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하는 힘
안효희 지음|푸른사상 시선 94|128×205×9 mm|144쪽|9,000원
ISBN 979-11-308-1380-6 03810 | 2018.11.5
■ 도서 소개
안효희 시인의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이 <푸른사상 시선 94>로 출간되었다.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상실된 시대에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치열하게 탐문하고 있다. 짓물러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시인은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시인 소개
안효희
부산에서 출생하여 줄곧 부산에 살고 있다. 1999년 『시와사상』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으로는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서른여섯 가지 생각』 『너를 사랑하는 힘』이 있다. 『시와사상』 부주간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다. 제5회 시와사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Let it be /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 혼자 산다 / 너를 사랑하는 힘 / 치유의 방식 / 모노톤 / 백 년 동안 퍼석거리는 나라 / 밀서 / 맹인이 걸어간다 / 악취 / 그림자에 등을 기댄다 / 바바리맨 / 잠깐 / 무거운 숟가락 / 주렁주렁 물방울을 매달고 비구름이 지나가는 눈부신 안과 / 독기(毒氣)
제2부
동굴 속의 동굴 / 꽃잎과 물고기 / 둥근 것이 가진 은밀한 / 젖무덤 / 수백 마리의 나비 / 괜찮아 / 냉장고 / 거대한 입 / 무연고(無緣故) 슬픔 / 로또 아이스크림 / 유언 / 떠나가는 얼굴들 / 곡(哭), 혹은 울음 / 검은 우산이 필요해 / 무심한 당신 / 마른 꽃
제3부
요거트 감정 / 너무 짧거나 긴 하루 / 거위의 달 / 잘 있어! / 집은 한 뼘도 걸어가지 않는다 / 외면 금지 구역 / 햇살 / 달빛 아래 / I park / 연잎 / 빈 널판 / 비는 내리고 / 기면(嗜眠) / 바람의 혀 / 말을 내뱉는 거미
제4부
떨어지는…… / 시간의 화살 / 스무 살 정희 / 그녀들의 비상 대책 / 창문이 없는 방 / 흐린 날의 건널목 / 독백 / 중독 / 오늘의 특선 / 끈이 가진 자유 혹은 사유 / 일어나세요 / 시를 지우는 밤 / 감옥 바깥의 감옥
■ 작품 해설:붉은 칸나를 위한 밀서 - 박형준
■ 시인의 말
또 한 걸음
걷고 있는 나를 만난다.
나무와 숲 사이에서
밤과 낮 사이에서
추구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시간들을
세 번째 시집으로 묶는다.
오랫동안 함께해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 작품 세계
안효희 시인의 신작 『너를 사랑하는 힘』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시편은 시간적 순서에 따른 전개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권태와 고독을 고현학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시인은 무의미한 일상 속에 고립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을 온 마음으로 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2, 4부에서 잘 드러난다. 두 꼭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제 의식은 ‘소멸 감각’이며, 이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소실점이 된다. (중략)
「너를 사랑하는 힘」은 인간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계적 거리(distance)’를 감지하게 한다. 그대(타자, others)에게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다. 역설적으로, 타인 역시 시적 화자가 내민 손을 잡기 위해서는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와야 한다. “나”는 늘 “두근거리는 의심”으로 타자와 조우한다. 그 “믿음”은 유효기간이 설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거리를 계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적절한 거리는 몇 미터인가!”). 하지만 그렇게 정교하게 측정된 관계/거리는 인간을 고립시킨다. “독신주의가 아니”라고,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중독」)라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짓물러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효희 시인은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말 건넴’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수십 킬로미터”의 진창(“발이 푹 빠지고 두근거리는 의심”)을 걸어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을 동반하는 것이지만―기대(“믿음”)와 실망(“의심”)의 반복이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음의 힘(“믿음”)이기도 하다. 근작 『너를 사랑하는 힘』에서 이러한 시적 가치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이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동시대의 시가 타인과의 (불)가능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씨앗”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불의 씨앗”을 숨기고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의 “빈 손”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마음의 불꽃, 아니 시인의 멋진 표현처럼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를 꽃피워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면, 혹은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싶다면, 먼저 마음의 불을 지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여전히 시를 읽고 써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정시는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씨앗이자, 각자의 가슴속에 “붉은 칸나”를 그려내는 은밀한 서간(書簡)이기 때문이다. (중략)
