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소개
푸른사상에서 나온 장편소설 『표현형』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생물학 용어에서 차용한 것으로, 저자는 생물이 유전적으로 나타내는 형태적, 생리적 성질의 환경적 발현, 즉 유전자에 의하여 결정되는 형질이 표현형으로 나타나는 표현형 발현에 초점을 두고 사회적 시대적 조건에 따른 인간 유전자의 개인적 발현을 이야기합니다. 등장인물이자 글을 쓰고 있는 가공의 저자는 프랑스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아 금의환향했지만, 비정규직 강사의 신분으로 직업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해야하는 소위 삼포세대이자, 벌이는 보잘 것 없으되 시간적으로 여유를 누리고 사는 연구직 세대입니다. 그렇지만 컴퓨터 자판은 그를 저버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세상으로 남았고, 그는 하릴없이 동류항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유전형과 표현형 사이를 신기해하며 감탄하곤 했고 그 모든 것들을 가두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꼭지 「배달민족」에서부터 디아스포라의 방향으로 세계 도처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인의 한국으로의 엑서더스를 통해 유입된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도 들어있습니다. 각각 나누어 읽어도 이해되는 느슨한 엮임으로 해서 장편 읽기의 부담을 덜 수 있을 이 소설이 귀사의 소개로 많은 독자들과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글자, 글자들이, 내가 만들어낸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 폴더에 파일에 숨어서 죽은 듯 쑤셔 박혀 있다. [……] 컴퓨터 자판은 나를 저버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세상으로 남았고, 나는 옆길로 새며 숨길을 텄다. 직접적인 계기는 독일로 형을 찾아 떠났다는 배승한 교수 - 젊은 나이에 전임이 되어 우리 강사들의 로망인 그 - 가 아무런 설명 없이 보내오는 독특한 메모들 때문이었다. 형의 추정 아버지, 그 아버지의 추정 아버지……. 그에게서 소식이 뜸할 때면 하릴없이 동류항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신기해하며 감탄하곤 했다. 그 모든 것들을 가두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는 서둘기로 한다. 죽어 널브러진 글자들을 퍼 내버리자. 이 이상한 대리 역할 -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관해서 어설픈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살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꿈틀거린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사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진부한 것은 생이 아니라 이런 글자들이다. 일단 열한 개 꼭지를 내다 버리자. 이것들이 인쇄되어 확실히 사라져버리면 나는 껍데기를 벗듯 자유로워질 것이다. 어쩌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만일 인간이 난다면 박쥐처럼만 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둘 다 육지에서 살고 있는 유태반수류, 태반이 있고 항문과 비뇨생식기가 구분되어 있는 짐승이다. 박쥐의 경우 앞다리가 날아다니기에 알맞은 가죽날개로 변하였고, 손가락도 길게 늘어난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엄청 발달한 날개로 새 중에서도 빠른 칼새에 도전할 정도라고도 한다. 나는 물론 속도를 내어 날아보려는 꿈은 꾸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를 퍼 나르는 데 날개를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할 뿐이다. 물론 왜 하필 새 중에서도 피를 빠는 흡혈귀와 비견되는 박쥐냐고 누군가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박쥐가 사람과 가장 가까운 새라서 그렇다. 게다가 젊은 시절 내내 공부라는 귀신에 씌어 산 사람들은 대개 밤을 지새우며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점에서 야행성 박쥐와 닮아있다. 공부라는 것이 남의 기존의 지식을 - 몇 천 년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것도 결국 남의 것이니 -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피를 빠는 박쥐와 무에 다르랴.
내 귀는 레이더. 귓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소리를 듣자. 잘 들으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내 귀가 막혀서 소리를 듣지 못하면 필경은 박쥐가 그러듯이 날지 못할 것이다. 내 글의 등장인물들로부터 반사하여 오는 공기의 진동을 귀로 감수하여 그들에게 부딪히는 일은 삼가자. 그들에게 부딪혀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물론 나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일단은 날자, 밖으로, 멀리. 나의 미토콘드리아를 복제해내기 위한 마땅한 유전자형의 개체를 찾아서. 의학이라는 인공적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복제 생산이 가능한 지금.
이순규 - 동병상련의 시절 만났던 - 너는 다시 한 번 나를 불러야 한다, 나를 불러다오. 나는 글자들의 껍질을 벗고서 누군가 사람에게로 날아가고 싶을 뿐이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에게 뭔가 빚을 진 느낌이랄까. 무엇인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딸을 낳아야 한다. 낳고 싶다. 글을 버리고, 너무 늦기 전에.
- 가공의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2. 저자약력
서용좌
이화여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현 전남대학교 독문과 명예교수. 『소설시대』에 「태양은」으로 등단하여, 장편소설『열하나 조각그림』, 연작소설『희미한 인(생)』, 소설집『반대말ㆍ비슷한말』등이 있고, 이화문학상, 국제펜 광주문학상,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3. 도서목차
머리말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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