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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시선

정운희, 안녕, 딜레마

by 푸른사상 2014. 5. 15.

 

 

 

 

 

 

1. 도서소개

 

 

정운희 시인의 첫 시집인 『안녕, 딜레마』가 <푸른사상 시선 39>로 출간되었습니다. 나와 나 아닌 것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관계들. 그 속에서 시인은 서로 혹은 홀로 타인과 사물들의 경계를 분주히 들며 나며 올곧거나 삐딱하게, 또는 순정하거나 발칙하게 어떤 관계를 꿈꾸기도 합니다. 정운희 시인의 첫 시집은 ‘사이의 꿈’에 대한 시적 주체의 지향이 얼마나 간곡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이의 꿈’을 꾸는 자에게 가족 관계만큼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의 편차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도 드물다. 그것은 가족의 사이가 ‘홀로’와 ‘서로’라는 무한대의 진폭을 갖기 때문이다.


문은 고통 없이 잠겨 있다


가장자리부터 녹슬어가는 숨결을 품고 있는지
언젠가 제 몸이 녹의 일부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악몽을 배설해야 한다

느닷없이 선반 위 유리컵이 떨어지듯이
느닷없이 손목을 긋고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그곳에서 분노와 상처를 해결하고
녹을 꽃처럼 피워내 안전하게 내부로 들어가기를
강 속 같은 몽상의 방에서 피고 지기를 여러 날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았다
실금 간 유리처럼
아들은 단순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꽃을 해결하듯 수음을 즐기고
오래도록 잠을 청하기도 했다
잠깐 흐느끼는
음악 소리로 부풀려지기도 하는 방

문은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

내부에서 피고 지는 파편들이
또다시 방의 실명을 증명하듯
제 스스로 염원해 갈망하는 것이다
방문은 고정된 액자처럼 흘러가고
녹을 잠식시킨 풍경들은
제 궤도를 벗어나 조금씩 이동한다
                                                      ─ 「아들의 방」 전문


시작부터 ‘아들의 방’은 잠겨 있다. 그의 방은 “분노와 상처”로 한껏 부풀고 있다. 아들의 “분노와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느닷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치명성을 배가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닫힌 방문은 가족 관계의 단절을 표상한다. 여기서 문제는 아들의 방문이 “고통 없이” 잠겨 있다는 데에 있다. 닫힌 방문 바깥에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자에게 “고통 없이” 닫힌 방문은 오히려 격렬한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한 고통은 표층적으로 닫힌 방문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아들의 무심함’에서 유발되고 있다. 물리적 거리 배면에 내재한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인식이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 관계의 단절을 바라보는 두 주체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나비의 ‘손짓’으로부터 우리는 ‘사이의 꿈’을 가족 관계 바깥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사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경우, 이를 테면 ‘수리공’과 같은 낯선 이의 방문처럼 우연에 의해 하나의 공간 속에 두 주체가 존재할 때, 둘 사이의 시적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태초의 말씀을 타고 어둡고 환한 빛이 여러 날 번갈아가며 흘러들었다 나라는 이름의 문을 열기 위해 한평생을 달그락거렸다 이따금 그 문을 열어 몸의 방향을 바꿔놓았으며 계절을 바꾸고 노아의 방주에 선택된 암수 동물 한 쌍처럼 소리들이 자랐으며 먼지와 바람이 들락거렸다 홀로 있겠다면 홀로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마주보며 평생을 서서 늙어가는 나무도 있다 각기 다른 자궁에서 태어났으나


부드럽게 접근할수록 강하게 완성된다 집중적이지만 공격적이지는 않다 몸에 바탕을 익혀 손끝에 숨겨 놓은 길을 신중하게 감지해야 한다 천기를 누설해도 안 되며 불온한 자들을 따돌려야 한다 배신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므로 서로는 서로에게 깊숙해져야 한다 차갑고 단단할수록 아이는 따듯하게 늙어갈 사랑을 낳을 것이다 내가 너를 이토록 원하고 있으므로 가까이 더 가까이 깊숙이 더 깊숙이 끝장을 봐야 한다
                                                                  -「볼트와 너트」 전문


