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 한혜영
전화선을 타고 오는.../ 서울의 첫눈은 반칙이다//
어머머, 눈이야 눈!/ 호들갑을 떠는/ 당신은 반칙이다//
방금 전까지 청청했던/ 플로리다 하늘에
검은 맷돌을/ 사정없이 돌게 만들어버린//
민소매 차림의 나를/ 서울역/ 인사동으로 불러들이는
첫눈은,/ 당신은 진짜 반칙이다
- 시집『올랜도 간다』 (푸른사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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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20년 전 플로리다에 이주해 살고 있는 시인이 2012년 이맘때 서울의 한 후배와 통화를 마치고 곧바로 쓴 것이라고 한다.
통화 중에 “어머머, 눈이야 눈” 호들갑이 무지무지 부러웠던 게다.
올해도 지난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 때 펄펄 눈발이 날리는 걸 직접 화면으로 보았을 것이고, 어김없이 “첫눈이야 첫눈” 단체로 호들갑 떠는 것을 멀찍이서 홀로 들어야만 했다.
슬며시 시샘이 치밀어 오른 시인은 ‘당신들은 단체로 반칙이다’라며 기어이 페이스 북에다 그 심경을 토로하였다.
지난 11월 26일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기상학자들은 가을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까지를 초가을, 10월 말까지를 가을, 10월 말부터 11월25일경까지를 늦가을로 분류한다.
마침맞게 겨울이 시작되는 날 첫눈이 와주었다.
거리는 바스락거리는 낙엽들로 신산하고 들녘은 냉기 가득하다.
짧았던 지난 가을의 하루가, 한 달이 또 한 계절이 이토록 바삐 순환하는 줄 몰랐던 건 아니지만 퉁소구멍처럼 좁고 텅 빈 곳으로 가을이 죄다 빠져 나가고 눈발이 휘날릴 때에야 헛되게 보낸 시간들을 아쉬워한다.
결실을 다 나누어준 저 강산이며 뜰은 여전히 장엄한데 세월 잃고 껍질만 남은 나만 쓸쓸한 회한에 젖는다.
누구에게나 결실과 감사의 계절을 다 보낸 뒤 이만치 당도해 맞는 ‘첫눈’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한다.
‘방금 전까지 청청했던 플로리다 하늘’ 아래서 서울의 첫눈 소식을 듣노라니 단박에 ‘맷돌을 사정없이 돌려’ 시인을 서울역이며 인사동 거리로 불러 세운다.
하지만 한 쪽은 현실이고 다른 쪽은 추억의 옛 그림자이니 그것은 반칙이다.
공평하지가 못한 것이다.
장꼬방 깊숙이 동우감 두듯 감추어두었을 옛사랑을 슬며시 꺼내보기도 했겠으나 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숭늉냄새 나는 차 한 잔 나누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그리웠으리라.
인사동 골목 어딘가에서 콧잔등에 땀방울 달며 먹었던 대구탕 뚝배기 순두부도 떠올렸으리라. 펑펑 눈이 와서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부르며 ‘영영 달아나 돌아오지 않을’ 꿈을 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눈이 왔다며 서울의 지인들이 호들갑을 떨던 날 밤 배게 머리맡에 서성이던 추억들로 잠을 설쳤는지도 모른다.
‘서울의 첫눈은 반칙’이라는 시인의 이유 있는 항변은 비단 첫눈이 올 때만 발효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구실만 생기면 시시때때로 추억을 들추어내고 또 상실감 속에서도 그 향수를 스스로 삭이고 있다.
아마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도 그 수단 가운데 하나이리라. 페이스북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그리움을 두레박질 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 하겠다.
다만 목을 빼고 매일 고국을 넘겨다보는 시인에게 고국의 반칙이 ‘눈이야 눈! 호들갑을 떠는’ 정도에 그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게 못내 송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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