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이야기로 30여년간 시를 써온 시인
[서평] 동고동락한 제자들 소환한 이봉환 시집 '중딩들'
"중딩, 너희들과 희로애락한 지, 그 희로애락을 시로 써온 지 30여년, 그리고 여기 이곳의 너희하고는 3년, 올가을에는 너희하고 이런 약속을 하였지? '내 너희에게 시를 한 편씩 선물하마.' 갖가지 너희의 아름다움을, 발칙스러움을, 변화무쌍함을, 찬란함을 너희 밖으로 불러내 나무로, 시로 보여주겠노라고."
- '시인의 말' 중에서
<중딩들>, 이봉환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제목이다. 어렵다. 시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쉽고 유쾌하고 발랄한 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어서 소개할 몇 편의 시를 고르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일단 내 취향에 맞는 시부터 한 편.
"수업시간마다/떠든다고 지적을 받을 때마다/인상을 쓰던 솔희가/그런데 웬일?/간만에 활짝 웃는다/누굴 보고 웃나?/웃음을 따라 가보니/거울 쪽이다/거울 속의 저를 보고/저리 환해지는 것이다/그토록 저를 좋아하니/솔희야 너는 쓰것다*/저 안에 환한 네가/또 숨어 있으니/그리 예쁘게도 웃으니/사랑 주고받으며/누군가와도/잘 살겠다/그러면 됐다"
- '저를 사랑하는 솔이'/이봉환 시집 <중딩들>(푸른사상), 2022년
*'다행이다, 좋겠다.'라는 뜻의 전라도 말.
한 편 더 소개하고 글을 이어가보자. 제목은 '장필오가 좀 전에'다. 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이름은 이봉환 시인이 무안청계중학교에서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제자의 실명이다. 이름자 석자 중 하나를 살짝 바꾸긴 했지만.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필오가 뛰쳐 나온다./목이 타버릴 것 같아요, 살려줘요, 선생님./학생 목이 타면 안 되니까 물 먹고 오라고 보낸다./한참 수업을 하는데 언제 갔다 왔는지 필오가/또 튀어 나온다./그럴 땐 꼭, 얼굴을 찡그리며 바짓가랑이를 움켜잡는다./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오줌보가 터져버리겠어요, 쌤./빨랑 갔다와라! 화장실 쪽으로 급한 손짓을 한다./학생 오줌보 터지면 큰일이니까, 얼른 보낸다."
- '장필오가 좀 전에'
김진경 시인은 "고속도로를 차를 몰고 가면 목적지만 남고 풍경은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삶이 대강 이와 같다. 시인의 일은 거꾸로 목적지를 지우고 스쳐 지나가던 풍경 하나하나를 호명하여 우리 삶의 한 순간을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표지 추천사에 적고 있다. 아 그렇구나! 시인을 교사 혹은 선생님이라도 바꾸어 써도 좋겠다.
한때는 '교사 시인'이라는 호칭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제 교사는 아니다. 올 2월에 학교를 퇴임했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이 퇴임 기념 시집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를 갖기도 한다.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가 호명한 한 아이의 이름은 정안이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
"정안이가 오늘 수업도 없는데 도서관에 일부러 와서 그런다/운동장 보도블록 틈에 민들레가 피어서요 샘한테 알려드리려구여/고맙다 정안아 이 가을에, 세상에나 이런 벅찬 일로 오시다니"
- '이 가을에 정안아'
시집 뒤표지에는 학생이 쓴 추천사도 있다. 그의 평등한(?) 배려심이 엿보인다. 그런데 녀석이 좀 그렇다. 제 스승을 닮았는지 슬쩍 능청이 들어가 있다.
"봉환쌤과 3년 동안 함께한 수업이 모두 좋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온몸을 써가며 수업을 하실 때나, 친구들의 발표가 재미있을 때, 어쩌다가 발표를 많이 할 수 있을 때는 웃음이 절로 난다. 반면에 쌤이 아재 개그를 하시거나, 손을 백 번 천 번을 들어도 안 시켜주실 때는 기분이 싸해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추억을 시로 쓰신 봉환 쌤. 우리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겨서 좋다."
- 배다은(무안청계중 3학년)
배꼽잡고 웃다가 웃음을 계속 지을 수만은 없었던 시를 한 편 더 소개한다.
"조원호가, 초코바를 까더니 껍질을 나무가 바람에 낙엽 떨구듯 아주 자연스럽게 흘리고 간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주 대단한 경지!/나무들은 몇천 몇만 번을 얻었다 놓아야 어른이 되는 걸까* 원호가 버리고 간 낙엽이 가을바람에 바스락바스락 운동장 구석을 뒹굴고 있다"
- '조원호가 어른이 된 날'
*언젠가 가을, 수업 들어가다가, 아무도 몰래 후드득 잎들을 놓아버리던 학교 뒤뜰의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있다.
시집 해설을 써주신 최은숙 시인도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난 경험이 있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교사 시인이기에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봉환 선생님의 교실만 특별할 수 없고, 이러저러한 난관이 선생님만 피해 갔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과 더불어 있는 시간이 이렇게 품격 있는 시어로 표현될 수 있었던 건 선생님에게는 다른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초코바를 까더니 껍질을 나무가 바람에 낙엽 떨구듯 아주 자연스럽게 흘리고' 가는 조원호를 선생님은 학교 뒤뜰의 은사시나무를 보듯 바라봅니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이제 마지막 시를 한 편만 더 소개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시집이 나오기 전에 어디선가 읽고 참 좋은 느낌을 받았던 시다. 물결처럼, 잔물결처럼 조용한 시다. 천방지축들이 난리법석을 치는 중학교에도 이런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소리가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나질 않았다 물결이니까/파도라면 그 소리 제법일 텐데/기껏해야 저수지의 잔물결일 테니까/한 달이 지났다/두 달이 지났다/물결에 웃음이 일었다/물안개 같은/일렁임이 수면에 조용히 일었다
- '물결이가 전학을 왔다'
이봉환 시인은 30여년 국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올해 2월 정년퇴임하였다. 1988년 <녹두꽃>에 <해창만 물바다>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응강> <밀물결오시듯> <해창만 물바다> 등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빈다.
오마이뉴스, "학생들 이야기로 30여년간 시를 써온 시인", 안준철 시인, 2022.2.21
링크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11582&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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