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고요한 세계
유국환 지음|푸른사상 시선 156|128×205×9mm|154쪽|10,000원
ISBN 979-11-308-1908-2 03810 | 2022.4.30
■ 도서 소개
역사의 대지 위에 펼쳐진 견고한 시편들
유국환 시인의 첫 시집 『고요한 세계』가 <푸른사상 시선 156>으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나아가 동학혁명, 4․3항쟁, 5·18민주항쟁 등 한국 근대사를 따라가는 시인의 역사의식과 연대 의지는 고통받아온 민중들의 아픔을 견고하게 감싸 안는다.
■ 시인 소개
유국환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2020년 5・18문학상 신인상과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오랫동안 꿈꾸었던 시인이 되었다. 현재는 창작에 힘을 쏟고 있으며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 목차
제1부
도보 여행 / 내 마음에 돌섬 하나 있어 / 동심원 / 혼밥 / 나른한 오후 / 설날 새벽에 / 견고한 기억 / 가리비 껍데기 / 아포 고모 / 깜장 고무신 / 아버지의 녹 / 호국원 가는 길 / 텃밭 가는 길 / 아내에게 / 별리(別離)
제2부
유월에 터지는 방죽 / 북한강에서 / 꿈꾸는 을숙도 / 은모래의 전언(傳言) / 갈맷길을 걸으며 / 느티나무 / 겨울 원미산 / 그믐달 / 젊은 귀향 농부의 독백 / 오랜 거짓말 / 텃밭에서 1 / 텃밭에서 2 / 시시포스가 걷는 길 / 늦된 오이의 소지(燒紙) / 민달팽이
제3부
뭍으로 간 망상어 / 바람이 머물렀다 간 자리 / 여름의 끝 / CCTV의 증언 / 박카스 병 / 소주 한 잔 / 시간강사 Y씨의 하루 / 유성 생식하는 0과 1 / 복사골 감자탕 / 역곡 바게트 / 그림으로 남은 엄니 / 온금동 꼭대기 빈집 / 옛날 옛적 몰운대에는 / 깊어가는 섬진강 / 낙지 초무침 아짐씨
제4부
부활하는 집강소 / 어긔야 어강됴리 / 당신과 내가 기다리는 날 / 용머리 해안에 부는 바람 / 하귀리 가는 길 / 영모원(英慕園)에 부쳐 / 세화 바다에 와서는 / 항파두리성에 핀 풀꽃 / 고요한 세계 / 오월의 바람 / 영실(營實) / 바다로 가는 길 / 진달래 동산 / 모래밭에 묻은 이름 / 촘항 속의 개구리
작품 해설 : 소란하길 바라는 『고요한 세계』 - 이명찬
■ '시인의 말' 중에서
올봄에 베란다 ‘백량금(百兩金)’에 싹이 돋더니 삭정이에 잎이 달리기 시작했다. 말라 죽은 줄 알았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뽑아버리려다 살아나라고 주문을 외며 몇 년째 물을 준 정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젊은 날 시는 영양실조였다. 늘 음지에서 골방에서 넋두리를 먹고 자랐다. 그래도 시는 굶어 죽지 않은 젊은 날이 감사했다. 동취(銅臭)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 시는 영양실조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관 속에 누웠다. 몇십 년 동안 잠에 빠져 있었다. 시로써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던 시대에 온몸으로 밀고 나가지 못했던 사람의 넋두리를 책으로 내려니 쓸모없는 파지(破紙) 한 묶음을 더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명산(名山)에 비장하지 못하더라도 간장 항아리 뚜껑으로는 쓰이지 않을 것이라 격권(激勸)한 맹문재 교수의 말에 용기를 내었다. 이데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시를 부둥켜안고 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고민스러우나, 이데아에 대한 믿음이 있던 자리에 시가 뿌리내리도록 일조하는 일이 부질없는 짓은 아니리라 자위하며.
