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정적이 깨지다
박영욱 지음|푸른시인선 28|130×215×8mm|128쪽|14,000원
ISBN 979-11-92149-47-9 03810 | 2024.3.20
■ 시집 소개
일상에 발을 딛고 떠올리는 생각의 무늬들
박영욱 시인의 시집 『정적이 깨지다』가 <푸른시인선 28>로 출간되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일, 자연 속에서 새와 벌레를 만나는 일 등 일상에 발을 딛고 떠올리는 생각의 무늬들이 이 시집에 아로새겨져 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울림을 서정적으로 노래하여 평범한 일상의 정적을 깨고 있다.
■ 시인 소개
박영욱 朴永旭
1956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 중문과를 졸업한 후 세화여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글쓰기를 권유했던 아버지(시인 박두진) 말이 떠올라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산문집으로 『나무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진다』(2022)가 있다.
■ 목차
■ 自序
제1부 정적이 깨지다
온기 / 전율(戰慄) / 도라지 / 가을맞이 / 평화 / 차이 / 어떤 잠언(箴言) / 물방개가 그립습니다 / 두 귀에 들려온다 / 숲 / 허전함은 남는다 / 고독 / 그리움 / 정적이 깨지다 / 오렌지 주스와 삼립빵 / 환각의 숲
제2부 그저 내 인생의 지나간 한때였지만
하루살이의 기도 / 봉원동 골목 / 가을 / 상수리나무 위에서 / 슬픈 여행 / 구름 / 익숙한 정 / 오매불망 / 오만 / 어치와 물까치 / 그저 내 인생의 지나간 한때였지만 / 침묵의 강 / 햇살 / 푸근한 고독 / 추억 / 활력을 찾다
제3부 살아가기놀이
슬픔 / 쇠비름 꽃 / 숲을 찾는다 / 해 질 녘 / 인지상정 / 햇빛의 자부심 / 은행나무 / 살아가기놀이 / 물비 / 그리움이 스미다 / 하늘 마을 / 밤바다 / 낯가림 / 바위와 사귀다 / 느티나무 / 거미
제4부 내 방에는 긴 의자가 있다
허허벌판 / 시간 / 허(虛) / 산국(山菊) / 예쁜 비, 예쁜 할머니 / 네 여인 / 사라짐과 지속됨 / 숲에는 / 바둑이 바위 / 내 방에는 긴 나무 의자가 있다 / 검은 나무 / 아련하다 / 한계 / 인연 / 슬픈 시냇물
작품 해설 : 생각의 길 위에 서서 _ 전기철
■ ‘자서(自序)’ 중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지면 시를 쓴다.
이를테면, 부풀어 오르는 구름을 볼 때 떠오른 생각이나 호르르 날아가 버린 곤줄박이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때 시를 쓴다.
이어진 폭염으로 온 세상이 늘어져 있을 때 무슨 영문인지
느닷없는 창작 욕구가 생겨 시를 쓰게 될 때도 있다.
뒤에 읽어보면 내가 쓴 글 같지 않다.
또, 영락없이 내가 쓴 글 같다.
생각이나 문체를 바꿔보기도 했지만, 변화의 흔적이 미미했다.
그래서 굳이 그러질 않을 셈이다.
들려줄 누군가가 결국 나였나 보다.
■ 작품 세계
인간의 생각은 살아가는 동안 멈추지 않는다. 몸속의 세포 활동처럼 생각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심지어 잠을 자고 있을 때나 생사가 오락가락할 때조차도. 그 생각은 의식에서 무의식, 초의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따라서 생각은 흔들리는 진자처럼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자유롭게 떠다닌다. 그만큼 생각의 범위는 넓고 깊어 가까운 눈앞에서 노닐다가도 갑자기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기도 한다. 이런 무시간적이면서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각을 언어로 붙잡으면 예술이 되고 과학이 되며 철학이나 물리학이 된다. 생각에 따라 나는 네가 되기도 하고 그가 되기도 한다. 생각을 어떤 언어로 붙잡느냐에 따라 생각의 형태는 달라진다. 시인은 시라고 하는 형태로 생각을 붙잡는다. 그 생각은 정서적인 언어로 되어 있다. 시인은 감각이나 감성으로 생각을 붙잡는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며 생각에서 정서적인 부분만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 생각은 뜬금없이, 불쑥 무시(無時)로 나타난다. 그것을 언어로 잡아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정서를 적는 일일 것이다. 박영욱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울림을 정서적으로 적어 평범한 일상의 정적을 깬다. (중략)
박영욱 시인은 거창한 상상의 세계를 탐험한다거나 기괴한 환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사념을 있는 그대로의 ‘생각’으로 표현한다. 그만큼 언어 또한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들이다. 이는 그의 시가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가 쓸쓸하고 우울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일이나 가까운 뒷산이나 주변의 산에 드는 일도, 새나 벌레를 보며 느끼는 생각도 이런 일상에 발을 딛고 있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여기’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적는다. 따라서 그의 시는 극히 일상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생각’의 무늬가 적나라하다. 존재론적으로는 한 형태의 정적을 깨는 생각이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했던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기도 하지 않는가.
―전기철(시인,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정적이 깨지다
시간의 커다란 산을 수차례 넘어온
노인들이 살고 있는 시골마을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어른 공경은 옛말이 되어버려
쉰 떡 보듯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태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가
사람 귀한 줄 알고
만나도 잘 만났다 여기며
너 내 없이 의좋게 살아가고 있었다
바깥 맛 알게 된 아이들처럼
마을 할머니들은 거의 매일 나와서
가겟집 담벼락 밑에 쪼르르 모여 앉아
볕을 쬐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어느 가을날 오후
모아놓은 쓰레기들 치우는 청소차가 왔다
그때 정적을 깨는 외침 소리가 들렸다
-청소부 양반, 우리 할머니들도 좀 치워 가세요.
침묵의 강
파란 하늘과 한빛을 이룬 강
길게 뻗은 모래밭이 눈부시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오면
강가에 물 냄새가 스친다
강물을 무심히 바라본다
강도 나를 흘깃흘깃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것 같다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강물이 흘러간다
세월을 한 움큼 안고 조용히 흘러간다
무던하게 어제처럼 그저 흘러간다.
한계
한낮의 햇살이 조용히 마당에 머무르고 있다
빤하게 쳐다보며 일삼아서 들러붙는
시치근한 맨날 맨날을 동댕이쳐버리고 싶어진다
희열이 덧씌워지는 몰입 뒤의 성취를 맛보고 싶어진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무언가에
잔뜩 사로잡혀 뒹굴고 싶어진다
법열의 경지에서나
무릇 일컬어지는 참 신앙 속에서만
쉼 없이 찰랑대는 마음의 잔물결이 잠잠해지며
번요를 잊고 제대로의 질서를 갖게 되는 걸까
아니면 죽음 너머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어떤 세상에서, 남다른 어떤 사람만이
심신이 아늑해지는 평안을 찾고
진정한 환희를 맛보게 되는 걸까
어쩔 수 없는 이런저런 한계들이
텀벅텀벅 내 안으로 들어온다
햇살이 늘어지며 마당에 널브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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