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류--문학(시)
카뮈에게 예수를 빼앗기다
박영욱 지음|푸른시인선 32|130×215×8mm|120쪽
15,000원|ISBN 979-11-92149-72-1 03810 | 2026.3.20
■ 도서 소개
흐르는 시간을 의식하며 그 감성을 드러낸 시
박영욱 시인의 시집 『카뮈에게 예수를 빼앗기다』이 푸른생각의 푸른시인선 32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일상의 사물에서 지나간 시간 속의 기억을 길어올리며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지를 소박하면서도 진지하게 성찰한다.
■ 저자 소개
박영욱(朴永旭)
1956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 중문과를 졸업한 후 세화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글쓰기를 권유했던 아버지(시인 박두진) 말이 떠올라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산문집 『나무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진다』, 시집 『유년의 그리움』, 『정적이 깨지다』(2024년 문학나눔 도서), 『부암동 빵집』 등이 있다.
■ 목차
1부 구름 가족
소래풀꽃 / 어둠 / 흙냄새 / 찬조가(讚鳥歌) / 그노시엔느 / 빈터 / 비 / 배신(背信) / 하늘에서 우울이 내려온다 / 이승 / 들판 / 경계선 / 구름 가족 / 경동시장 / 겨울 강 / 행로
2부 또 다른 봄
분만실 / 카뮈에게 예수를 빼앗기다 / 식물의 자제력 / 기억 속으로 / 물을 보다 / 저녁노을 / 겸손 / 지난 사랑 / 또 다른 봄 / 사자와 남자 / 아! 행복했던 순간이었네 / 풀길 / Thanks / 어둠 속에서 / 산길Ⅰ / 산길Ⅱ
3부 기분을 바꿔주세요
사랑이 무너진다 / 허무가 사라져줄까 / 검은 구름 / 서광(曙光) / 슈베르트 G플랫 / 고독사 / 남매 / 하얀 평화 / 단양 강가에서 / 기분을 바꿔주세요 / 산앵두 / 살아 있음의 강렬한 증거 / 내려다보기 / 메마른 노인 / 소생 / 응시 / 욕정
4부 회상
길 꽃 / 안양천 왜가리처럼 쓸쓸해지다 / 밀어(密語) / 개별꽃 / 숫눈길 / 고원(高原)에 가다 / 아침은 싱싱하다 / 붉은 산수유 / 한여름 밤의 꿈 / 비밀 / Ah! Jeannie Seely / 회상 / 우리에게는 / 폭우 / 세상 / 연초(年初) / 수수하게 살고 싶네
작품해설:흐르는 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_ 박덕규
■ 自序
멈출 줄 모르고
흘러만 가는 시간 속에서
낮밤으로 감성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이쯤에서 그쳐도
‘자서’라는 이름의 글이 될까…
■ 작품 세계
박영욱의 시는 일상의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물들,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추억에 젖기도 하고 그 생기에 취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에 내재하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함으로써 남다른 시적 영역을 확보한다. 그 과정에서 ‘산책하기와 바라보기’ 또는 ‘소요와 응시’라는 시작 방법론을 견지해 “낮밤 분간 없이 풍기는 허무의 냄새”(「허무가 사라져줄까」)나 “가끔씩 꿈틀대는 범속한 마음의 동요”(「Thanks」) 등의 내적 갈등의 시간을 겪게 된다. 그 일은 어떻게 살아내야 결국 “세상이 주는 무언가의 선물을 / 한 움큼씩 받아 들고 떠나게”(「세상」) 될 것인가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면서 독자를 깊은 사색으로 이끌고 있다.
― 박덕규(시인,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카뮈에게 예수를 빼앗기다
지난밤 꿈을 떠올리며
무심히 산길을 걷다가
낚싯줄에 망둥이 걸리듯
얼핏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걸려들었다
예수는 내 삶 속에서
진정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외로울 때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
내게 세상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올 때
내게 신나는 일이 생겨서 가슴이 벅차오를 때
나는 예수를 바라보았던가
나는 어쩌다가
인간 카뮈에게 예수를 빼앗긴 것 같다
내 안의 예수는
어느 날 알제리의 사막 너머로 떠나갔다
내 탓이었을까
카뮈의 탓이었을까
아니면, 예수의 탓이었나?
내 안에 예수가 있기는 했었을까…
아! 행복했던 순간이었네
자질구레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지난 세월을 떠올리다가
퍼뜩 막 지어낸 솥밥이 생각났다
언제부터인지 잡곡밥을 먹네
현미밥이 좋네들 하지만
어린 시절 가끔씩
솥으로 방금 지어낸 하얀 쌀밥에
간장과 달걀을 넣어
정성껏 비벼서 먹던 일은 잊을 수 없다
너무나 맛있어서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다
기름 냄새 고소한 김에 싸서 먹지 않아도
눈처럼 희고 뜨거운 쌀밥의 감미는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를 전율시켰다
그때의 행복은
그냥 어쩌다 말하는 행복을 넘어선
산꼭대기처럼 높은 행복이었다
출렁거려 넘쳐나는 큰 파도와 같은 행복이었다.
응시
산길에 누런 낙엽들이 수북하다
한때 초록의 진수를 뽐내던 이파리들이
구겨진 옷처럼 꾸깃꾸깃해졌다
바람이 몰려오니 누런 이파리들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작정을 못 한 채
그저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하늘을 거느리던 오후의 태양이
제풀에 기운이 빠졌는지
상수리나무 높은 가지 위에는
뿌연 햇살들이 비틀거리고 있다
까마귀들의 거친 절규도
무엇에 삼켜버린 듯 사라졌다
전혀 진기한 자연현상이 아닐 텐데
바위 위에 엎드린 짐승처럼
나는 이 광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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