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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간행도서

김장수, <1848 독일 혁명>

by 푸른사상 2022. 11. 3.

 

 

분류--역사(서양사, 유럽사, 근대사)

 

1848 독일 혁명

 

김장수 지음서양근대사총서 8153×224×20mm(하드커버)264

27,000ISBN 979-11-308-1960-0 93920 | 2022.10.31

 

 

 

■ 도서 소개

 

독일 통합의 기초를 마련한 3월 혁명의 역사

 

김장수 교수(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1848 독일혁명』이 푸른사상사 <서양근대사 총서 8>로 출간되었다. 독일 통합의 기초를 마련한 1848년 3월 혁명의 전개 과정과 연방국가들의 혁명적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한 이 책은 독일혁명이 19세기 유럽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적 의의를 정연하게 알려주고 있다.

 

 

■ 저자 소개

 

김장수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팔라츠키의 정치활동)』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조선과 서방 세계)』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한국과 유럽 강대국들과의 관계, 특히 독일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 등이 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룬 많은 논문도 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세계문화사학회(구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목차

 

∎ 책머리에

 

제1장 독일 통합의 필요성

1. 카를스바트 협약

2. 7월 혁명

3. 7월 혁명의 영향

4. 독일권에서의 상황 변화

5. 함바흐 축제

6. 기존 질서체제의 대응

7. 혁명적 분위기 조성과 대응 방안

 

제2장 3월 혁명

1. 2월 혁명(1848)

2. 중부 소독일 국가 혁명

3. 빈 혁명

4. 베를린 혁명

5. 혁명 발생 이후의 민중운동

 

제3장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 예비의회의 구성과 활동

2. 국민의회의 개원과 활동

3.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4. 독일의 통합 방안

 

제4장 반혁명세력의 대응

1. 파리의 6월 봉기

2. 빈의 10월 소요

3. 프로이센의 반동 쿠데타

4.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마지막 활동

5. 프로이센의 유니온정책과 올뮈츠 굴욕

 

∎ 마무리하면서: 3월 혁명의 업적과 한계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책머리에’ 중에서

 

국내 서양사학계, 특히 독일사학계는 독일권의 통합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3월 혁명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향에서 확인되는 것은 3월 혁명이 독일 근대사 서술에서 서너 쪽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내 독일사학계에서 간단히 취급되는 3월 혁명은 19세기 독일 및 유럽 근대사에서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독일의 통합 과정을 객관적이고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월 혁명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3월 혁명 기간 중 제시된 일련의 정치개혁과 독일의 통합 방안이 독일권의 실세였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이들 양국 역시 개혁 및 통합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 그것의 실현에 필요한 여러 정책도 본격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3월 혁명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료들과 최근에 구매한 전문서들을 토대로 이 혁명을 다룬 단행본의 집필도 계획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필자는 그동안 등한시된 3월 혁명과 이 혁명 이후 구축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강 구도 및 거기서 파생된 양국 간의 전쟁과 그것에 따른 독일 통합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본서에서는 우선 메테르니히 체제가 정립된 이후 시작된 독일의 통합운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1848년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한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여러 국가에서 진행된 혁명적 상황을 거론하도록 한다. 아울러 1848년 5월 18일 개원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한다. 끝으로 3월 혁명이 실패하게 된 제 이유에 관해서도 확인하도록 한다.

 

 

■ 출판사 리뷰

  

