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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신간도서

정원도 시집,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by 푸른사상 2024. 7. 16.

 

분류--문학()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정원도 지음|푸른사상 시선 192|128×205×7mm|120쪽|12,000원

ISBN 979-11-308-2162-7 03810 | 2024.7.15

 

 

■ 시집 소개

 

생명의 소중함을 노동에 관한 깊은 사유로 그려낸 시편들

 

정원도 시인의 시집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가 푸른사상 시선 192로 출간되었다.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존재론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시편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시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시들은 우리 시대의 노동 현실을 구체적이면서도 진정한 시인 정신으로 반영한 것이기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획득한다.

 

 

■ 시인 소개

 

정원도

1959년 사과 산지인 대구 반야월에서 출생하여 아버지가 마차를 끄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978년부터 포항공단 철강회사의 기계사업부에서 근무하던 중 ‘민중시 낭송회’ 사건으로 1989년 서울로 좌천되어 기계 애프터 서비스(A/S) 업무에 종사하다가 회사의 합병으로 퇴직했다. 그 뒤 기계 수리 관련 자영업을 운영했다. 1985년 『시인』에 「삽질을 하며」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그리운 흙』 『귀뚜라미 생포 작전』 『마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감사 및 연대활동위원장을 역임했고,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목차

 

제1부

폭설 / 지렁이 같은 시(詩) / 꽃들의 배꼽 / 눈꽃 / 뿔 /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 낙상(落傷) 1 / 낙상(落傷) 2 / 낙상(落傷) 3 / 낙상(落傷) 4 / 월문리(月門里) / 뇌를 앓다 / 피안의 언덕 / 투약 / 거룩한 노동 / 박 터진 날

 

제2부

귀뚜라미 재회 /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 / 양말 한 짝 / 낙오자(落伍者) / 장롱 / 깃털 하나 / 벚꽃도 점심 먹으러 간 사이 / 미수금 대책회의 / 연탄 / 비둘기 다리가 붉은 이유 2 / 한 지붕 공존법 / 꿈틀대는 형체 하나 / 좋은 소리 나쁜 소리 / 이불 널기 / 능원리(陵原里) / 고등어 한 마리

 

제3부

파산 / 하루 맹인 / 국밥 / 식은 밥과 칼국수 / 벽지 배달 간다 / 떠나간 웃음을 뜯어낸다 / 노크 귀순 / 낙인(烙印) / 우울한 낙화(落花) / 농성 / 몽키 / 야간 정비복 / 코끼리 노동자 / 증발(蒸發) /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제4부

입술이라는 배 / 대청호 찔레꽃 / 참새 식구들의 아침 / 슬픔도 옹벽처럼 / 뇌 먹는 아메바 / 구름 이사 / 극우의 통치 방식 / 이상한 가족 소풍 / 초승달 눈꼬리 / 아까운 저 꽃들 / 새들도 비상할 땐 두 발을 감춘다 / 다 떠나거라 / 내리는 눈발처럼

 

작품 해설 : 노동하는 생명, 생명의 노동- 진기환

 

 

■ '시인의 말' 중에서

 

이 시집을 읽을 독자들께 고백해야겠다.

여기에 실린 시들이 왜 앞서 낸 시집 『마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보다 먼저 창작된 시들이면서 시집으로 먼저 묶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한 해명이다.

 

제2시집 『귀뚜라미 생포 작전』(2011) 출간 이후 기계 정비 작업 중 불의의 낙상 사고를 당하였다. 뇌내출혈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향후 인지장애나 기억력 손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가 있었다.

그런 다급한 우려로 긴 세월 가슴에 묻어둔 채 ‘언젠가는 써야지’ 하며 미뤄두었던 자전적 이야기 시 『마부』를 쓰게 되었고, 주변의 독려로 그 후속편인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를 내었다. 그 바람에 10여 년이 지나서 두 시집 이전의 시들을 이렇게 정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시인을 꿈꾸면서 품었던 나와의 약속인 ‘자전적 이야기 시’를 두 권으로 정리해낸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긴다. 다시금 내가 걸어가야 할 세계와 존재에 대한 물음에 묵묵히 성찰할 일과,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아내의 치유를 위해 헌신하는 일만 남았다.

 

 

■ 추천의 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한 시대가 가기도 전에 시가 먼저 낡아가는 것을 읽은 시인이라면, 자신의 시대를 깊고 넓게 살아내어 자기 몫을 찾아 노래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원도 시인은 농경시대 끄트머리에 대구의 변두리에서 마부(馬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산업시대에 들어 공업고등학교와 현장에서 배워 익힌 “기계와의 동거 30여 년” 동안, “숨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지 아는”(「증발」) 기계 노동의 땀으로 건실하고 견결하게 삶을 일구어온 중견 시인이다. 1980년대 중반, ‘포항우리문화연구회’ 활동으로 하루아침에 서울로 쫓겨 올라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곁눈질하지 않고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묵묵히 삶을 일구어온 시인은, 그의 뛰어난 시집 『마부』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에서 생생하고 역동적인 언어로 자기 몸에 체화(體化)된 시대의 얼굴, 곧 자기 삶의 역사성을 찾아내어 아름답게 노래했다. 시대가 허여한 그의 몫이었다.

