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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간행도서

김재원·이숭희 엮음,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by 푸른사상 2022. 2. 7.

 

분류--역사, 한국근현대사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김건후, 칭치엔허, 허버트 김, 게르베르트 김

 

김재원·이숭희 엮음|175×245×21 mm|352쪽

30,000원|ISBN 979-11-308-1889-4 03990 | 2022.1.25

 

 

■ 도서 소개

 

20세기 초, 전 세계를 뒤흔든 격랑에 온몸으로 부딪쳤으나

끝내 역사에 묻힌 한 청년의 기록

 

굴곡진 시대를 관통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청년의 삶의 궤적을 기록한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김재원·이숭희 엮음)가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 대공황,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 한국전쟁 등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희생된 김건후의 불운했던 삶을 파헤침으로써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을 되새긴다.

 

 

■ 엮은이 소개

 

김재원

뮌헨대학교(LMU)에서 서양미술사학, 고전 고고학, 미술교육학을 전공했다(박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로 19, 20세기 미술사 및 그리스도교 미술사를 강의했다.

 

이숭희

뮌헨대학교(LMU)에서 정치학, 러시아사, 유럽사를 전공했다(박사). 한국 국방대학교 교수로 국제정치학, 동북아시아의 안보 정치 및 강대국의 외교를 강의했다. 현재 한국 국방대학교 명예교수이다.

 

 

■ 목차

 

∎ 책머리에 _ 김재원, 이숭희

 

I 서문 _ 히로아키 구로미야

1. 한국, 중국, 미국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삶

2. 신념의 변화

3. 죽음, 생존 그리고 귀환

4. 실종

 

II 김건후의 생애 _ 이숭희

1. 김건후의 성장 과정과 아버지의 영향

2. 칭치엔허의 중국 생활

3. 허버트 김의 미국 생활

4. 시련의 소련 생활

5. 석방, 귀국, 그리고 납북

6. 무혐의 종결과 복권

 

III 시베리아의 유형수, 게르베르트 김의 악몽 _ 김건후

1. 체포, 재판, 사형수 감방의 9일

2. 알마아타 임시수용소, 즐라토우스트 정치범 수용소, 솔로베츠키 수용소

3. 쿠루폴다 수용소, 아르한겔스크 임시수용소

4. 보르쿠타로 이동, 보르쿠타의 초기 생활, 제2지구

5. 보르쿠타 수용소의 일상, 북극지역의 겨울, 제4지구, 제3지구

6. 갑작스런 호출, 보르쿠타 출발, 모스크바로 이동, 모스크바의 첫 폭격, 모스크바 감옥

7. 모스크바 출발, 오렌부르그를 거쳐 사마라(쿠이비셰프)로 이동, 소련 비밀경찰(NKVD)의 심문

8. 모스크바 재이송, NKVD 요원 면담, 쿠이비셰프 이송, 석방

 

IV 허버트 김 이야기 _ 레너드 버치

 

V 폴린의 기록 _ 폴린 김

1. 폴린이 루스벨트 영부인에게 보낸 탄원서

2. 폴린이 허버트에게 보낸 편지

 

VI 에필로그:안개 속 여정 _ 김재원

1. CSM 캠퍼스에서

2. 정정식과 결혼,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3.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 김건후 연보

∎ 사진 및 문서자료

 

 

■ ‘책머리에’ 중에서

 

20세기 초, 전 세계를 뒤흔든 격동과 마주하며 살았으나, 잊혀진 역사에 묻혀버린 김건후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국에서 김건후(金鍵厚)로 태어난 그는 중국 국적을 획득하면서 칭치엔허가 되었고, 미국에 도착하여 청년 허버트 김(Herbert Kim)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공황은 학업을 마친 그를 소련으로 내몰았고, 소련에서는 게르베르트 김(Герберт Ким)으로 불렸다. 이 여러 이름은 그가 겪은 역경을 반영한다. 결국 그는 소련에서는 스탈린 대숙청에,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에 희생당했다. 그는 파란 많은, 기구한 삶을 살았던 한국인 인텔리겐차이며 광산 엔지니어였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은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언급되었으나, 한국의 가족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딸 김재원이 이 모든 기록들을 파헤치기 전까지는 단지 그의 부인이었던 정정식 교수에 의해 단편적으로 그의 딸에게 전해졌을 뿐이다.

