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박쥐우산
박은경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17|146×210×17 mm|288쪽
15,500원|ISBN 979-11-308-1345-5 03810| 2018.6.5
■ 도서 소개
경계에 놓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비밀들
박은경 작가의 소설집 『박쥐우산』이 <푸른사상 소설선 17>로 출간되었다. 토박이 농민들과 뜨내기 남자의 대조적인 삶을 그린 표제작 「박쥐우산」을 비롯하여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존재와 부재, 고고함과 소박함, 일상과 탈일상, 세속과 탈속 등 경계에 놓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비밀들을 간직한 단편들이 실려 있다.
■ 목차
■ 책머리에
박쥐우산
애일(愛日)
복날은 간다
젖은 장화를 말리다
당신의 레퀴엠
사향쥐
프리즘
엔젤 케이크
■ 작품 해설:생의 이면을 향한 집요한 시선 _ 조동선
■ 저자 소개
박은경
196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 「엔젤 케이크」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단편 「복날은 간다」가 2007년 문예지게재우수작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 한시에세이 『기러기 만리를 날다』가 있다.
■ 출판사 리뷰
박은경 작가의 소설들은 일상적인 삶을 동요시키는 낯선 순간, 인물들의 미세한 심리를 포착하해낸다. 들판 위를 떠가는 박쥐우산처럼, 스스로도 억누를 수 없는 기운을 좇아 길 위의 나그네를 자처하는 사내를 바라보는 토박이 농민들의 불안한 시선을 보여주는 「박쥐우산」, 분단의 아픔을 지닌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게 입양된 아들 사이의 감정의 간극을 그린 「애일(愛日)」, 개처럼 얽혀 사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기이한 생활을 남보다 못한 남편을 병원에 두고 사는 한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복날은 간다」, 여성 간의 섬세하고 미묘한 관계를 데자뷔를 통해 보여주는 「젖은 장화를 말리다」 등.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비일상적인 삽화들이다. 작가의 냉정하고 섬세한 문장은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소설의 매력을 더해준다.
■ 해설 중에서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소설들은 하나의 색깔로 규정짓기 어렵다. 비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말 그대로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죽음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 안타까운 애도와 함께, 때로는 조용한 수용으로 고즈넉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생의 이면과 인간살이의 미세한 속내를 포착하는 작가 특유의 혜안도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거창한 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다 싶은 비일상적 삽화들이 오히려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소설 속 인물들 또한 어떤 경계 위에 놓여 있다.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존재와 부재, 고고함과 소박함, 일상과 탈일상, 세속과 탈속 등등의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각기 상반하는 두 세계가 등을 맞대고 있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어느 순간 그 둘이 서로 넘나들고 교호 작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이전 사건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몸으로 겪고 체험한다. 그러한 체험은 일상적인 의식이나 삶의 질서가 동요하고 출렁이는 내면적 사건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그들에게 찾아오는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의문의 계기는 일상과 마음의 질서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의식의 밑바닥을 일깨워준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들은 각각 그 주제를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존재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서사 전개는 마치 그물망처럼 촘촘하면서도 중층적으로 직조된 세계로 단편소설의 특징인 단일한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중층적인 서사구조가 독자로 하여금 서사를 한 가닥으로 꿰기 어렵게 하는 면이 없지 않다. 서사 전개를 따라가는 무심한 글 읽기를 하기에는 소설의 결말에서 얻어지는 안정감보다는 파멸과 균열의 틈새가 읽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냉철한 시선과 인식에 의해 삶의 비의에 다가가고 있다. 인물의 미묘한 정서를 담아내는 섬세한 문체, 캐릭터의 위상에 걸맞은 사유의 관념적인 문장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집중력을 요하게 한다.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지적이면서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그 대신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인물의 모습, 즉 주인공 자신이 욕망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이지만 끝내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보이지 않아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따라서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의 지속을 이어나가면서도 세계의 변화에 호응하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표출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음 작품에 기대해본다.
― 조동선(소설가)
■ 작가의 말 중에서
이곳, 용인으로 이사 와서 좋은 점은 굳이 음악을 듣기 위해 오디오를 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광교산 자락과 이어진 능선이 집 앞으로 뻗어 있어 새소리와 바람소리, 빗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뿐 아니라 텅 빈 고요도 음악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뻐꾸기 소리가 클라리넷 소리보다 고혹적일 수 있는 것은 봄날의 적막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새소리는 자연의 스피커에 공명돼 깊고 그윽하게 울려 퍼졌다.
자연을 가까이서 누린다고 해서, 가없는 나무 우듬지를 보며 숲길을 산책할 수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자유로울 수 있어 황홀했으나 어느덧 술자리의 설왕설래가, 지인들의 안부가 그리워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보며 사람의 생애는 인(人)으로 태어나 인간(人間)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끝없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함께. 어쩌면 이 소설집은 그 과정을 추적해본 기록물인지도 모른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관계성에 대해서 나름 상상하고 갈망했던 바를 면밀하게 써보고 싶었다.
■ 책 속으로
“처자식 먹여살리는 일만이 사나이 한평생인 줄 알았는데 운수납자도 아닌 주제에 세상을 떠돌며 살다니. 그것도 매번 새 여자와 살림을 차리며…….”
“누가 아니래유.”
“아무래도 난 세상을 헛산 것 같어”.
종두 형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참, 형님도, 그런 뜨내기와 비굘 하다뉴?”
태식은 불쾌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아냐, 애들 시험마냥 뭐가 옳고 그르다 할 수는 없구먼”.
종두 형은 잽싸게 술잔을 털어 넣었다.
“죽으나 사나 주어진 땅에다 작물이나 부치며 사는 것을 최고로 알았는데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여”.
건땅콩에 비해 경작 기간이 짧고 건조 과정이 없는 풋땅콩으로 제2의 환금성 작물을 꿈꾸던 형이 아니었다. 수분이 많은 풋땅콩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농업기술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염수의 농도를 가늠하던 진중한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그가 심각해지자 콧날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내가 발버둥치며 산 것도 결국 자신을 속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구먼.”
(「박쥐우산」 36~37쪽)
덧문을 막 내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난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샛서방의 어깨에는 축 처진 팔이 대롱거린다. 그 뒤로 대여섯 발자국 떨어져 버들네가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오고 있다. 성큼성큼한 장의 걸음에 비해 절뚝거리는 버들네의 걸음은 한없이 느려터지지만 술에 곯아떨어진 채로 샛서방 등판에 실려오는 남자의 무게가 그들의 어울리지 않는 행진을 적당히 조율하고 있다. 이평댁은 알 수 없는 배신감으로 몸을 떤다.
(「복날은 간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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