삶이 “나라는 이름의 문을 열기 위해 한평생 달그락거”리는 일이라면, 그의 실존은 “홀로 있겠다면 홀로 있는 것”의 사태 속에서 구성된다. 이때 ‘쌍’을 이루는 일은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마주보며 평생을 서서 늙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독자로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 아니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서로’의 임계점을 보여준다. 각자 “다른 자궁”에서 태어난 자들의 좁힐 수 없는 사이를 물리적 거리라고 하자. 문제는 이 물리적 거리를 절대적 거리로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단자(單子)로서 주체가 물리적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리적 거리와는 다른 차원의 사이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 거리를 시적 거리라고 하자. 볼트와 너트라는 친숙한 두 사물이 ‘사이의 꿈’을 위한 비유가 되는 것은 여기에서부터이다.
볼트와 너트의 사이는 “부드럽게 접근할수록 강하게 완성된다”에 축약돼 있다. 양자 사이의 견고한 결속은 부드러운 접근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서라면 “몸에 바탕을 익혀 손끝에 숨겨 놓은 길을 신중하게 감지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는 “서로는 서로에게 깊숙해져야 한다”에서 ‘해야 한다’라는 당위(當爲)가 요구되는 이유를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너를 이토록 원하고 있으므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이의 꿈’에 대한 주체의 강력한 욕망이다. 견고한 ‘쌍’을 이루려는 욕망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의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 곧 실존의 세계에 당위의 세계를 도입하려는 의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깊숙이 더 깊숙이 끝장을 봐야 한다”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당위로서 표출된 주체의 욕망의 절박함이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의 간극, 실존과 당위의 격차, 그것은 정운희 시집의 전체에서 ‘홀로’와 ‘서로’라는 이름으로 변주되어 ‘사이의 꿈’으로 현상한다. 그것이 얼마나 아슬하고 절박한 것인지는 관계의 두 극점 사이에서 ‘시적 거리’가 취하는 장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 저자약력

 

정운희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2010년『시로 여는 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3. 도서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볼트와 너트
아들의 방
늙은 몸의 길
셀프 인터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새를 수정하다

카톡, 카톡
그냥
그녀의 등식
12월
가을이 툭
편견
가벼운 포스터


제2부

슬리퍼에 대한 은유
블라인드
혹은, 넘어지는 술병의 입구
데칼코마니
수리공과 장미
소년의 형식
한낮의 체위
설탕
면면
무설탕으로
불안에 관한 보고서
소문
윙크
아들의 여자
시적 거리


제3부

평일 감정
고양이 입장에서 보면
방치
하등에서 고등으로
忌日
파도치는 식탁
바람을 꿰매는 여자
꽃들의 장례식
봄날
사월
혼잣말
페이소스
도플갱어
도서관 가는 길
남아 있는 저녁


제4부

꽃샘추위
오래전 연애
농담
유월
허수아비처럼
완장
동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릭, 투데이
사랑, 시뮬레이션
안녕, 딜레마
그곳엔 그녀가 없다
힐링아트
오빠들
오후 3시, 고구마가 삶아지는 동안

해설 발칙한 꿈과 불안의 힘-장철환

 

 

 

4. 추천의 말

 

개인의 기호와 감식안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지겠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장과 아우라를 갖는다. 대체로 그러한 시들은 다양한 색으로 분광하면서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고 시간의 폭력을 견대는 내구력이 강하다. 정운희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의 언어는 단일하지 않다. 대개 단일한 언어가 갖는 한계는 일원적 세계에 발이 묶여 운신의 폭이 좁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금을 다시 만드는”(「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정운희의 시는 상상의 보폭이 넓고 다양한 변주와 이미지의 활용에 능하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미학을 갖춘 결과일 것이다. 그러한 능력으로 세계를 재해석하고 어떤 예기치 않은 것, 인식되지 못한 것들을 시 안에 견인할 때 그의 시는 낯설고 풍요로운 시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 홍일표(시인)



가령, 당신들의 방은 꿈이다. 그 방에서 너무 아름다운 꿈을 꾸고 깨어나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텅 빈 방을 바라볼 때 그것은 불안인가 황홀인가? 꿈인가 그런 것이다. 불안을 삼키고 황홀을 배설하거나, 황홀을 삼키고 불안을 배설하는 일. 그러므로 “악몽을 배설해야” 하기에 황홀한 “수음을 즐기고 오래도록 잠을” 자는 동안 잠깐씩 흐느끼는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또 불안인가 황홀인가? 우리는 이 아찔한 아이러니 혹은, 딜레마에 끝없는 의미 부여를 하려 한다. 그렇게 덧없이 생을 흘려보낸다. 시인은, 어떤 시간이 하나의 풍경이 되기 위해서는 불안과 황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라고, 아니 “각기 다른 자궁에서 태어났으나” 생의 음악이 완성되려면 “부드럽게 접근할수록 강하게 완성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 선명하고 강렬한 음악을 위해서라면 “더 가까이 깊숙이 더 깊숙이 끝장을 봐야” 한다고 외친다. 어쩌면 깊은 음악의 늪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지난 계절을 벗어나기 위해서 생은, “위험한 안부를 전”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중심에서 울리는 아득한 소리들” 흐느끼는 음악의 목소리로 - 안녕, 딜레마.
                                                                                           - 배용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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