1830년 프랑스에서는, 이전의 절대왕정 체제를 추구하면서 보수·반동 정책을 펼친 샤를 10세를 타도하기 위해 7월 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의 여파로 벨기에 및 폴란드에서도 독립운동이 진행되었고,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의 지식인 계층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점차 이들은 민족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절대왕정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하는 등의 혁명적 움직임도 보였다.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다시 시작된 혁명의 불씨는 이전처럼 독일로 전파되었다. 혁명 세력은 메테르니히 체제의 타파와 정치체제 개혁을 요구하면서 독일 통합의 기초도 마련하고자 했다. 특히 바덴의 만하임에서 개최된 대규모 집회에서는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배심원재판제도의 도입, 전 독일 의회의 소집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제 요구는 3월 혁명의 주요 목표가 되었으며, 연일 지속되는 시위로 인해 각국의 군주는 여러 개혁안의 시행과 헌법 도입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5월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에서 국민의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개별 연방국을 모아 하나의 통합국가로 형성한다는 것이 이 의회의 주요 과제였다. 비록 3월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국민의회의 시도가 향후 독일 통합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김장수 교수는 『1848 독일 혁명』에서 지금까지 국내 서양사학계 및 독일사학계에서 도외시되었던 독일 3월 혁명의 흐름에 주목하여, 유럽 근대사의 한 부분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메테르니히 체제가 정립된 이후 독일의 통합운동을 개괄한 데 이어, 1848년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한 이후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 연방국들의 혁명적 상황에 관해서 기술했다. 아울러 1848년 5월 개원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활동과 업적도 살펴보았다. 국민의회의 이러한 노력에도 3월 혁명이 실패하게 된 이유 역시 분석했다. 실제로 19세기 유럽 근대사에서 3월 혁명이 차지한 위상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본다면 독일 통합 과정을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프랑스에서 전개된 혁명 상황은 1830년 7월처럼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 전역에서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요구들이 제기되었고 그러한 것들을 실천하기 위한 시위도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1848년 2월 27일 만하임 예수회 인문계 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집회에는 3천 명이 참여했다. 집회에서 독일인들은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복지, 교육, 그리고 사회적 분야에서의 동등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개병제(Volksbewaffnung) 도입, 출판 및 결사의 자유 허용, 영국의 배심원재판(Schwurgericht) 제도 도입, 그리고 전 독일 의회의 조속한 소집 등도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들은 향후 3월 혁명(Mӓrzrevolution)의 주요 목표로 설정되기도 했다. 집회를 마친 후 참여자들은 거리로 나가 그들의 요구를 다시금 강조했다. (65쪽)

 

메테르니히가 실각 후 망명하고, 빈과 베를린에서의 혁명세력이 우위를 차지함에 따라 독일 연방의 양대 열강,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 내에서 발생하던 정치적 문제 해결에서 그간 행사하던 절대적 영향력마저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 연방과 독일 연방의회의 기능 역시 마비되었고 그것에 따라 독일 연방의회를 대체할 혁명의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연방의회는 3월 10일 단일민족국가로 통일될 미래 ‘독일 제국’의 헌법 초안 작성을 ‘17인 위원회’에 위임하고, 오스트리아의 요한(Johann,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숙조부) 대공을 독일 제국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17인 위원회는 회의체의 명칭만 바꾸었을 뿐, 독일 연방의회의 양대 회의체 중의 하나인 특별위원회와 같은 회의체였다. 지금까지 특별위원회는 단독투표권을 행사한 11개 국가와 공동투표권을 행사한 6개 국가집단으로 구성된 후 운영되었다. (146쪽)

 

1848~1849년의 혁명이 외양상 실패했지만, 이 혁명이 시민계층 발전과 정착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는 우선 자신의 역할, 즉 혁명의 성과를 효율적으로 완결해야 하는 과제를 의식적으로 포기하고 스스로 혁명을 배반한 대시민계층의 태도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 대시민계층은 혁명적 민중을 두려워했고 처음으로 등장한 독자적 노동계급을 반동세력보다 훨씬 더 두려워했다. 이들은 혁명적 민중을 두려운 자연의 힘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과 자연의 힘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민중이 종국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혁명적 민중, 즉 하층민들은 정치적 사안보다 경제적 현안에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경제적 곤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여기서 급진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산업혁명 초기과정에서 비롯된 대중적 빈곤 현상을 활용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몇몇 소수만이 국가의 지배자이고 특권도 가진다(Einige sind die Herren des Staates. Daruber hinaus haben sie auch Privilegien.)’라는 왕정 내지는 귀족정 체제 대신에 ‘모든 사회구성원은 자신의 몫을 가진다(Jeder hat unbedingt seinen Teil)’라는 일종의 초기 사회주의적 관점을 표방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목표인 공화정 체제도 달성하고자 했다. 즉 이들은 하층민을 응집한 후 혁명적 소요에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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