■ 작품 세계
그의 젊은 날의 시 쓰기가 사적(私的)이거나 가족적인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대동 세상을 꿈꾸는 민중주의적 열망을 가꾸는 무기였음을 알겠다. 그랬던 그가 세상 사람들은 그만두고 “사랑하는 이들의 어깨에 얹힌 짐”(「견고한 기억」)부터 걷어내겠다는 핑계를 대고 끝내 등 돌리고 말았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당시 그의 시 쓰기라는 살로 겨눈 과녁이 보통은 훨씬 넘어서는 수준의 공포에 닿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예의 저 「이인모」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졌던 ‘푸른 사상’의 밑바닥에 도서관 6층에서 투신했던 김태훈 열사의 죽음이 가로놓여 있었음을 무심한 듯 툭 고백한다. (중략)
그의 탐색은 이제 두 가지 경로를 밟는다. 그중 하나가 시간의 종축을 따라 자기 시가 가닿아야 할 역사적 근원을 확인하려는 노력이다. 두 번째는 시간 여행에서 얻은 인식을 바탕으로 내 가족을 넘어 이웃의 목숨 가진 모든 것들에로 관심을 확산하는 횡단 탐색에 해당한다.
그의 종단 여행이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 아내와 같은 가족들과의 관계 탐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탐색을 통해 그는, 자기를 시대 앞에 비겁한 가장(家長) 되는 길로 일찍 내몰아 자주 대들었던 아버지의 무능이 사실은 아버지 시대의 것이었음을, 가족의 신산과 고통이 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낸 모든 가족들의 공동 문젯거리였음을 확인하려 한다. 시 「아버지의 녹」 「호국원 가는 길」에서 아버지와 화해를 한 그가, 「깜장 고무신」을 통해 우리 시대 모든 아버지의 ‘깜장 고무신’을 부끄러움 없이 납득하게 되는 과정이 정겹다.
아버지에게서 장인, 그리고 모든 아버지들에게로 연민의 감정을 점점 넓혀간 끝에 「아포 고모」 「텃밭 가는 길」의 어머니, 「아내에게」의 아내 등을 보듬어, 가족이되 가족을 넘는 단위까지를 불러내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리고는 「나른한 오후」나 「여름의 끝」을 통해, 산업화가 훼손해버린, 도회로 쫓겨 오기 전의 건강한 삶의 양태를 잠깐 복원하기도 하고 「설날 새벽에」를 통해 민족의 가난한 하루를 오버랩시키기도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보여행」)를 통해 유전되어 내려온 가난의 역사를 추적하던 끝에 그는 「고요한 세계」로 만나는 5·18, 「촘항 속의 개구리」 「하귀리 가는 길」 「영모원에 부쳐」와 같은 4·3의 흔적을 붙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활하는 집강소」 「어긔야 어강됴리」에 이르러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좌절이야말로 이 땅 민중, 민족 모순의 기원이자 뿌리라는 점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특히 「촘항 속의 개구리」나 「어긔야 어강됴리」는 4·3의 참상이나 동학운동의 좌절이라는 주제를 그 동네 말로 새롭게 구성하여 보여주는 수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 이명찬(문학평론가・덕성여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유국환의 시는 ‘대지(흙)의 역사, 역사의 대지’ 위에서 태동하는 노래들이 많다. 가령 텃밭에서 생명하거나 열매를 맺는 것들에서 출발하는 그의 시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만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소박한 풍경 속에서도 삶의 깊이를 드러내 보인다. “쑥부쟁이 혼자 지키기에 너무 무거운” 목포항 ‘은금동 꼭대기 집’이나 “강과 강은 바다에서 합일하기 위해 지독한 세월을 견뎌”온 낙동강 하구가 보이는 아미산 ‘갈맷길을 걸으며’ 그의 시는 다져져온 것 같다는 생각이다. 특히 시집 후반부를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그의 소박하고 단순한 미학, 시편들은 1894년 동학혁명, 몽골군에 대적한 제주 항파두리성과 4·3의 이야기를 토속성 짙은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오월 광주에서 숨을 거둔 귀머거리 장애인 김경철의 넋을 불러와 다시 그를 살려내는 시 「고요한 세계」 또한 그의 시가 결코 고요한 세계만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 김준태(시인)
진즉 시인이 되었어야 했으나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접어든 유국환의 첫 시집 『고요한 세계』는 회한과 관대, 질서화되지 않은 욕망과 시대에의 동참 의지 등 공존하기 힘든 다양한 정동들의 집결지이다. 그런 만큼 『고요한 세계』에는 역사의 흔적들과 새로운 시대적 징후들에 대한 응시는 물론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온갖 사물들에 대한 교감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 중심의 근대가 세상 바깥으로 추방했던 비인간적인 존재들에 대한 유국환 시의 진지한 관심과 연대 의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요즘 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므로 앞으로의 시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 시의 거울 앞에 선 유국환의 시인으로의 귀환을 환영한다.
