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공산당원 3만명 ‘일제 옥살이’ 합하면 6만년”
[짬] ‘실종작가 이태준을 찾아서’ 낸 안재성 작가
“이태준은 투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비참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그렸습니다. 평등에 관심이 많았지요. 일제말 친일 문인단체에 가입은 했으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썼죠. 그 시대 작가로서 그정도도 드문 일입니다. 조선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깊이 고민했어요. 임화는 극좌와 관념 사이를 오갔지요. 인간적으로도 이태준은 품위 있는 선비였어요. 시인 기질이 다분한 임화는 인격적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이태준에게 더 애정이 갔습니다.”
안재성 작가는 1989년 장편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뒤, 일제시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힘써왔다. 소설 <경성 트로이카>(2004)에선 30년대 이재유를 축으로 한 서울지역 노동운동 비밀결사 조직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을 조명했다. 그 뒤 <이관술 1902~1950>(2006) <이현상 평전>(2007) <박헌영 평전>(2009) 등 논픽션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회주의자들의 행적을 조명했다.
민주화·노동운동 투신 경험 바탕
1989년 ‘파업’ 전태일문학상 수상
사회주의 혁명가 삶 복원에 매진
1998년 귀농했으나 농사 수익없어
‘책 쓰면서 돈 안쓰고’ 전업작가로
자료·지원 부족해 ‘평전 문학’ 빈곤
이런 접근법에서, 문인을 택한다면 시인이자 혁명가이며 월북 뒤 ‘미제의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 임화를 먼저 고려했을 법하다. 하지만 안 작가는 최근 펴낸 <실종작가 이태준을 찾아서>(푸른사상)에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태준의 삶과 문학을 들여다봤다. 이태준은 이상·정지용·박태원 등이 참여한 구인회의 좌장이었다. 구인회는 이른바 순수문학 단체였다. 그의 단편들은 독자의 감정선을 강하게 자극하는 비애감과 당대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묘사로 소설 창작의 깊이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해방 뒤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해 월북한 것을 두고 뜻밖이란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북에서 소련파가 실각한 56년 쫓겨나 교정원·고철수집 등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이태준의 단편 가운데 ‘밤길’과 ‘촌뜨기’를 좋아합니다. 당대 조선인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노동자의 일당, 떡값 등의 구체적인 액수까지 써가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죠. 너무 마음 아픈 이야기들이라 잊히질 않아요.”
지난 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안 작가는 인간 이태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집회 사회자로 자주 등장하는 그를 눈여겨보면서”라고 했다. 그는 이태준이 북에 남기로 결정한 순간 “작가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했다. “이태준 개인에게는 잘못된 선택이었죠.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20세기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잘못이라고 봐야지요. 이태준은 겉모습만 보고 (북으로) 갔어요.” 그렇지만 “이태준은 월북 저명작가 30명 가운데 (김일성 체제에 대해)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얘기했던 드문 사람이며 김일성 우상화 작품도 쓰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안 작가는 지금 경기도 이천에서 글쓰기와 강의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98년 포클레인을 끌고 귀농해 복숭아 농사를 5~6년 했지요. 힘만 들고 돈은 안돼 고생고생하다 글만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해 지금은 ‘책 쓰면서 돈 안 쓰고’ 살고 있어요.”
그가 살아온 삶을 보면 일제 때 노동운동가에 대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유신체제 말기인 79년 여성노동자 김경숙씨 사망까지 빚은 와이에이치(YH)무역 노조 농성에 대한 폭력진압 사건을 보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뒤 20여년 동안 민주화·노동운동 현장을 지켰다. 강원대 축산학과 3학년 때인 80년 서울에서 광주의 비극을 알리려다 구속된 것을 포함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83년 군 전역 뒤엔 구로공단과 탄광 지역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노동인권회관 간사,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들여다보았어요. 이재유나 이현상 같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들도 사실은 노동운동가들이죠.”
그는 일제시대 사회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했다. “해방 뒤 조선공산당이 1년 정도 합법적으로 활동했죠. 당원 3만명의 일제 때 감옥살이 기간이 모두 6만년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조선공산당 그룹은 우리 4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등주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어요. 이들의 강령엔 지금 헌법의 기초가 되는 민주주의 제도를 포함해 국민연금·의료보험·퇴직금 제도 등이 다 들어 있어요. 당원이나 지도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안 작가는 조만간 <잃어버린 한국현대사>란 책도 펴낸다. 해방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15명을 포함해 지도부 19명을 각각 원고지 100매 분량으로 그렸다.
그는 ‘이태준 평전’이라기엔 밀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해 제목을 피했다. “일본이나 서구를 보면, 한 인간이 살던 집이나 물건 등을 그대로 보존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걸 토대로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오스트리아) 같은 이들이 쓴 위대한 평전이 나온 거죠.”
그가 특히 관심을 갖는 사회주의 계열 인물들의 자료는 더욱 없다. 일제강점기 재판 기록이나 주변인물 토막증언 정도다. 남로당 간부로 한국전쟁 발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이주하는 재판 기록조차 찾을 수 없다. “이달 나올 약전에서도 애초 25명을 다루려 했으나 자료 부족으로 일제 때 7년 옥살이를 한 김점권 등 6명은 다루지 못했어요.”
왜 우리 출판계에선 제대로 된 평전을 찾아보기가 어려울까.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 전기를 내면서 저자에게 400만원을 지원해요. 얇은 책 한권이 나오더군요. 전공 연구자들이 논문 실적 같은 부담에서 풀려나 제대로 지원을 받으면서 한 인물을 천착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국가나 연구기관에서 앞으로도 내가 쓰려는 인물에 대해선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겨례 / 2015.11.11 /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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