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수사법
권혁소 시집
1984년 『시인』에 작품 발표를 시작한 권혁소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더러운 폐해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오랜 시간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했다. 권혁소는 이번 시집에서 아름다운 세상이란 사람과 사물이 어떻게 조화로워야 되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
1. 시집 내용(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오늘, 아내 생각
아내의 수사법
오늘, 아내 생각
결혼기념일에
봄눈
나이
병아리 깨던 날
나이 든다는 것
오십
크크크 여관
왕십리에 딸애가 산다
군인 아들에게
통풍이라는 병
세월
제2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종로 은행나무
거창, 무연고 묘역에서
노숙 농성
그대를 감옥에 보내고 온 날
폴리스 라인
커피 아줌마
황토집에서 길을 묻다
뼈대와 뼈다귀
삼계탕을 먹으러 갔다가
시인은 시를 접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대 아래서
실패한 혁명
모하비 사막을 건너며
더러운 것
제3부 자주 가는 술집
집창촌 근처
거짓말을 했다
어떤 고백 앞에서
큰길
오늘 쓰는 내일 일기
관사에 산다
살아줘서 고마워
자주 가는 술집
하노이, 나는 우울하다
규영이
그런 시는 이제 그만 쓰라 한다
뒷바퀴
서울 스마트, 폰
제4부 한계령 근처
애인
사람의 힘
그대의 바다
건봉사 불이문
아침 연못
모든 길
그 강변에 가는 까닭
한계령 근처
장수대 가는 길
가을 사랑
어둠을 건너는 법
점을 사랑한 사람
부엉이 우는 밤
제5부 시골 사는 법
땅을 샀다
단풍이
편지가 그립다
여산재(如山齋)
시골 사는 법
겨울 산골
혼자 웃다
봄 편지
참새가 죽었다
인북천에 산다
우리 동네 구미동
시골에 산다는 것
거긴 우체통이란다
폭설
해설 지천명에 지은 여산재(如山齋)의 봄-홍기돈
2. 시인 소개
1962년 평창 진부에서 났다. 1984년 시 전문 무크지 『시인』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論介가 살아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위에서 개천을 내려다 보다』 『과업』 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그래, 지금은 조금 흔들려도 괜찮아』가 있다. 현재 (사)한국작가회의 강원도지회장을 맡고 있으며, 강원도 인제 산골 마을에 살며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3. 시세계
겨울을 살아 낸 나무들이
새순을 틔워내는 것을 보면서 아내는
나무들이
길을 잃지 않으려고
가지 끝마다
연둣빛 등불을 하나씩 단 것 같다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했다
가지 끝마다
연둣빛 알전구 하나씩을 매단
세상을 희망으로 부풀게 하는 전령들이
성장판이 자라는 고통을 딛고
한 해 한 눈금씩 제 키를 키운다
아내가 시를 낭송하고
나는 그것을 종이 위에 적는다
아내의 수사가 봄을 환히 밝힌다
-「아내의 수사법」전문
주지하다시피 한 곳에 정착해 있는 나무는 이동하는 길의 속성과 대립하는 자질을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새순=연둣빛 등불’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해소되고 만다. 그리고 이 등식은 2연에서 희망의 가치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여기서 이 시의 첫 번째 면모가 드러난다. 겨울은 마땅히 건너가야만 할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상징하며, 봄으로의 이행을 이끄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연(나무)이라는 사실. 시각을 넓혀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면모는 비단 「아내의 수사법」만의 색깔이 아니라 시집 『아내의 수사법』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삼아 덧붙이는데 이 시집에서 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시는 「아내의 수사법」 외에도 열 편 더 확인된다. 「봄눈」, 「세월」, 「살아줘서 고마워」, 「아침 연못」, 「모든 길」, 「혼자 웃다」, 「봄 편지」, 「우리 동네 구미동」, 「시골에 산다는 것」, 「거긴 우체통이란다」.
이 시의 특징적인 두 번째 양상은 아내의 발언을 매개로 하여 시인이 자연(나무)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순을 보면서 연둣빛 등불을 떠올린 사람은 아내였다. 그러니 아내를 앞세우는 시인의 진술이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내가 하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는 생활이 펼쳐지는 영역이지 않은가. 『아내의 수사법』 곳곳에서 시인의 아내는 생활의 편에 서 있다. 예컨대 새삼스럽게 자잘한 일상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아내이며(「나이」), 노조사무실에 출입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자식들을 챙기고 생활까지 감당해내는 이도 아내이다(「오늘, 아내 생각」). 그리고 이런 아내의 소중함이 문득 느껴질 때 「병아리 깨던 날」, 「오십」 등이 만들어졌다. 아내가 자리하는 방향에 딸이 있고(「왕십리에 딸애가 산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군인 아들에게」)도 고려할 만하다.
