에야 의식이 돌아와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어라. ”

말소리를 너무 약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전했다.

(후략)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도

 

광주에 오늘도 고층 아파트가 움직이고 있다.

누나가 사는 13평 영세민 아파트 창 안 베란다에선

꽃들은 봄을 젊다고 소리 없이 말하지만

빨랫줄의 허름한 옷들은 창밖 움직이는 돈을 동경한다.

 

시인은 사람의 가난을 값있어 미적으로 표현하지만

가난한 삶은 미의 밖에서 존재하는 비애이므로

가난한 삶을 감상한 시인의 시는 패러독스다, 불안이다.

 

아파트가 제 몸값으로 사람을 골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서울, 서울 쪽에 젊은 최신의 시공간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려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 서울 쪽으로 갔으나,

늙은 누나는 날마다 젊음보다는 돈을 생각한다고 한다.

 

가난한 나는 오후에 부모님 성묘하고

가난한 누나를 비좁은 아파트로 찾아갔지만

가난한 누나의 삶의 애환은 들어도 알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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