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
최일화 지음|푸른사상 시선 193|128×205×7mm|120쪽|12,000원
ISBN 979-11-308-2163-4 03810 | 2024.7.16
■ 시집 소개
수묵화처럼 정갈하게 그려낸 마음의 풍경들
최일화 시인의 시집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이 푸른사상 시선 193으로 출간되었다. 도공이 거친 흙을 주물러 잘생긴 항아리를 빚어내듯 시인은 온갖 삶의 사연들을 잘 정제된 언어로 작품화한다. 미진한 사랑을 향하는 시인의 시들은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선량하고 정연해서 기꺼이 바람을 품는다.
■ 시인 소개
최일화
경기도 안성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평택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철학, 종교, 문학에 심취하여 많은 책을 읽고 대학노트 가득 시를 썼다. 1985년 첫 시집 『우리 사랑이 성숙하는 날까지』를 상재했고, 1991년 『문학세계』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소래갯벌공원』 『시간의 빛깔』 『그의 노래』 등이, 시선집으로 『마지막 리허설』, 수필집으로 『봄은 비바람과 함께 흙먼지 날리며 온다』 등이 있다. 톨스토이 작품의 영역판 『Wise Thoughts for Every Day』, 루이스 L. 모로의 『My Bible History』를 번역 출간했다. 영어 교사로 정년퇴직하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인천문학상, 계간문예문학상을 수상했다.
■ 목차
제1부 창과 꽃병
방정식 / 참회록 / 창과 꽃병 / 시시포스의 돌 / 원석(原石) / 한 끼니 / 잃어버린 시 / 반 박자 느린 사람 / 성역(聖域) / 삐뚤어진 코 / 치열한 전투 / 팀 추월 경기를 보며 / 아무도 몰래 꺼내보는 그 마음 / 해바라기의 비명
제2부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
발원지 / 가을 숲에서 /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 / 성스러운 영원 / 절집을 나온 사람 / 만삭의 소래산 / 재난 경보 / 코로나 나이테 / 너는 봄이다 / 노인과 마담 / 둥근 섬 / 보편적인 너무나 보편적인 / 참새 / 폭염의 레임덕
제3부 먼 것이 참 많다
병원 즐기기 / 나의 산책로 / 먼 것이 참 많다 / 취한 밤 / 전철 경로석에서 / 하얀 정물 / 처서 무렵 / 여드레 / 과일 이야기 / 점심때 / 김사차 씨 / 답게 / 당신도 재벌이 될 수 있다
제4부 못다 한 숙제
모과가 익어갈 무렵 / 못다 한 숙제 / 소풍이나 가듯 / 균열의 조짐 / 봄길 / 단발머리 / 죽마고우 / 인천대공원 / 전기스탠드를 버리며 / 불새 / 유예(猶豫) / 만약에 / 뻐꾹 뻐뻐꾹 / 오늘 내가 있는 자리
작품 해설 : 잘 빚어진 항아리- 오민석
■ '시인의 말' 중에서
산책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삶의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
온몸의 열기를 식히는
한 줄기 바람,
출렁이는 생각의 물결 속에서
낚아 올리는 한 마리의 감동,
한 스푼의 재미,
그것이 나의 시다.
■ 추천의 글
최일화 시인의 시들은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선량하면서도 정연하다. 시는 고상한 정서나 그윽한 사상이 아니라 “일상의 잡다한 것과 닮아 있고/저잣거리 소음과 먼지 속에 섞여”(「발원지」) 있는 존재이기에 고심하는 밤이나 고단한 퇴근길에 싹튼다는 시론을 무결하게 완성한 것이다. 시인은 잡다한 것들을 끌어안고 “시시포스의 돌을 굴려 올리듯/시를 짓는다”(「시시포스의 돌」).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고통 속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시인이 뒤처져 있는 것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 묻힌 시의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미로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시인의 길을 나무처럼 걸어가고 있기에 시인의 시는 현재진행형이다. 미진한 사랑을 향한 노래도 그렇다.
