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국익을 우선한 현실정치가
김장수 지음|서양근대사총서 5|153×224×12mm|264쪽|22,000원
ISBN 979-11-308-1407-0 93920 | 2019.2.25.
■ 도서 소개
보수적 현실정치가 메테르니히의 삶
김장수의 『메테르니히:국익을 우선한 현실정치가』가 푸른사상사 <서양근대사 총서5>로 출간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유럽의 질서를 재편한 빈 회의의 주도자 메테르니히의 삶과 정치적 행보를 추적하며 보수적 현실정치가로서의 면모도 재조명한다.
■ 목차
■ 책머리에:빈 체제를 정립한 실세 정치가의 행보
제1장 보수적인 청년 외교관
1.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년기
2. 슈트라스부르크 및 마인츠에서의 수업
3. 보수적 사상을 체득하다
4. 메테르니히의 여인들
5. 외교관으로서의 첫 행보
6. 파리 주재 대사
7.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
제2장 나폴레옹 시대
1. 외무장관 취임
2.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3. 해방전쟁의 시작
4. 제1차 파리 평화조약
제3장 빈 회의, 그리고 그 이후
1. 빈 회의
2. 4국동맹의 결성과 활동
3. 독일 연방의 결성
4. 카를스바트 협약
5. 독일 관세동맹
6. 함바흐 축제와 메테르니히의 대응
제4장 3월혁명, 그리고 실각과 복귀
1. 메테르니히와 페르디난트 1세
2. 빈 혁명
3. 메테르니히의 실각
4. 3월 정부의 출범과 과제
5. 메테르니히의 귀환
6. 메테르니히와 신절대주의 체제
제5장 메테르니히 사후의 오스트리아
1. 신절대주의 체제의 붕괴
2. 형제전쟁
3. 이중 체제의 도입과 독일제국의 등장
■ 나가면서:현실정치가로서의 한계를 인식한 메테르니히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저자 소개
김장수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 『프란티세크 팔라츠키(F.Palacký)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통합과 제국의 탄생』 등이 있으며, 그동안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주제로 많은 논문을 써왔다.
■ 출판사 리뷰
메테르니히 하면,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서 나폴레옹 이후 각국의 사후 처리를 논의한 빈 회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유럽의 반동적 움직임을 이끈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보수적 행보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상을 굳건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정복전쟁이 전 유럽에 뿌린 자유 및 평등사상으로 유럽의 민중은 들썩거렸고, 민족주의의 열풍 역시 강하게 확산되었다. 보수주의자였던 메테르니히는 그것을 탄압하고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해 움직였다. 당시의 시대적 대세였던 독일권 통합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 주도권을 오스트리아가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의 흐름으로 봤을 때 메테르니히의 정책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국익을 우선한 현실정치가』는 인간 메테르니히의 ‘한결같은(?)’ 행보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며 그의 긍정적인 면까지 재평가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일반적으로 메테르니히는 보수 및 반동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인물은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된 이후 유럽을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질서 체제, 즉 절대왕정체제로 회귀시키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급속히 확산되던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도 철저히 탄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메테르니히의 이러한 정치적 노선은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우선시한다’라는 그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독일 및 오스트리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었고 그것에 대한 설득력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대되고 있다.
실제로 메테르니히는 활동 기간 중 오스트리아 국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했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책들도 강력히 추진했다. 즉 그는 유럽의 제 열강,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중에서 어느 국가도 독자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제압할 능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소위 ‘균형이론(Theorie der Balance)’을 제시했고 거기서 오스트리아의 중재 역할도 강하게 부각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추진한 ‘유럽정책(Europapolitik)’의 핵심적 내용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메테르니히는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가 인정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양강 구도도 견지시키려 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제기되던 독일 통합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러한 관점을 자신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 시행으로 메테르니히는 독일에서 통합을 방해하는 인물로 각인되었고 나아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도 선정되었다. (중략)
이 책에서는 우선 메테르니히의 성장 과정 및 결혼 후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을 살펴보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부각된 그의 정치적 성향 및 지향 목표도 다루었다. 당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된 후 그것을 대처할 질서 체제인 절대왕정 체제에서 ‘열강 간의 균형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멸된 신성로마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향후 독일권에서 계속 우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관점이었다. 이렇게 강조된 ‘유럽 열강 간의 균형’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우위권 확보’를 토대로 정립된 것이 메테르니히 체제였는데 이러한 질서 체제가 독일권에서 정립된 이후 당시 통합운동의 핵으로 등장한 시민계층, 특히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활동은 이 책에서 다룰 중요한 주제라 하겠다.
또한 메테르니히 체제가 유럽에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도 취급하도록 하겠다. 이어 1848년 이러한 질서 체제가 붕괴된 이후 구체화된 독일권의 통합 시도와 거기서 부각된 문제점들도 거론하도록 한다. 아울러 빈으로 회귀한 메테르니히가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빈 정부의 정치적 행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가를 언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메테르니히 사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전개된 상황, 즉 형제전쟁, 이원 체제 도입, 그리고 프로이센 주도로 진행된 독일의 통합 과정에 대해서도 다루도록 한다.
■ 책 속으로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대사로 활동을 개시한 직후인 8월 5일 외무장관 탈레랑-페리고를 면담했고 5일 후인 8월 10일 생클로드(Saint-Cloud)궁에서 나폴레옹과의 독대 기회도 가졌다. 독대 후 나폴레옹은 메테르니히를 과소평가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막내 여동생 카롤린(Caroline)에게 “가끔 나는 메테르니히와 같은 얼간이(ceniais)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것은 현 시점에서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40쪽)
같은 해 9월 9일 러시아,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테플리츠(Teplitz)에서 조약도 체결했다. 여기서 메테르니히는 유럽의 불행을 종식시키고 유럽에서의 균형 회복을 통해 평화 정착도 구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를 대불동맹 체제의 핵심 국가로 등장시켰고 그 자신 역시 결정력을 가진 정치가로 부상시켰다. 이 당시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의 패권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07년에 체결된 틸지트 평화조약 이후 군사적으로 러시아에 종속된 프로이센이 러시아의 군사적 비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신장되기를 원했고, 같은 이유에서 패전국인 프랑스가 종전 후에도 유럽의 강국으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단일민족국가로 전환할 경우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의 안전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두 국가의 통일 저지를 중요한 과제로 선정했다. (88~89쪽)
결국 같은 날 저녁 황궁에서 임시국가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메테르니히는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조피를 비롯한 일부 참석자들은 메테르니히를 혁명의 희생양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1836년부터 메테르니히와 지속적으로 대립하던 콜로브라트-리프슈타인스키도 동의했다. 반면 루트비히 대공은 메테르니히 견해에 동조하며, 군 병력을 증강하여 혁명적 소요를 가능한 한 빨리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피와 그녀의 남편 프란츠 카를 대공은 혁명 세력과의 타협을 강력히 요구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메테르니히가 무조건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결국 조피의 주장이 임시국가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조피가 혁명 세력과의 타협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들, 특히 코슈트가 그녀의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차기 황제로 추대해야 한다고 피력한 것에 대해 크게 고무되었기 때문이다.(188~189쪽)
그의 말에 따르면 메테르니히는 의자에 앉아 펜을 들고 천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냉정하고, 거만하고, 고귀한 자세는 그가 빈 정부의 실세로 활동했을 때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휘브너는 얼마 후 메테르니히가 자신을 발견하고 미소로 대응했고 낮은 목소리로 “또 봅시다.”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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