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성향숙 지음|푸른사상 시선 116|128×205×10 mm|154쪽|9,000원
ISBN 979-11-308-1487-2 03810 | 2019.12.15
■ 도서 소개
실존적 고독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노래한 시
성향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가 <푸른사상 시선 116>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과 실존적 고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마주한 듯한 서늘한 문장을 내놓는다. 시의 실존, 사회성, 자아 인식 등을 공감각적인 표현과 독특한 상상력과 상징성을 내포한 문장으로 노래하고 있다.
■ 시인 소개
성향숙(成香淑)
경기도 화성의 작지만 다정한 시골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서쪽 햇살 비껴 든 툇마루에 집배원이 던져놓고 가던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2000년 당선되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2008년 『시와반시』로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가끔, 글 쓰는 일로 자괴감에 사로잡혀 외로워지는 나를 원망할 때 있습니다. 다만 내가 나에게 지치지 않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시집 『엄마, 엄마들』이 있습니다.
(E-mail : shs003127@hanmail.net)
■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바깥의 탄생
고독의 발명 / 장님거미 / 어둠의 맛 /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 깨진 유리창 이론 / 스테레오 타이피(stereo typy) / 빨강의 자서 / 뚱딴지 / 코드(code) / 평범 사전 / 분홍에 대한 은유 / 2018, 입추 / 꽃양귀비 / 36.5
제2부 어쩌다, 진화
명료한 어둠과 낮의 솔직함 사이 /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 외면의 실루엣 / 단언할 수 없는 산책 / 찌푸림 / 안녕, 뭐 해? / 내일의 슬픔 / 아침의 소용돌이 /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 저녁이 온다 / 권태 / 낮잠 / 12월 / 사라 127세, 나는 500세 / 그냥 그런 날 / 키스
제3부 해 뜨기 전
궁금, 궁금 / 창문의 감정 / 토닥토닥 / 마포대교 / 나는야 술래 / 나의 죽음을 알립니다 / 피 묻은 달 / 그림일기 / 손아귀, 소나기 / 컴컴한 혹은 영원한 / 혀끝에 맴도는 이름 / 수줍은 낮달 / 스틸 라이프(still life) / 쁘라삐룬(prapiroon) / 더치커피
제4부 나는 거기 없다
물어본다 / 맨스플레인(mansplain) / 질주의 방식 / 고속 재생되는 채플린, 채플린 씨들 / 벌안[發安] / 상투적으로 / 영국은 한때 창문 크기로 세금을 부과했다 / 균형 / 리듬 0 / 마리코 아오키는 서점에 갈 때마다 배변 욕구가 생긴다 / 첫사랑을 산다 / 의자들 / 귀신이 산다 / 중첩 / 지평선을 바라본다
■ 작품 해설:세계의 끝에서 죽음 그 ‘너머’를 바라보다 - 박성현
■ 시인의 말
두 번째 묶는다
여름에 갇힌 초록처럼
관성에 묶인 하루하루처럼
부끄럽지만
9월이면 갑자기 여름이 끝날까 봐
아무도 모르게 새처럼 날아갈까 봐
이렇게 발목을 잡아
■ 추천의 글
낮잠에 잠깐 들었는데 누군가 그녀의 몸을 다녀갔다. “육신의 모든 촉수”가 열리고 꽃 핀 기억이 없는데 어디선가 긴 여름날의 비릿한 한 생을 끌어안고 지는 꽃잎에게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진다.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지는 꽃의 신열이 전생의 유언처럼 간곡하게 여운으로 전해지는 것은 사람과 꽃이 원래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 먼 ‘꽃’을 더듬어 찾아가는 기억이나 사물의 내면 캄캄한 밀실에는 실핏줄처럼 뒤엉킨 난독의 지형도가 펼쳐져 있고 거기 어디쯤 “서쪽으로 사라진 푸른 낙엽의 행방”에 대한 단서도 잡힌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미로처럼 뒤엉킨 그녀의 내면은 바로 ‘고독’을 ‘발명’하는 실험실 같은 곳인데, 문득 그곳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일상은 “평온을 가장한 거짓 풍경”뿐이다. 그녀의 시는 내면의 낯선 풍경과 “수시로 감정을 바꾸는 창”을 통해 내다본 ‘외면의 실루엣’이 겹쳐지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피지 않은 꽃이 지는” 그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이덕규(시인)
성향숙 시인의 시를 읽다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지만 “머리에서 발끝까지 외로운 영겁”을 지녔다. “부산한 직선들이 엎드려 고요한 지평선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고독을 발명하거나 발견하는 사람일 것 같다. 외롭고 심심하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이 중 어느 것 하나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까. 이 네 단어는 뿌리가 같은 네 개의 가지에 불과하다. 성향숙 시인은 이 네 개의 가지에 색깔이 조금씩 다른 잎사귀를 매달아두었다. 눈부신 어둠으로, 피지 않은 꽃으로, 플라타너스의 간격으로, 때로는 문밖의 고독으로 색깔을 바꾸며 내게 안부를 묻는다. “안녕, 뭐 해”
― 하상만(시인)
■ 작품 세계
시의 의지, 시의 고립과 확장, 시의 언어적 단절과 섬세한 겹침, 모호함의 은밀한 집중들은 시가 생성되는 순간, 그것의 발가벗음과 함께 던져지는 시의 실존이다. 시는 던져지듯 우리의 삶에 외삽(外揷)되는 것이며, 우리의 살과 뼈와 피에 공명해 ‘살아 있음’이라는 실로 가장 치열하고 중요하며 명백한 사태의 중심에 선다. 문장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시’가 있다는 말이다. 시는 대상을 바라보고, 그곳에 글자와 문장을 새기며 내부와 외부를 섞어놓고 뒤바꾸며 전복한다. 요컨대, “내부와 외부를 규정짓던 견고한 벽”이 허물어질 때, “스텝이 엉켜도 바람의 춤사위는 계속되고/푸른 웃음기들이 모여”들며, “드디어 목련 꽃도/풍경의 내부에 들어와 활짝 허공을 깨뜨”린다는 것(「깨진 유리창 이론」).