― 맹문재(안양대 교수·시인)
■ 작품 세계
시집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세계의 “북적이는 찌꺼기들”을 정련하여 단정하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낸다. 마치 도공이 거친 흙을 주물러 격정과 혼란을 다 걸러내고 잘생긴 항아리를 빚어내듯 그는 삶의 소란스러운 바람들을 잠재우고 그 안에서 잘 정제된 언어를 골라낸다. 그의 시들은 온갖 사연 가득한 현실을 대빗자루로 잘 쓸어낸 후의 깨끗한 마당처럼 정결하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잡것을 다 털어낸 후의 타작마당을 보는 것 같고 가면으로 가득 찬 축제가 끝난 후 깨끗이 정리된 거리를 걷는 것 같다. (중략)
최일화는 마치 흐린 창을 닦아내듯 다중 다층의 복합적인 풍경을 단순화한다. 그의 시는 찌꺼기들을 걸러낸 술처럼 맑다. 그는 가짜인 껍데기들을 귀신처럼 감지하고 그런 것들을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하여 장식과 페르소나가 사라진 존재가 말갛게 모양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담는 그릇이 바로 그의 시이다. 위 시도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음의 풍경을 수묵화처럼 잘 그려내고 있다. 이곳을 나왔으나 저곳이 그립고, 저곳을 향했으나 이곳을 찾는 마음의 불안한 지도를 시적인 풍경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은 마지막 연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추슬러야 하지만 “옷자락에 그늘이 달라붙어 있어서” 그것을 못 한다는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인가. “청산의 바람도 그 그늘 달래주지 못”한다니, 그 그늘은 얼마나 깊은가. “절집을 나온 사람”은 옷자락에 (세속의) 그늘을 달고 등에는 “절집 하나 둘러메고” 정작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느 곳으로나 가며 고통스러워한다. 문제는 어딜 가든 다른 곳이 정처(定處)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기실 “절집을 나온 사람”만이 아니라, 일상적 주체들의 삶의 여정이 대체로 이런 것이 아닐까. 육신의 늙음이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지만, 그 해방엔 이미 죽음의 터미널이 들어와 있고, 무위자연은 사실 처음부터 자연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인생은 버릴 수 없는 그늘과 절집을 옷자락과 등 뒤에 달고 늘 “망설이는 마음”의 여정이 아닌가. 이 시집엔 이런 사유와 성찰이 댓돌 위의 신발들처럼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그것들은 무채색에 가깝도록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일견 쉬워 보이지만 오랜 수행의 눈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참회록
아름다운 봄노래 곁에 두고 들으려고
새끼 새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했네
둥지에서 아기 새 데려올 때 어미 새 울음소리
들을 겨를도 없었네
목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배고프지 않게 끼니를 챙겼지만
더디더디 자라다 아기 새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네
나이 들어 알았지
옛 어른의 말씀을 듣다가 알았네
물을 주는 게 아니라
때맞춰 끼니를 챙겨주는 게 아니라
어미 품의 온기와 날아오를 하늘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어미 새의 노래 듣고 자라야
창공에 노래하는 음유시인 된다는 것을
발원지
시를 쓰는 것은
고상한 정서의 발현이라고
그윽한 사상의 구현이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이 들어 안다
사랑은 생사의 문제처럼 절실한 것이라고
특별한 지점에 있는
고귀한 영역이라고 여겼지만
맹신의 오류였다는 걸 늘그막에 겨우 안다
생의 하류에 와서 돌아보니
시도 사랑도
일상의 잡다한 것과 닮아 있고
저잣거리 소음과 먼지 속에 섞여
허덕이는 노심초사 속에
고심하는 불면의 밤에
일터에서 돌아오는 고단한 퇴근길에
은둔처럼 싹이 트고 샘물처럼 발원하는 것을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
우수마발이 다 시가 될 수 있지만
그냥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한 그루 모란의 뿌리가 봄을 만난 듯해야 비로소 시가 된다
우주에 우주 쓰레기가 가득하듯이
시인 안에 북적이는 찌꺼기들
시가 될 수도 있었는데 끝내 되지 못하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들
시인은 언제 태어나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도는 것인가
저렇게 집 한 채씩 지어놓고
풀벌레처럼 들어앉아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천사인지 마귀인지 모를 날개를 달고
밤을 낮 삼아 떠돌기도 하고
문둥이끼리 반갑듯이 시인들끼리는 서로 반갑다
알고 싶지도 않고 모르는 게 낫기도 한
마음이 많이 상한 사람들
갈대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꽃을 피우는 사람들
시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멋모르고 시인이 되고 싶어 시 하나 등불 삼아 살아왔으니
참 바보처럼 살았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시인 안에 시 아닌 것들 가득하고
추운 날 쓰레기 더미에서 시를 뒤적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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