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자연과 시적 상상…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미래의 비전
저자에게 듣는다_ 『한국 현대시와 불교 생태학: 불교적 시학, 불교 생태시학, 선적 미학』 (김옥성 지음, 푸른사상, 416쪽, 2022. 01)
이 책은 전통과 현대, 종교와 과학, 미학과 윤리학, 부분과 전체, 개인과 공동체, 저항과 협력, 엘리트 미학과 민중 미학 등의 다양한 논점에서 불교적 시학, 불교 생태 시학, 선적 미학 등을 조명한다. 2005년부터 15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집필된 글들을 수정·보완하여 묶고 서론과 결론을 덧댄 결과물이다. 사실 핵심 원고는 이미 10여 년 전에 완성되어 있었지만 출간 또한 생태 위기를 가속화하는 일인 것만 같아 미루고 있었다. 장고 끝에 출간을 결심한 계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결정적으로는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이 책이 우리의 의식을 전환하는 데에 아주 작은 힘이라도 더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어쩌면 인류의 종말이 머지않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안겨주었다. 우리의 인간중심주의에 일침을 가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태생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공존을 추구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시학이나 불교 생태 시학은 팬데믹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시학
내가 불교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학부 시절이다. 종교학을 전공하던 나는 무엇보다도 불교의 주체적이고 자력적인 면모에 매료되었다. 20대 초반의 방황하는 문학청년에게 불교는 자기 구원의 주체적인 철학으로 다가왔다. 반지하 자취방 벽에 반야심경을 붙여놓고 틈나는 대로 읽고 외우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한 인연으로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한국 현대시의 불교적 시학 연구」(2005)로 제출하였다. 이는 한용운, 조지훈, 서정주의 시에 나타난 불교적 상상력을 연구한 논문이다. 나는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적 상상력’을 ‘불교적 시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불교 시학(Buddhist Poetics)’이 아니라 ‘불교적 시학(Buddhistic Poetics)’이라 명명한 이유는 불교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불교로 환원되지 않는 ‘창조적인 상상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한국 현대시와 불교 생태학』에서도 ‘불교적 시학’은 우산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불교 생태 시학’, ‘선적 미학’ 등을 모두 포괄하는 불교에 관련된 창조적 상상력 전반을 의미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주로 ‘무아론’, ‘연기론’, ‘윤회론’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적 시학으로서 시적 상상력을 살펴보았다면, 본서는 그 연장선에서 연기론적 상상력, 윤회론적 상상력, 대칭적 상상력, 상호의존성, 평등의식, 영원성 등 다양한 시적 사유와 상상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이러한 개념들은 서로 맞물려 있어서 엄밀하게 나뉘지는 않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이다.
연구 대상으로는 한용운, 조지훈, 서정주, 이광수, 김달진 등을 주요 시인으로 다루고, 보조적인 시인으로 오세영, 이성선, 박재삼, 조오현 등의 시를 다룬다. 주로 유가 계열 시인으로 조명된 조지훈과 불가 계열 시인론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김달진을 주요 연구 대상에 포함시킨 것도 이 책의 성과 중 하나이다.
불교 생태 시학
박사 졸업 이듬해인 2006년 나는 ‘한국 현대시의 불교 생태학적 상상력 연구’라는 주제로 연구재단 박사후 연구 지원사업을 수주하여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의 자격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30대 중반이던 이 시기 나는 한용운, 조지훈, 서정주, 이광수 등의 시를 중심으로 불교 생태학적 상상력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제3부에 수록된 논문들이 그 성과물로서 본서의 핵심이다.