시가 만들어내고 숙성시키는 사태에 대해 성향숙 시인은 “와불이 응시하는 먼 곳”이라며 상징적으로 쓰는데, 그것은 곧 “잠든 사이 다녀간 도둑처럼/안으로 집중하다가 주변으로 흩어지는/쥐똥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고요”이며, “소멸의 명부를 들춰 퇴색하는 푸른 강물과/붉은 단풍잎의 낙하/늙지도 죽지도 않는 부처 몸속에 흐르는/달에서 태양으로/무덤에서 무덤으로” 흩어지는 ‘고독’이다(「고독의 발명」). 그가 묘파한 것처럼, 시의 실존이란 ‘고독’의 다른 말이다. 불가피하게도 시는 ‘시인’이라는 실존적 고독을 통해 완성된다. (중략)
만일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경계란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기 시작하는 부분에 가깝다”면, 실존적 고독이란 주체와 타자들의 완전한 분리 내지는 주체의 단절과 고립이 아닌, 타자와 주체의 영역이 겹쳐지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 두 영역은 각각의 개별성을 가진 채 서로 스며들며 중첩되고, 중첩됨으로서 존재가 지난 다양성의 가치를 긍정하는 ‘이접적 종합’(들뢰즈)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계는 주체와 타자의 구별(혹은 ‘구분’)이 아니라, ‘섞임’과 ‘교차’이고 ‘다름’을 더욱 명확히 하는 ‘차이’의 사유다. 모든 경계는 생산적 상상력의 장이다.
―박성현(시인)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고독의 발명
그러나 어둠이 빛을 삭제하듯이
빛이 어둠을 점령하듯이
머리 쪽에 서서 보면 여자, 발치에서 보면 남자인
차옥타지 파고다 와불은 시선을 허공에 걸었다
서로 복화술을 주고받듯이
내부에 가둔 침묵을 가동하는 맨발과
정적이 밧줄처럼 굵어지는 것
보리수나무 아래 촘촘히 각인된 기록들
고독은 눈부시다
나이 들어 목소리가 걸걸해지는 여자와
입술이 얇아지는 남자는 서로
저만치서 흘깃거리며
묵주 알 하나씩 침묵에 든다
와불이 응시하는 먼 곳,
머리에서 발끝까지 외로운 영겁
우두커니 고독으로 누운 지평선을 닮아간다
잠든 사이 다녀간 도둑처럼
안으로 집중하다 주변으로 흩어지는
쥐똥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고요
소멸의 명부를 들춰 퇴색하는 푸른 강물과
붉은 단풍잎의 낙하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부처 몸속에 흐르는
달에서 태양으로
무덤에서 무덤으로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안녕하십니까
잠깐만,
들판을 지나 구름을 따라가다 접질려 발목이 삐었다
빛나는 햇살이 이마에 부딪쳤기 때문이야
대지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야
소복하게 부푼 멍과 푸른 발등과
시린 발목을 가만히 직시하는데 우두커니
말뚝에 묶인 줄 끝에 붙어
염소 한 마리 깔깔깔 노래 한 소절 부른다
말뚝을 몇 바퀴 빙빙 돌면서
충분해
달달한 감동은 아니지만
뒤집힌 바퀴처럼 가끔 헛발질의 리듬을 음미하는 것
우울을 전달하는 절름발이 걸음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아침의 눈인사와 지난밤의 잠자리, 손에 쥔 휴대폰
길바닥에 숨은 크고 작은 안녕들
원초적 감정과 본능들
일이 꼬이면 뒤돌아 몇 발짝 절뚝이며 걸어보는
어쩐지 슬픈 뒷모습
들판의 염소가 감긴 줄을 풀다가 말뚝에 머리 찧고
질식한 흰 침을 흘리고 서 있어
고요하고 절망적인 평화, 역겨워
염소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질주의 방식
살아 있지만 살아 있음을 간과하면 불현듯
어둠은 어둠을 견인하고
나는 나를 추월해 흰 국화로 환생한 적 있다
오아시스를 덮고 내 장례식장을 장식한 적 있다
몸이 분리되어 대지와 허공으로 한없이
사이가 벌어진 적 있다
한때의 감정으로 펄럭이던 때
벚꽃이 봄을 점령하듯
겁 없이 달려드는 눈빛 살피는 일
가로수의 안녕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 몸 밖을 튕겨 나온 혈액은
장송곡처럼 흘러
달을 추월하고 꽃보다 빠르게 나무를 추월하고
겨우 환생한 사막여우처럼 눈을 동그랗게
멈춘 숨을 토해낸 적 있다
목숨 건 추월엔 경계가 없다
달빛의 지붕에서 낯선 빙하의 담벼락까지
시계는 흰 벽에 꽃으로 피고
오늘을 추월한 오늘처럼
미지의 낯선 행성은 나를 맞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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