김건후의 삶의 궤적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기보다 한국이 처했던 국내외적 격변의 결과였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 망명, 상해 독립운동가 가족의 궁핍한 삶, 일본의 대륙 침략과 동북아의 세력 변화, 미·소 간의 협력과 대립, 그리고 세계 최초의 이념적 대립이었던 한국전쟁. 이 모든 것들이 김건후가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고, 그의 고난은 곧, 돌아갈 곳 잃는 디아스포라의 모진 운명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처음 의도는 김건후의 이동 궤적(한국, 중국, 미국, 러시아)을 따라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개인적 삶의 상관관계에 천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초자료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생애의 일부 시점에 관하여는 밝혀지지 못하고 있고, 또한 일부 문서는 기밀이 해제되지 않아 학문적 접근에 제약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우선 그의 친필 수기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출판사 리뷰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격랑 속으로 사라진 청년 ‘김건후’의 삶의 흔적을 파헤친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 한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몸 바친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고, 미국 유학을 거쳐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어느 젊은 한국인 청년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김건후가 한국전쟁 시기 납북된 뒤에 태어난 딸인 김재원 교수는 어머니인 정정식 교수로부터 전해진 기억, 소련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김건후의 친필 수기, KGB(옛 소련 비밀경찰)와 미국 국립문서고(NARA II) 등에 보관되어있는 기밀문서와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그의 행적을 추적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김건후의 생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김홍서의 아들로 태어난 김건후(金鍵厚)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칭치엔허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미국으로 유학한 뒤에는 허버트 김(Herbert Kim)이라는 이름으로 광산학을 전공하였으며, 대공황으로 인해 소련으로 이주하여 광산기술자로서 활동하던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스파이라는 누명을 써 체포되고,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에 동원된다. 그의 재판 과정과 수용소에서의 혹독한 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친필수기를 통해 시베리아 굴락의 비인간적인 환경과 인권 유린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극심한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공산주의에 동조적이라는 의심을 받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산 개발에 매진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여전히 생사도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격동의 시대, 개인의 비극이 던지는 시사점

김건후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은, 곧 당시 한국과 전 세계가 거쳐온 격동의 시대를 반영한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망명, 미국의 대공황과 미·소 간의 정치 대립, 스탈린의 대숙청, 이념투쟁의 장이었던 해방기 한국.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과 행적을 기록하는 건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며 반성하는 행위이다.

 

 

■ 책 속으로

 

1904년(혹은 1905년) 평양 남쪽, 강서에서 태어난 허버트 김은 그의 가족을 따라 1916년에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는 그의 부친 김홍서(1886~1959)가 감리교 지도자였으며, 교육자였고, 평양의 주요 신문사의 편집인으로서 일제의 한국 점령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1919년 상해에 세워진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시민권을 얻은 허버트 김은 상해의 YMCA에서 활동했고, 결국 미국 유학을 결정했으며, 그의 부친도 이 결정을 지원했다.

1923년 허버트 김은 미국으로 들어와서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휴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가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약한 사회주의적 기독교 선교사인 조지 셔우드 에디(George Sherwood Eddy, 1871~1963)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는 “젊은 한국인으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느꼈고 (…) 그래서 광산학의 미래 실용성에 주목했다”고 하였다. 휴론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1924년에 그는 콜로라도의 광산대학(CSM)으로 옮겨갔고, 여름방학마다 사우스다코타 리드에 있는 홈스테이크 금광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28년 CSM에서 광산학 학위를 받은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하였고, 광산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그는 미국인, 폴린 립만(Pauline Liebman)과 결혼하였다.

(20쪽)

 

그의 상세한 기억은 이 책(III. 시베리아의 유형수, 게르베르트 김의 악몽 참조)에 재현되어 있으며, 스탈린 테러와 소련 강제수용소에 관한 가장 감동적이고 강력한, 그리고 방대한 개인적 기록의 하나로 꼽힌다.

(23쪽)

 

1937년 11월 1일 월요일 밤, 11시쯤 이미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몇 사람이 호텔로 들어와 허버트 김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스텝니약(Stepniak) NKVD의 장이었던, 적어도 3년 전부터 나를 알고 함께 일해왔던 소로킨 대위가 중위를 대동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내게 소위 체포영장을 보여주었다. 난 그들에게 뭔가 큰 오해가 있을 거라고 말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난 기꺼이 가서 뭐든 설명할 작정이었고, 그날 밤 그들이 날 다시 보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겨 기다리고 있던 NKVD 차량에 태워졌다. 나는 야밤에 은밀하게 붙잡혀간 수백만 명 중 하나였다. 아무도 언제,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20세기 소련의 잔인하고, 부당하고, 합법화된 불법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공산주의자들의 수뇌부에게서 지시받은 대로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실행했다. 여전히 그들은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정의의 승리자, 평화의 전사다.”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김건후 친필수기, 40~41쪽)

 

나리얀 마르에서 하선하며 다른 죄수가 떨어뜨리고 간 낡고 더러운 셔츠를 집어 들었다. 지저분한 데다가 맨발에 북극 밤의 찬바람에 덜덜 떨고 있던 나의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시금 나는 어떻게 소련의 수용소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추위에 이가 덜덜 떨리고 발은 쑤셨는데, 무장한 경비병들에 둘러싸인 채로 야외에서 밤을 지냈기 때문에 밤 내내 영하의 추위에 직면했다. 높은 위도로 인하여, 7월도 밤에는 따스함을 갖다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맑고 차가운 하늘 아래, 북극성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드넓은 극지방의 벌판에서 5, 6천 명의 영혼들이 서로 온기를 간직하여 이미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한데 뭉쳐 있었다. 북극지방에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확실이 나는 모른다. 나의 경우 내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배고프고, 헐벗었고, 춥다는 느낌이 모두 다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것이 없었다! 추위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마침내 끝나고 하늘 높이 태양이 떠오르자 얼어붙었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은 이미 잊혀졌고, 오직 그날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김건후 친필수기,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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