―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
■ 시집 속으로
갈맷길을 걸으며
아미산에 올라 낙동강 하구를 바라본다.
칠백 리 먼 길을 걸어온 신랑을 부드럽게 안는 신부의 일렁이는 치맛자락을 보며,
화동(花童)인 양 햇살이 꽃가루를 뿌린다.
하나가 되어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떠나는 부부를 보며
우리는 먼발치서 하객이 되어 서로의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 갈림길에서 헤어졌다가 돌사다락길에서 또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되풀이하는 동안
강과 강은 바다에서 합일하기 위해 지독한 세월을 견뎌왔고,
저 넓은 여백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채워 나간다.
땀 흘리며 멀어져 가는 그대여,
힘든 아미산길 끝나 몰운대쯤에서 다시 만나
산길 내내 품었던 철쭉 한 송이 내밀면
가슴 열고 받아주오.
해가 지기 전에.
하귀리 가는 길
처서를 지나고도 한참을 떼쓰던 여름 해가 숨비기꽃 흔들림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해가 아무리 따가워도 파도가 아무리 짠 내를 몰고 와도
밭담 틈새 무리지은 꽃들이 나의 저항은 꽃을 피우고 씨앗을 품는 것이라며 잔바람에 산들거립니다.
숨비기꽃 속에 한 움큼 씨가 영그는 동안에 숨비소리도 영등할망이 뿌린 씨앗을 품습니다.
천만, 일억, 십억으로도 텅 빈 마음인 사람들은
수백으로 저들의 세상을 이룬 숨비기꽃들을 보며,
시들어가는 꽃망울 속에 여물고 있는 씨앗들을 생각하며,
꺾이며 흩날렸던 세월을 기억하며,
하귀리에 올 때는 숨비기꽃 같은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거스린물로 가는 걸음 끝에 긴 그림자가 걸립니다.
수평선 너머로 쫓겨 가는 해가 세상을 거스르지 못하는 이의 얼굴을 붉게 붓질하였습니다.
고요한 세계
― 김경철을 기리며
들을 수 없어도 나는 보았지요
꺼칠한 손으로 애교머리를 쓸어내리는 여동생의 꿈을
말할 수 없어도 나에게도 꿈이 있었지요
기와를 굽더라도 어무이 배곯지 않게 하겠다고
갸가 어릴 때 경기가 왔는디
나가 뭘 모릉께 마이싱을 많이 맞아부렀제
그 이후로 귀가 먹어버렸어
사람들이 유행가에 어깨를 들썩이는 날이었지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안고서 흘러만 갑니다
너 데모했지, 연락병이지?
어디서 벙어리 흉내 내?
손사래질 위로 햇살보다 몽둥이가 먼저 쏟아졌습니다
까마득한 곳에서 어무이 말소리가 들렸지요
내일하고 모레면 부처님 오신 날인디
갸가 기와를 굽다가 가운데 손가락이 짤려부렸어
다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 요래조래 찾아봉께
가운데 손가락 없는 애가 눈에 딱 들어오던걸
올해로 마흔 번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지만
울 어머니가 아들을 쓰다듬을 때마다
시커먼 땅속에서는
파란 잔디와 뜨거운 햇살이 살아난다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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