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더글러스 퍼 널빤지에게
백수인 지음|푸른사상 시선 147|128×205×7mm|132쪽|10,000원
ISBN 979-11-308-1810-8 03810 | 2021.8.25
■ 도서 소개
태고의 숨결이 담긴 뜨거운 서정의 노래
백수인 시인의 시집 『더글러스 퍼 널빤지에게』가 <푸른사상 시선 147>으로 출간되었다. 고향 집이 자리 잡은 전남 장흥부터 두만강 건너까지 시인의 시선은 무한하게 펼쳐져 나간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이야기는 물론 자연과 역사를 노래하는 시편들에서 뜨거운 서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 시인 소개
백수인
1954년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 기산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수료했고, 전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대 국어교육과에서 정년퇴임했다. 한국언어문학회 회장, 한국어문학술단체연합 대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5・18기념재단 이사,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2003년 『시와시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현대시와 지역문학』 『소통과 상황의 시학』 『소통의 창』 『장흥의 가사문학』 『기봉 백광홍의 생애와 문학』 『대학문학의 역사와 의미』, 시집으로 『바람을 전송하다』가 있다. 현재 ‘시와시학’, ‘원탁시’ 동인이며, 조선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이다.
■ 목차
제1부
섣달그믐 / 아버지의 가지산 / 톱 / 노루발 / 눈 내리는 아침 / 아버지의 일기장 ─ 유배 / 아버지의 일기장 ─ 마당 / 아버지의 방 / 어느 봄날의 쓸쓸함 ─ 바람과의 전쟁 / 남바우들판 건너기 / 시인의 무덤 / 고사리 꺾기 / 벌목 / 아버지의 손목시계
제2부
겨울 울란바토르 / 문 ─ 광동대협곡에서 / 소 발자국 / 궁전의 새 ─ 터키 여정에서 / 병마용갱 / 고로쇠나무 / 몽골 설원에 서서 / 두만강변에서 부르는 노래 / 혼불의 비행 ─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다 / 몽골의 칭기즈칸 / 출발 지연 /그리운 금강산 / 검은 목소리
제3부
눈썹은 칼이다 / 옹이 / 동적골 연리목 / 사위질빵 / 풀독 / 뜬구름 / 단풍나무의 근육 / 땅굴 속 풍경 ─ 대장내시경 검사를 하다 / 더글러스 퍼 널빤지에게 / 등나무꽃 / 홍시 먹기 / 절벽 아래에도 매화는 피는가 / 눈썹달과 여우 꼬리 / 꿈 이야기 / 민들레 홀씨 / 강아지풀 / 한삼덩굴
제4부
기양사 자목련 / 사자산 / 석대벌 여장군 / 오월의 분수대 / 나는 지구다 / 정남진에서 하얼빈까지 / 한라산 기슭에서 무등을 바라보네 / 억불바위 / 두만강으로 달려간다 / 목장갑 한 짝 / 너럭바위 / 주먹밥 / 평화에 대하여 / 헬리콥터 / 징검다리를 건너며
작품 해설 : 무한한 보편성의 언어 - 손남훈
■ 시인의 말
대대로 10대를 이어온 고향집을 이제 내가 지키게 되었다. 마당가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기도 하고,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도 한다. 유년 시절 걷던 논길이 있고, 뒤 사립을 열고 나가 손발을 씻던 그 도랑물이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산등성이 솔숲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도 여전하다. 담장 옆 붉은 동백이 피었다 지고, 돼지우리 뒤 감나무도 연초록 잎사귀를 틔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인가 정지해 있는 것인가.
유년 시절 나를 감싸던 솔바람은 나에게 ‘시’를 데려다주었고, 나는 그와 함께 한 생을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그는 나에게 꾸준히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쉴 수 있는 집까지 마련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키워준 그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드려야겠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로 나뭇잎들이 출렁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올여름 밤엔 앞마당에 평상을 펴놓고 반듯이 누워 수많은 별들의 반짝이는 몸짓을 내 가슴에 담뿍 담아야겠다.
■ 추천의 글
백수인 교수의 시 속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나지막하면서 손에 잡힐 듯 낮게 떠 있는 샛별처럼 반짝인다. 그의 시는 바람을 전송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불러온다. 전남 장흥 산골의 대숲에서 시작한 바람은 북만주 시베리아 벌판까지 따뜻하게 전해진다. 그가 보았던 연해주 조선족들 그리고 두만강의 건너 조선 봄날의 살구꽃처럼 밝고 힘차다. 조선대학교 뒤에 우뚝 선 광주 무등산같이 그의 시는 든든하다. 그의 시는 환하고 밝다. 슬픔을 녹여내어 영롱한 이슬을 만들 듯 용광로 속에 쇳물처럼 그의 시는 부드러우면서 강한 느낌을 받게 한다. 시인은 많지만 믿음을 주는 시인은 흔치 않다.
― 김창규(시인, 목사)
백수인의 시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감개함과 온축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이력과 그의 순박한 사람됨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는 그의 시가 시적 기교보다는 높고 깊은 시의 뜻(志)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 연유한다. 그의 시편을 읽고 있으면 그의 고향 장흥 정남진의 바다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그의 시가 간난한 가족사, 자연과 생태, 역사와 저항 등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해불양수(海不讓水)의 포용과 억불(億佛)의 정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고향집 정갈한 마당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바람이 일렁이는 동안 그는 “잔별 가득 영혼처럼 반짝이는 샘물을 길러” 은미하고 절제된 장천(章泉)의 시경을 이루었다. 그의 문장에는 “누천년의 번개가 살고 원시의 비바람이 가득 들어” 있고 “강물과 바다가 불렀던 태고의 노래가 깃들어” 있다. 이제 백수인의 시는 그의 고향 아버지의 가지산(迦智山)과 남바우들판과 사자산 너럭바위의 뜨겁고 영원한 숨결이 된 것이다.
