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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미디어서평

[국제일보] 박정선, <백년 동안의 침묵>

by 푸른사상 2015. 7. 7.

박정선, <백년 동안의 침묵>, 국제일보, 2015.6.16.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5> 부산 작가 박정선의 '독립운동'

묻혀있던 '우당 6형제'의 독립운동사 발굴…4년간의 집필로 생생한 복원

 

 

- 망한 조선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 
-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일대기 그려 
-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로 극찬 
- 잊혀져간 가문 '100년 삶' 재조명 

- 지인에게서 이야기 듣고 전율한 
- 박정선 '백년 동안의 침묵' 집필 
- 사실적인 스토리텔링 추적 완성 
- 펜으로 쓴 조국애 작가정신 발로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67년 '백년 동안의 고독'을 썼고, 부산 작가 박정선(64)은 2011년 '백년 동안의 침묵'(푸른사상)을 썼다. 둘 다 장편소설이다. 마르케스는 서구 열강에 수탈당하는 한 마을의 100년 간에 걸친 몰락사를 그려낸 반면, 박정선은 일제 침탈에 저항하는 독립운동 가문의 잊혀진 100년을 조명했다.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디테일을 부각시켰다면, 박정선은 사실적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삶의 진실을 추적했다. 


#나는 써야 한다  

   
박정선 작가는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백년 동안의 침묵'을 썼다고 했다.

외세에 의한 억압과 저항, 100년이란 시간성이 포개지기는 해도 두 작품은 엄연히 다르다. 마르케스는 작품 구상에 5년을 보냈고 18개월 동안 칩거하며 매일 8시간씩 집필한 끝에 탈고했다고 한다. 박정선은 2년 간 자료조사하고 2년 간 거의 매일 8~10시간씩(길 땐 16시간)을 쏟아부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박정선은 책을 낼 때 지역출판사조차 외면했을 정도로 홀대를 받았다. 

비슷한 제목의 작품을 동열에 놓은 건 비교우위를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학의 진정성, 치열한 작가정신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지난해 4월 타계한 마르케스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인기나 명예가 아니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겠다거나 불후의 명작을 남기려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친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글을 썼다." 박정선의 얘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써야 한다. 팔리고 안팔리고는 둘째 문제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평가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쓰는 건 나의 존재 이유다." 

'백년 동안의 침묵'은 독립투사인 우당 이회영(1867~1932)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명문가 출신인 우당과 그의 6형제가 온몸으로 보여준 행동과 실천은 가진 자, 배운 자의 명예와 도덕적 의무를 통렬하게 일깨운다. 노블레스(고귀한 신분) 오블리주(솔선수범)의 전형적 사례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저절로 피가 뜨거워진다. 독립운동사의 갈피에 이런 절창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470쪽의 묵직한 장편임에도 한번 책장을 펼치면 덮지 못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박정선의 힘이다.


#만주 벌판 달리는 12대 삼두마차  

마침내 한일병합 조약(1910년 8월29일)이 선포됐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황현 민영환 한규설 등이 자결했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서울의 저동 이유승 대감 집은 침묵에 빠졌다. 방안엔 서열대로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6형제가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회영이 입을 열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할아버님의 후손된 도리로서 그동안 나라의 큰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해야할 줄 아옵니다…."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6형제는 이회영의 간절한 제안에 따라 중국 집단 망명을 결행한다. 토지와 재산을 처분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모두 40만 원(현 시세로 약 600억 원)이 모아졌다. 가노(家奴)들도 따르겠다고 했다. 우당 6형제의 가솔 60여 명은 야음을 틈타 12대의 삼두마차에 나눠타고 비운의 조국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열 두 대 삼두마차가 전열을 가다듬고 일렬 종대로 줄지어섰다. 중국 마부들이 채찍으로 엉덩이를 후려치자 말들이 땅을 박차며 험난한 형극을 향해 만주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36마리 144개 말발굽소리가 기관총을 연발 사격하듯 황량한 만주벌판을 비장하게 흔들었다. 앞만 보며 어둠 속을 헤치는 말들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군대를 방불케했다. 군대였다. 그것은 침략자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통렬한 광복군이었다…'.(131쪽)