그러니까 「아내의 수사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면모를 바탕으로 하여 시집 『아내의 수사법』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으며, 두 면모가 교차하며 빚어내는 긴장이 바로 인자요산에 가 닿는 『아내의 수사법』의 품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수사법』을 지탱하는 긴장은 시인이 겪는 사회 현실과의 불화로부터 기원하였다. 그러니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 상황에 관한 시인의 인식이 담긴 시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주로 시집의 2부와 3부에 묶여 있다. 먼저 시인의 對사회활동 속에서 창작된 시편들로 꾸며진 2부부터 살펴보자. 2부 시편들 가운데 집회장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으로는 「세종로 은행나무」, 「폴리스 라인」, 「커피 아줌마」, 「시인은 시를 접고」가 있고, 노조활동이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황토집에서 길을 묻다」, 「뼈대와 뼈다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보인다. 이처럼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다. 동지는 분신해 산화해버렸거나(「노숙 농성」) 감옥에 갇혔고(「그대를 감옥에 보내고 온 날」), 이에 해당하지 않는 많은 동지들은 투쟁 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목에 힘주어 불렀던 노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깨동무로 어울렸던 동지들은/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등불 아래서」, 2연)
시인의 일상이 드러나는 3부의 시편들에서도 이러한 식의 절망적인 회의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시인에게 향하는 동료 시인들의 권유도 절망을 확인케 할 따름이다. “『시인』지에 ‘아아 이 부끄러운 민주주의를 어찌할 거나’ 오열하며 머리를 올린, 아직은 그 첫 마음으로만 시를 살고 싶은 내게, ‘권혁소라는 격한 본명 말고 뭐 좀 야리야리한 필명도 하나 만들어서, 그런 시는 이제 그만 써도 되지 않겠냐’고들 한다.”(「그런 시는 이제 그만 쓰라 한다」) 마땅히 청산되어야만 할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로 구축되고 운영되는 타락한 사회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변화의 기대도 난망하기만 하다.
그래서 시인에게 지금 이 세계는 머물러 고여 있는 시간이며, 추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가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 살고 있다”(「등대 아래서」)라는 한탄,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니라는 듯(春來不似春) 봄눈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이를 보여준다. “입춘 경칩 지나면/ 철새들도 떠나가는데 너는/ 어디쯤 가다 길을 꺾어/ 이 봄을 흔들고 있는 거냐/ 차마 몸 내놓지 못하는 세월을/ 주눅들게 하는 거냐”(「봄눈」 2연) 이 속에서 시인은 현재 자신이 품고 있는 신념이 앞으로 변색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그저 현실을 견디어 나갈 따름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진 날이다. 내일도 같은 일기를 쓸 수 있을까”(「오늘 쓰는 내일 일기」) 오늘의 의지를 내일로까지 연장시키며 시인은 이 얼어붙은 현실을 어떻게든 건너가고 있다. 어떻게? 불연기연의 애매성을 끌어안고서.
여산의 자세로 펼쳐나가는 권혁소의 일상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까. 귀뚜라미 소리를 “뉴스도 듣지 마라/ 군가도 듣지 마라/ 총성도 듣지 마라”라고 해독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인이 아직 그러한 소리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인북천 맑은 물을 보며 “통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라고 다짐하는 것도 아직껏 통일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방식의 긴장은 아마도 자연 속에서 계속 이어지리라 싶다. 그렇다면 그 긴장은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데로 나아갈까. 불연기연, 이에 대한 나의 비평은 바로 여기까지다.
홍기돈의 해설 <지천명에 지은 여산재(如山齋)의 봄> 중에서
4. 추천의 글
동갑내기 권혁소 시인의 시는 날것이다, 육성이다, 통곡이다. 온갖 미혹의 수사를 과감히 버리고 시대정신에 걸맞은 깃발의 맨얼굴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웃을 일 없다//미루어두었던 앞니 하나/또 뺀다”는 결기가 애절하다 못해 섬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격한 것만도 아니다. “한때는 앞바퀴 같은 삶을 살자 했지만 지금은/뒷바퀴 같은 삶을 생각”하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다. “잃어버린 이름들 되찾으라”는 여산재(如山齋)의 귀뚜라미 울음소리에도 화답한다. 돌아보면 언제나 북풍한설 속의 한 그루 강원도 금강송이 테너의 자세로 서 있다.
- 이원규(시인)
아는 이들이 많듯 저기 동해 난바다를 굽어보는 미시령 아랫마을엔 모두가 멸종했다고 믿는 ‘조선 호랑이’ 한 마리가 청정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이, 강원도에 가면 무엇이 있지, 라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강원도엔 권혁소가 있지”라고 대답해 왔다.
그의 시는 보기 드물게 용맹스럽고 듬직하고 굵으면서도 섬세한 신경을 가졌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파랗게 쏟아”내야 했던 “우리의 현대사”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어둠의 끝”에서 다시 “연둣빛 알전구” 같은 희망의 싹을 틔우며 한 뼘 한 뼘 “성장판”을 늘려온 뼈아픈 시대의 나이테가 아로새겨져 있다. 때론 아프고, 눈물겹지만 아직도 “그대”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일상의 전사. ‘시와 혁명’을 한 몸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한 아름다운 이의 영혼의 시편들이 치장 없이도, 가감 없이도 아름답다. 그는 마치 소박함에 이르는 것이 혁명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대가 늙어가고, 혁명이 늙어가도, 그가 긴 세월에 이르러 도달한 한 생명의 경외로움과 소박함은 늙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 깊은 믿음을 우리 모두 나눠가졌으면 좋겠다. 「크크크 여관」에서처럼 잠시 이 생이 경계없이 밝아지는 것은 덤이다.
- 송경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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