1990년대에 들어 한국 인문학계에는 생태문학(녹색문학)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주로 생태 위기 이후의 현대시에 나타난 생태학적 사유와 상상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내가 ‘한국 현대시와 불교 생태학’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2000년대 중반 현대시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평적 차원에서 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시적 상상력을 조명하고 있었다. 분명 의미 있고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시점에 나는 생태 위기가 가시화되기 이전의 시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생태학적 상상력을 떠올렸다. 생태 위기 이전부터 우리 시인들은 풍부한 생태학적 사유와 상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시인들의 생태 인식이 생태 위기 이후의 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훨씬 풍요로운 생태학적 상상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도한 첫 번째 연구가 ‘불교 생태 시학’이었다. ‘불교적 시학’의 하위 범주로서 ‘불교 생태 시학’은 ‘불교에 토대를 두면서 전개되는 창조적인 생태학적 상상력’을 의미한다. 본서에서 다루는 ‘불교 생태학’도 ‘불교에 토대를 두지만 불교로 환원되지 않는 창조적인 생태학'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본서의 ‘불교 생태학’을 ‘Buddhist Ecology’가 아니라 ‘Buddhistic Ecology’로 옮겼다. 엄밀하게 말해 내가 다루는 것은 ‘불교 생태학’이 아니라 ‘불교적인 생태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연구의 초점이 ‘불교’가 아니라 ‘한국 현대시의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이다.
3부에 수록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집중적으로 발표된 나의 불교 생태 시학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진다.
첫째, 생태 위기 이전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생태학적 상상력을 조명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생태 시학 연구자들은 생태 위기 이후의 시편들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반면 나는 생태 위기 이전 시인들에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생태 위기 이전부터 한국 현대시인들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왔음을 고찰하였다. 불교 계열 시인들은 불교 사상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생태주의적인 사유와 상상을 전개해온 것이다.
둘째, 불교 계열 시인들이 과학과의 변증을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이들은 불교가 과학 시대 이전의 유물이 아니라 과학과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자 철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 사상과 과학적 논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과하고 부분적 유사성을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잦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도는 불교와 근대의 변증, 불교의 현대적 재해석을 지향하면서, 그것을 시적 사유와 상상의 자양분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셋째, 생태 시인들이 빠질 수 있는 에코파시즘의 함정을 비판적으로 짚어내었다. 생태주의는 자연과 인간의 전체성(전일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 전체성이 악용될 경우 파시즘의 논리와 맞물리게 될 우려가 있다. 가령, 개체의 고통을 간과하고 전체(공동체)에 무게를 싣다 보면 쉽게 파시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본서에서는 우리 문학사에서 친일 문인, 친독재·친군부 시인으로 낙인찍힌 이광수와 서정주의 문학을 대상으로 생태주의와 파시즘이 어떻게 맞물리게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진단하였다.
선적 미학
4부 2장에서 다루는 미당 서정주의 윤회론적 상상력은 민중불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본질적으로 불교의 윤회론은 무아윤회론이지만, 미당은 삼국유사에서 수용한 기층민의 유아윤회론적 사유를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수용한다.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미당이 유아윤회론적인 상상력으로 민중불교적 미의식의 정수를 보여준 대표적인 시인이라면, 조지훈은 엘리트적 미학으로서 선적인 미학의 벼리를 추려준 인물이다. 현대시의 선적 미학은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지만, 본서는 주로 조지훈과 거자오광의 논의를 원용하여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선적 미학을 복잡의 단순화, 평범의 비범화, 단면의 전체화, 간결성, 자연스러움, 불교적 세계관 등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조지훈도 지적하고 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 선적 미학은 서정시의 본질과 매우 유사하다. 본서에서 살펴본 선적 미학은 서정시의 본래적 미학과 불교적 세계관이 결합된 양상을 띤다. 현대시의 선적 미학은, 산문화와 해체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시정시의 본질을 고수하면 문학사적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김옥성(단국대학교·현대시학)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시절 대학문학상 시 부문과 평론 부문을 수상했으며, 『문학과경계』, 『시사사』 등으로 등단하여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김준오 시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종교 생태학』, 『현대시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미학』, 『한국 현대시의 전통과 불교적 시학』 등이 있다.
대학지성, "불교와 자연과 시적 상상…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미래의 비전", 2022.3.13
링크 : http://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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