영화의 한 장면같은 이 묘사는 실은 험난한 형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낯설고 물 선 만주 봉천 땅 추가마을에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우당 일가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당의 이곳 활동은 향후 30여년 간 펼쳐지는 만주 독립운동의 씨앗이 된다. 우당이 형제들의 지원 속에 이동녕 신채호 등과 함께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0년 동안 3500여 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나 봉오동전투 같은 숱한 항일 무장투쟁의 전위부대를 형성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우당은 선각자였다. 을사늑약 뒤인 1907년 우당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이상설·이준·이위종을 고종에게 추천해 성사시켰다. 그는 또 중국 혁명작가 루쉰과도 국제 아나키스트 운동을 매개로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우당이 말년에 심취한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 정의, 지방분권, 비정치적 협동 사회를 지향해 독립 조국의 이상향처럼 인식됐다.

우당은 감성적 휴머니스트였다. 북경에 머무를 때 그는 추위와 배고픔을 끌어안고 묵란(墨蘭)을 쳤다. 혹독한 북경의 나날들이 묵란 속에 잦아들었다. 중국인들이 묵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묵란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묵란, 일명 석파란(石派蘭)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거쳐 우당으로 이어졌다. 우당의 묵란은 예술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준 드문 경우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지난 5월 광주에서 열린 '우당 6형제전'이 큰 감동을 자아낸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라는 전시 제목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1932년 11월 17일 우당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조국해방이 묘연할수록 더욱 불타올랐던 독립투사의 신념과 희망이 그렇게 스러졌다. 우당의 6형제 가운데 5형제가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에 영웅적인 '칼레의 시민' 6명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우당 6형제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란 점에서는 우당 6형제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마르케스가 박정선의 소설을 읽었다면 '전율할 인류의 극적 드라마'라고 말할 것도 같다.

월남 이상재는 말했다. "나라가 해방되는 날 국가는 우당 가문의 재산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그러나 재산을 돌려주기는커녕 조국은 우당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2000년 이후부터 우당 평전과 TV 다큐물이 제작되어 소개되었으나 독립운동사에서 우당의 존재는 여전히 낯설다. 보물이 깊이 묻힌 법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일일까. 


#작품으로 보여준 독립운동  

박정선이 '100년'이란 시간의 더깨를 털고 '침묵'을 깨운 것은 작가정신의 발로다. 그는 지인에게서 우당 6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온몸이 떨려왔다고 했다. 비장한 울림, 전율하는 감동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어떤 금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조심 조심 들추며 썼다. 한민족의 혼과 쓰라림, 사무치는 조국애와 고요한 순국의 길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다룰 주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새로워진 21세기에 작가는 이 악물고 소설로 독립운동을 한 거다. 애국심이란 말조차 낯설어지는 이 시대에 '독립'이란 화두로 죽비를 내리친 것이다.

소설은 출간 후 꾸준히 팔려 최근 3쇄를 찍었다. 2012년엔 문체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됐고, 입소문이 퍼져 '꼭 읽어야 할 작품'이란 평가도 얻고 있다. 홀로 '독립운동'을 해온 보람이 있다. 무엇보다 지역작가가 지역에서 고군분투해 이룬 결실이어서 더욱 값지다.

작가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우당과 그의 6형제가 모든 것을 던져 얻으려 한 게 진정 무엇이었을까.

"조국독립? 그것도 맞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한민족의 휴머니즘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닐까. 우당이 말년에 추구했던 아나키즘의 가치, 즉 자유 평등 정의도 거기에 닿는다."

-후기에 '조국이여 다시는 영웅을 만들지 말자!'고 썼다. 무슨 뜻인가.

   
"탈고 후 우당이 살았던 서울 명동을 갔다. 우당 가문의 상징인 선비목(은행나무)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곳 후원에서 6형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초라한 기념비 하나-. 이게 우당을 기리는 전부인가 싶어 매우 안타까웠다. 영웅이 떠난 자리가 너무 허전했다.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좋은 세상이다."  

chpar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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