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인간문제>, 경인일보, 2014.3.20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0]강경애 '인간문제'
부두·방직공장 땀내나는 인간의 고뇌
그녀가 '노동자 도시' 인천을 쓴 이유
1934년 신문에 120차례 연재
공간과 장면 사실적 묘사
외리 3번지·사정 5번지…
동양방적 모델 공장도 실감
여직공들 근무조건도 상세
직접 와보지 않고 쓰기 어려워
간도에 살던 중 잠깐 머문듯
사회주의자 남편 영향 느껴져
황해도서 시작해 공간 확장
인간 본질 지적 '인천 형상화'+
인천은 '노동자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아 오는 '외지인'의 발걸음이 19세기 말 개항 이후 끊이지 않았다.
농촌에서 부칠 땅이 없고 빌어먹을 것조차 마땅치 않았던 사람들, 지주의 등쌀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에 몰려들었다.
193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의 중심에는 '돈 받고 일하는 살기 좋은 땅' 인천이 있었다.
남자들은 일용직으로 부두에서 짐을 부렸고, 어린 여성들은 방직공장에 들어갔다. 강경애(姜敬愛·1906~1944)의 '인간문제'는 이런 인천을 잘 보여준다.
'인간문제'는 중국 간도에 머물던 젊은 여류 작가에 우리 문단이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인천은 근대 노동 운동을 상징하는 도시가 돼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문학의 소재로 차용된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선비, 첫째, 신철 등이고, 배경은 황해도 용연(장연), 서울, 인천 순서로 이어진다.
▲ 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은 일제가 1934년에 인천 만석정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방적을 모델로 삼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사진은 동양방적의 후신인 동일방직 전경. /조재현기자
선비는 "얼굴빛은 좀 푸른 기를 띠었으나 티 없이 맑은" 여성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지주(정덕호)에게 스무살에 정조를 잃고 고향을 떠나 인천 방적공장에 취직한다.
이 공장에서 "덕호와 같은 수없는 인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자각하지만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세상을 뜬다. "술 잘 먹고 사람 잘 치기로 유명한" 첫째는 어려서부터 선비를 좋아한다. 신철은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엘리트 청년으로 덕호의 딸(옥점) 집에 놀러왔다가 선비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첫째는 지주에게 억울하게 땅을 잃고 배 곯며 살다가 "돈 받고 일하며 살기 좋은" 공장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인천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한다.
신철은 부잣집 외동딸 옥점과 결혼하라는 부친의 말을 거역하고 서울 집을 나와 "노동자의 씩씩한 참 동무가 되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인천에 간다.
신철은 우연히 첫째를 알게 되고 첫째에게 계급의식을 심어준다. 인천에서 첫째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변모한다. 반면 신철은 사상전환을 한 뒤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 많은 계집"을 얻는다.
강경애 인간문제는 1934년 8~12월 동아일보에 120차례 연재된 신문소설이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군데군데 복선이 깔려 있어 책을 읽는 게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공간과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특징이다. 1930년대 인천이 소설에 그대로 겹치는 것도 흥미롭다. 작가가 직접 와 보지 않았으면 쓰기 어려울 것들이다.
# 인간문제 속 인천
신철은 인천 '외리 3번지'에서 노동운동가 철수를 만난 뒤 '사정(寺町) 5번지'에 정착한다. 외리 3번지는 현재의 율목동으로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부근이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1920년대까지 이 지역에 직업소개소가 많았고, 현재 율목동 54에는 일용 노동자들이 묵는 공동숙박업소가 있었다"고 말했다.
신철이 집을 얻은 사정 5번지는 지금의 답동성당 주변이다. 소설에서 신철은 첫째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줄 때 '사정으로 올라가누라면 천주교회당이 있지요. 그 집을 지나 공동변소가 있지유. 그 우에는 장작 패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바루 그 우에 조고만 초가집이 있지우. 그 집 뒷방이 바루 나 있는 방이오'라고 말한다.
신철이 부두 노동시장에 나갔을 때 십장에게 붉은 끈(일표)을 받고, 하루 품삯을 받는 장소는 옛 인천세관 부근(중구 항동)이다. 여기서 신철의 집까지 가는 길 사이에 서양식 술집인 '킹바아'가 등장한다. 지금의 신포동 청실홍실 자리다.
'인간문제'에 나온 대동방적공장은 일제가 1934년에 인천 만석정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방적을 모델로 삼았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공장 묘사가 생생하다.
고치를 삶는 가마도 서울서는 대개 세숫대야만 하고 와꾸도 하나였는데, 여기 것은 가마가 장방형으로 길게 되었으며 서울 가마의 10배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와꾸도 한 사람 앞에 10여 개 내지 20개까지 쓰게 된다고 하였다.
이 공장에는 여러분의 장래를 생각하여 저금 제도를 맨들었소. 저금은 인생의 광명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은 노동만 하면 공장에서 밥을 먹여주고 일용품을 대주고 나머지는 저금을 시켜주니...
이밖에도 당시 동양방적 여직공들의 근무 조건이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동양방적의 후신인 동일방직에서 1970년대에 일한 최연봉(59) 인천남구자원봉사센터장은 "우리 때에도 회사에서 직공들에게 의무적으로 신협 통장을 개설하게 했다", "공장 일이 힘들어 최근에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 부두 노동시장에서 신철의 집까지 가는 길 사이 서양식 술집인 '킹바아'가 등장하는데 지금의 신포동 청실홍실 자리다. 사진은 신포동 일대 거리. /조재현기자
# 강경애와 인천
강경애가 인천에 언제 왔고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수의 연구자들은 강경애가 1931년 남편 장하일과 간도에 가기 전 잠깐 인천에 기거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동양방적 공장은 1932년 말에 건립이 확정됐다. 강경애는 동양방적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었을까.
강경애 연구에 정통한 중국 중앙민족대 최학송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간도에 살던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연재하기 전인) 1934년 7월 20일경 조선에 한 번 다녀오는데 그때 인천에 들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강경애가 1936년 발표한 전기적 소설 '산남'에서 "지금으로부터 이태 전 칠월 이십일경에 돌연히 나에게 전보 한 장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내 어머님의 병환이 위중하니 곧 오라는 것입니다"는 내용을 근거로 최학송 교수가 추정한 것이다.
최학송 교수는 또 "남편 장하일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하일은 해방 이후 북에서 황해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노동신문 부주필을 지냈다. 장하일은 강경애 소설의 첫 독자로 영향을 미쳤다.
1935년을 전후해 '인천에서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직한 인천적색노동조합이 공장뉴스 등의 출판물을 간행해 동양방적 등에서 노동자들을 의식화·조직화'했다는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는 기록은 '인간문제'의 내용과 연결된다.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한 조직이다. 최학송 교수의 말을 종합해보면 강경애가 간도에서 남편과 그 지인들을 통해 또는 1934년 인천을 방문해 소설 집필에 앞서 사전취재를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연재하기 전 작품 줄거리를 '삶에 허덕이는 조그마한 농촌의 생활 현실을 그리어' 내는 것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인간문제'의 영역은 황해도 시골 마을을 넘어서 인천까지 확장한다. 연재소설 예고에서 강경애가 말한대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포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요소와 힘을 구비한 인간이 누구며 또 그 인간으로서의 갈 바를 지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형상화한 공간이 인천이었다. '인간문제' 이후 80년이 지난 인천, 그 인천의 현재적 '인간문제'는 무엇일까.
글 =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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