이번 시집에는 그가 ‘밥’을 위해 “고장 난 기계 위를 맴돌다 추락”(「낙상 4」)하여 의식을 잃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간 재해(災害)와, 온갖 신고(辛苦)를 겪어온 일상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쓰디쓴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노동을 “젖은 눈의 거룩한 노동”(「거룩한 노동」)으로 읽어내는 데서, 나는 시인으로서 뭇 생명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품은 그의 깊은 눈과 넉넉한 가슴을 읽고 있다. 따뜻한 시인의 시가 이러하다.

― 배창환(시인)

 

 

■ 작품 세계

  

한 시인의 시세계는, 확장되고 변주될지언정 기본적으로는 ‘시인’이라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재현의 양상에 차이가 있을 뿐, 시인의 경험과 사상을 기본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경우 시는 그 방법과 속도가 다를지는 몰라도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정원도에 국한해 말해보자. 그의 ‘말 연작’ 시집들은 자전적 경험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경험은 대부분 노동에 관한 것들이다. 이번 시집과 『귀뚜라미 생포 작전』은 노동에 그 중심을 두고 있는데, 시집에서 다루는 노동은 대부분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디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느냐의 차이일 뿐 정원도의 시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 삼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선 그의 시에 노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지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살핀다면 자연스레 그가 생각하는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노동과 올바른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정원도라는 시인의 시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중략)

정원도의 노동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정원도 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테마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정원도는 꾸준히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생명을 말하는 방식에서 이전 시집들과의 차이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에서 생명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다소 당위적인 존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존재론적 물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마 낙상 사고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시인의 경험이 시에 녹아든 것이리라. 위에서 나는 이번 시집에서 다뤄지는 노동들 또한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 진기환(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딱 1년만 일 더 하고 접는다더니

갑작스레 연락 불통

쉬쉬하던 사이에 증발해버린 당신

아직도 연락처를 뒤적이다 보면

스쳐 지나는 옛 웃음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우리가 곤죽이 되어 건너다보던

해거름 노을 건너 사라진 지도 오래

명절 직전 고향 갈 채비로 들떠 있던 날

포클레인 바가지에 올라타고 컨베이어를 용접하다가

바가지가 흔들 하는 바람에

 

일 년 전 내가 낙상당한 바로 옆자리

내 드러누운 정신이 혼미할 때

구급차를 부르고 실어주었다는 그가

다시 실려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자리

 

예순이 훌쩍 넘어 힘들어도

늘 웃는 얼굴로 조금만 더 하고 가야지 하더니

다시는 쓸모없어진 그의 연락처를

나는 끝끝내 지우지 못하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

 

기계 수평 검사를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는 것을

여기 바닥에서 저기 높이까지

거리가 아무리 멀거나 굽이굽이 꺾여져 있어도

물은 어김없이 수평을 지향한다

 

투명 호스의 물이 통로를 따라 움직이며

호스가 높아지면 저를 낮추고

호스가 낮아지면 저를 높여

서로의 가슴 높이를 맞추려 한다

 

파도가 뭍으로 뭍으로만 밀려드는 짓도

먼바다에서 가장자리로 됫박을 쓸듯

가차 없이 수평을 맞추려는 짓도

 

불멸을 터득한 종(種)들의 팔만대장경이다

 

 

야간 정비복

 

후줄근한 야간작업에 축 늘어져

달조차 반쪽이 된 얼굴로 중천을 넘는 밤

 

속눈썹에, 콧구멍까지

흙먼지 기름때로 스컹크가 된 정비복에

사타구니에 모래가 서걱대도

기계 뒤편에 쪼그리고 앉은 고들빼기들도

온몸에 쓰디쓴 노랑물이 들었을까

 

불량 채권자 같은 야음에

때 찌든 정비복이 포위당해도 좋아

나는 끝끝내 우울할 틈조차 없이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얼싸안고 뒹굴어야 했네

 

 

뇌 먹는 아메바

 

확대 현미경에 나타난 모습이 꼭 메기 같네

뱀의 혀를 날름거리며 물에서 서식하다가

물놀이하는 소녀의 코로 들어가

단숨에 뇌를 갉아먹었다니

 

감염 치사율이 십억 분의 일이라고

익사에 비하면 희박한 확률이라고 방심하는 사이

그런 흉측한 미물까지 창조되는 저의에 몸서리친다

유인원의 두개골을 따고

숟가락으로 뇌를 파먹는 잔인한 종에게 내리는

천벌이다

 

혹이라도 당신의 뇌가

그 아메바에게 파먹히지 않으려면

수상한 공장 폐수나 짐승의 뇌를 파먹은 배설물로

오염된 하천에서 멱을 감지 말라

멱을 감으려거든, 그런 오염을 방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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