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길에서 시를 주웠습니다, 300여 편이나
3년간 지은 산책 시 가운데 70편을 모아 시집 '나무에 기대다'를 냈습니다
나는 하루 두 번 산책을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을 빼먹은 적이 없다. 비가 오는 날은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은 가장 소박한 도구인 우산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운이 좋은 날은 산책 중에 길에서 시를 줍기도 한다.
비 오시는 날은/우산 쓰고 동네 한 바퀴 돈다/우산 쓴 달팽이처럼/한 걸음을 떼는 것이/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양//누군가 하늘에서 본다면/우산이 가다가 멈추고/가다가 멈추곤 했을 것이다/그러다가 죽은 듯이/아주 한참을 멈추어 있을 때가/절정의 순간이다//빗방울의 눈동자를 본 적 있는가?//인간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녀석의 호기심어린 눈을
- <달팽이 산책>
가깝고 만만한 동네 산들이 많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산책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은 나의 놀이터다. 내가 최고일 이유가 없듯이 최고의 풍경일 필요는 없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아무도 다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봄이랑 놀았다/봄이랑 연두랑 노는 동안/아무도 다치지 않았다//점심 먹고 자전거 타고 나가서/해가 똥구멍에 닿을 때까지/봄이랑 연두랑 노는 동안/용케도 봄을 가지고 놀지는 않았다/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놀았다
-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부분
봄과 노는 것과 봄을 가지고 노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가 상호 동등한 입장이라면 후자는 소유를 전제로 한 종속 관계이리라. 어쨌거나 봄과 잘 놀고 돌아가는 길에 내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봄을 가지고 놀았다면 이렇게 뒤끝이 깨끗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여기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지금 뭐해?"
"오마이뉴스 기사 쓰고 있어."
"무슨 기산데?"
"내 시집 소개 글을 내가 쓰는 거야."
"그래도 돼?"
"아마 될 걸. 오 마이 뉴스잖아."
"오, 그러네!"
지난 3년 동안 쓴 산책 시를 헤아려보니 300여 편에 달한다. 그중 70여 편을 골라 여섯 번째 시집 <나무에 기대다>(푸른사상)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도 아내가 등장하는 시가 몇 편 실렸다. 그중 한 편만 소개한다.
어느 날 아내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다 말고 커피나 한 잔 마실까, 하더니 그냥 주저앉는다. 이유를 물으니 우유가 없단다. 다음은 시의 후반부다.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와/천천히 걸어서 동네마트에 닿았다/우유 두 개 묶어진 것을 하나 사서/신주단지 모시듯 가슴에 안고/다시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아내는 내게 고맙다고 했는데/나는 조금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가을을 마중 나갔다가 온 것을/아내는 알지 못했다
- <마중> 부분
아내 심부름으로 동네마트에 다녀온 것도 나에게는 산책이다. 이곳저곳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도 '병원 나들이 가는 길'이 된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종합병원이다.
한때는 건강미(?)가 넘치던 내 몸에 크고 작은 병들이 찾아온 것이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뜻밖의 유익(혹은 선물)도 많다. 아프면 행복이 쉬워지기도 한다. 길에서 보는 흔한 꽃들처럼 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래도 삶이 각별해지는 것이다.
병원을 나와 신호등을 지날 때 보니/하얀 개망초가 바람에 몸을 마구 흔들고 있다/괴롭다는 건지 즐겁다는 건지/흔하면서도 예쁜 꽃, 나도 내가 예쁘다/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래도/각별하지 않은 삶은 없으니
- <어느 각별한 날의 일기> 부분
산책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을 때가 있다.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즐거움이 있는 사람처럼. 그냥 걷기만 해도 행복하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바지에 흙이 묻어 있을 때가 많다. 사진을 찍다보면 꽃 앞에 무릎을 꿇는 일도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낮게 핀 꽃일수록/꽃 사진을 찍을 때는/꽃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자기 살을 찢고 땅거죽을 뚫고 나온/어린 꽃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나이 들어 몸이 노쇠해지니/꽃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친다/무릎과 허리를 펴고 일어설 때마다/낡은 가구처럼 관절이 삐걱거린다//늙고 낡아갈수록/꽃에 대한 예절이 깊어진다
-<낡아간다는 것>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자전거만 타고 나가면 온 천지가 내 뜨락이다. 차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는 나로서는 장딴지 힘만으로 동력을 만드는 자전거가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모른다. 자전거와 운명을 같이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음은 내 운명적 동지인 자전거에게 바친 헌시이자, 나의 간절한 기도다.
나의 애마 첼로 자전거를 타고/만경강 억새를 보러갔다가/저무는 저녁강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자전거와 나의 수명이/엇비슷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수명이 다한 뒤에는/자전거는 고물상에 팔려갔다가/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좋겠고/나는 그냥 땅에 묻혔다가 벌레들의/간식거리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간절해지는 것이었다
- <기도>
자전거가 나를 데려다 준 곳에는 늘 나무가 있었다. 요즘 나는 나무에 기대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무도 나에게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나무가 인간인 나에게 기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무가 나에게 고마운 존재이듯 나도 나무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이 시대 절체절명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물음에 대한 답도 나는 나무로부터 듣는다.
나무를 보고/사진기 셔터를 눌렀는데/파란 하늘이 더 예쁘다
헐벗은 나무가 한 일이다
- <미덕>
산책가에게 가을은 천국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가을에는 가을만 있으면" 있으면 되었고(가을에 필요한 것), 내게 "가을은 언제나 처음 가을"(처음 가을)이었고, "가을이 꽃"(가을의 둘레)이었고, "아직 어린 가을이라 손등만 매만지다가" 돌아온 날도 있었고(어린 가을),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가을속의 일"(가을 속의 일)이었다. 그리고도 '두 가을길'이 남았다.
가을길을 걸었다//길을 걷는 것은/내 안에 길을 하나 내는 일이다//오늘도 나는 두 가을길을 걸었다
- <두 가을길>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정말 그런가? 만약 봄이 오지 않는다면?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를 생각하면 봄이 오는 것을 당연한 일로만 여길 일은 아니다. 인류에게 고통이 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지만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봄이 온다는 것은/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봄이 온다는 것은/아직 세상을 끝낼 마음이 없다는 거다//저 아득한 나무 우듬지까지/꽃을 매단 것을 보면 안다//고마운 일이다/봄이 딴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이
- <봄이 온다는 것은>
오마이뉴스, "산책 길에서 시를 주웠습니다, 300여편이나", 2021.12.12
링크 : 산책 길에서 시를 주웠습니다, 300여편이나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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