― 나종영(시인)
■ 작품 세계
백수인 시인의 시는 시공간의 무한한 확장이라는 서정의 본질적 요소에 충실하다. 다시 말해, 왜 서정적 세계관으로 진술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서정이라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형식, 그 자체에 매몰된 언어 나열이 아닌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백수인 시인의 시편들은 시간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비약적으로 오가며, 공간적으로 주체의 자기보존 지점을 넘어서 보다 커다란 지평을 향해 확장되어가는 시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시적 스케일의 구심점에 언제나 자기 자신을 두고 있어 서정의 자기 본위에 충실해 있다. 이때 구심점으로서의 자기 자신이란, 대상에 대한 상실과 회복을 시인이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아 → 대상 → 세계로 확대되어가는 시적 이미지를 통해 서정이 지닌 자아의 무한성을 구축해가고 있는 것이다. 백수인 시인의 독특성과 보편성은 이와 같은 시세계 구현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시인은 「너럭바위」, 「뜬구름」, 「단풍나무의 근육」 등 직접적으로 ‘앎’이나 ‘깨달음’을 진술하는 시편들뿐 아니라 시편 곳곳에서도 대상에 대한 섬세하고 직관적인 ‘견성’의 시선으로 자아와 대상 사물의 변화를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를 보편적인 미적 감성이나 시대 인식으로 제시하여 그 시적 풍격을 높이고 있다.
흔히 서정시는 따분하다고 말한다. 서정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고도 한다. 서정은 타자를 말살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서정에 대한 비난이 조각난 자기 인식과 깨어진 사물을 무질서하게 나열하는 언어 유희들에 대한 적확한 변명일 수는 없다. 서정(poetry)이 잘못된 게 아니라 서정시(poem)가 잘못된 것이다. 서정은 죄가 없다. 기실 우리는 서정의 본질을 궁구하지 못한 채 그저 타성적으로 쓰여진 시 아닌 시들을 흔히 보곤 한다. ‘거리의 서정적 결핍’이 왜 무한아로 도약할 수 있는지, 무한아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보편적 지평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여전한 시적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시작에 임하는 이를 만나기 쉽지 않다. 백수인 시인의 시편들은 그에 대한 적절한 모범답안을 우리 시단에 제시한다. 자아의 확장은 타자에의 말살이 아니라 타자와의 조우이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 인식 지평의 보편성을 제시하는 서정적 시도임을 그의 시는 보여준다. 백수인 시인은 서정의 서정성에 충실하다.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시의 희귀한 예가 된다. 무한아를 향한 시인의 서정적 노력이 더 많은 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 손남훈(문학평론가·부산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아버지의 일기장
─ 유배
흥건하다 땀이 흥건하다 피가 흥건하다 고통이 흥건하다 걱정이 흥건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강제로 제주도로 보냈다 사실 보낸 건 ‘시대’였다 아니다 아버지의 작은 가슴이었다 제주행 비행기는 취해 비틀거렸다 프로펠러가 가끔 헛돌았다 짙은 구름이 프로펠러에 감겼다 풀리곤 했다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섬들이 하나 둘 하늘로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섬들이 다시 조용히 가라앉고 흰 구름이 흐믈흐믈 녹아내릴 때 늙은 새는 가지에 겨우 앉았다 새가 가지에 다다르자 차디찬 사슬이 아들의 온몸을 가두었다 한라산 꼭대기 떠도는 구름이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주 시가지는 멀쩡한데 성판악 부근엔 폭우가 내렸다 5·16 횡단도로가 바람에 뒤뚱거렸다 도로엔 이념 감옥의 죄수들, 땀과 피가 흥건했다 도로는 이미 산을 둘로 쪼개놓았다 성판악에선 간혹 카랑한 총소리가 골짜기를 둘로 쪼개곤 했다 그때마다 한라산이 순간 움푹 파이곤 했다
천지연폭포는 끊임없이 산을 토해내는데 산은 ‘시대’처럼 물처럼 지리하게 흘렀다 그리하여 마지막 바다에 닿는 것은 늘 흥건한 부끄러움이었다 파도는 너무 게으르게 철석거리며 슬픈 뱃고동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저승 같은 이어도가 저만치서 자꾸 손사래를 쳤다
더글러스 퍼 널빤지에게
당신은 캐나다 어느 눈 내리는 숲속에서 잠을 깨고
선선한 바람 속에 다시 잠이 들었겠지요
빅토리아 항구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당신은 소금기 짙은 바닷바람에 등을 말리고
화살처럼 쏟아져 박히는 햇빛들을 온몸으로 맞았겠지요
부산항에 닿아 남해고속도로를 따라와
당신은 드들강 가의 어느 제재소에서
둥근 몸을 틀어 가슴 넓은 바다의 물결이 되었겠지요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인연은 거기부터였지요
당신이 나를 따라 무등산 자락 아파트로 온 거지요
그리곤 내가 밤낮으로 퍼 나르는 학문과 예술
그 궤도의 무게를 감당하는 침목이 되었지요
이제 수십 년 짊어진 짐을 놓으시고
내 고향 집에 가서 함께 사시지요
당신의 피부에 켜켜이 쌓인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가루들을
깨끗이 털어줄게요
당신에게 주어진 각진 모서리들을
부드럽게 깎아드릴게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살결 고운 무늬를
이제 도드라지게 해드릴게요
부드럽게 물결져 흐르는 푸른 하늘 속 흰 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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