동물과 달리 인간을 ‘호모커뮤니쿠스’라고 부르는 까닭은,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고 외로운 이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환기하고 감지하게 하는 것이 현대시의 역할이라면, 안효희 시인은 그러한 책무를 누구보다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준(문학평론가·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제1에서 제13의 안효희는 제14의 안효희를 낳기 위해 “지금 밥을 먹고 있”(「무거운 숟가락」)다. 시인 안효희의 툭툭 튀는 언어 감각은 바둑돌을 놓듯 섬세하고 과감하다. 언어의 새 집을 짓고 그 집을 위한 시정신은 참신하고 기발하다. “말라 죽어가는 나무”(「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는 불 속에서 살아난다. 소멸에서 환생하는 나무의 역설이 시인의 도저한 정신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 신념으로 풍경의 조각들을 끌어모으는 미학을 “웃는 얼굴은 슬퍼지는 얼굴을 데리고 산다”(「그림자에 등을 기댄다」)라고 진술한다. 또한 “세계의 불안을 위무하는 물방울을 매단 비구름이 발을 다친 새를 위로한다.” “목 잘린 꽃잎/차라리 바람이 되고 싶은 꽃잎/언제부턴가 분화구가 되어가는 꽃잎”(「꽃잎과 물고기」)의 그로데스크한 진술에서 참담한 세계의 아프고 비통함을 보여준다. 절망스럽고 애련으로 깊게 물든 장면을 은근하게 읊는 시편들은 그러므로 깊고 아름답다. “죽은 나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곡 혹은 울음」) 애상들은 놓칠 수 없는 절망 극복의 처절한 미학이다.
- 유병근(시인)
안효희 시의 기조는 해수면 위를 치솟아오르는 돌고래의 율동이라기보다 밤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그림자에 가깝다. 조곤조곤한 어조로 한 걸음 한걸음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스며든다. 고요하게 묻고 나직하게 대답한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못한 변명을 삼키며 맨발로 이상한 밤을 걸어”가거나 “그림자를 끌고 가는 왼쪽 얼굴이 햇빛 드는 오른쪽 얼굴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한다. 마치 한류와 난류가 합쳐지듯이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의식과 비의식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리며 양편을 뒤섞는다. 기나긴 복도의 시작과 끝에서 서로가 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움직임은 유연하다. 비밀을 깨달아가는 자신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불이 되면서 생긴 갈등과 증오의 연기로 피어”올라 “무수히 꽂힌 깃발”처럼 흔들리며 사는 여정을 포기할 수가 없다. 너를 사랑하는 힘, 그 힘은 뜨거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염원에서 생겨난다. 삶은 절실하고 간절해야만 한다. 온몸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또 태울 것이다.
- 정익진(시인)
■ 시집 속으로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장작 난로에 불 피우려면
기도하듯 무릎 꿇어야 한다
아니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면
장작 난로에 불 피워야 한다
신문지 북북 찢어 불쏘시개를 깔고
밤을 견딘 밤나무 잔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다
차가워 냉정했거나
얼었던 마음에 불씨 붙일 수 있다면
말라
죽어가던 나무가 타닥타닥
다시 살아난다
불이 되면서 생긴 갈등과
증오의 부스러기가 연기로 피어오른다
가만히 무릎을 꿇은 자세,
연기를 핑계 삼아 눈물 흘려도 좋다
갇혀 있던
불의 씨앗,
생일날처럼 마주 앉아
손바닥 활짝 펼쳐 빈 손을 보여준다
바람이 없어도 흔들린다
바람이 없어도 피어난다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너를 사랑하는 힘
믿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한쪽이 짓무른 사과를 베어 문다
냉장고 속 차고 어두운 곳, 힘에 짓눌린 양파는 썩는다 살이 맞닿은 사과는 물러진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적절한 거리는 몇 미터인가!
달은 지고 꿈은 선명하였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못한 변명을 삼키며 맨발로 이상한 밤을 걸어간다 손을 내민 채 잠이 들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네가 마주 잡아줄 것인가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마지막 이별, 주황색 불빛이 그림자를 당기는 거리에 선다 아를(Arles)의 밤처럼 외롭고 스산한 별빛이 머리 위에 빛난다
썩고 싶지 않았던 고백과 뉘우침이, 느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걸어간다 또다시 발이 푹 빠지고 두근거리는 의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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