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른사상 미디어서평

[한겨레] 최기종 시집, <목포, 에말이요>

by 푸른사상 2021. 2. 3.

 

“가슴 철렁했던 ‘에말이요’ 이젠 살가우니 목포사람 다 됐네”


“다짜고짜 ‘에말이요~’ 하면 가슴이 철렁혔어.”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최기종(65) 시인은 지난달 31일 “처음 목포에 와서 ‘에말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시비 거는 줄 알았다”고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혔제. 혹여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닌지 싸게 머리를 굴려야 혔어. 왜 그따위로 싸가지 없이 허느냐로 들렸거등.”

 그런 그가 최근 시집 <목포, 에말이요>(푸른사상)를 펴냈다. ‘에말이요’는 ‘내 말 좀 들어보라’는 뜻의 남도 사투리다. 아랫사람이 쓰면 실례가 되고, 부부간에 살갑게 쓰기도 한다. 시집에는 토속적 사투리로 목포의 민중과 역사, 지명과 음식을 풀어낸 시 60편을 실었다. 시들은 마치 한편의 판소리처럼 엮여 목포를 낯선 곳에서 정든 곳으로, 나아가 그리운 공간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가 목포를 맴돌며 지낸 30년 세월을 담금하고 그 위에 간을 쳐서 짭짤하게 목포식으로 차려낸 밥상인 셈이다.

남도사투리 ‘목포, 에말이요’ 시집
‘내 말 좀 들어보라’ 뜻 몰라 당황
민중·역사·지명·음식 담은 60편
“힘·기쁨·위로가 되는 시 쓰고파”
부안 출신 1985년 교사로 첫 인연
해직시절 등단…퇴직하고도 정착

“목포살이 오래 허다 봉게 이제는 ‘에말이요∼’란 말이 얼매나 살가운지 몰라.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말이요∼’ 이리 부르면 솔깃 여흥이 생길 정도여. 이제 목포사람 다 되야서 ‘에말이요∼’ 아무나 붙잡고 수작을 부리기도 헌당께.”
그는 ‘국도 1호선 시발점’, ‘호남선 철도 종착역’인 목포를 “아무리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곳, 세상살이 힘들어지면 문득 찾아가고 싶은 곳”으로 느꼈다. 이어 “낙지발처럼 쩐득거리고/ 감성돔처럼 낭창낭창허고/ 꽃게 살처럼 감칠맛 나는 곳이야/ 홍탁에 볼이 붉어지고/ 갈치속젓에 혀가 웃고/ 생선 지리에 속이 확 풀려버리는 곳이지(…) 그렇게 아롱 젖는 노래가 있어서/ 그렇게 구성지고 게미진 입들이 있어서 목포는 항구인 거야”라고 노래한다.
목포의 이름난 먹거리 홍어를 두고는 “야를 묵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말을 듣고/ 근접하기 어려운 경건함을 느꼈다(…) 야를 삼합으로 묵어야만/ 비로소 통일이 된다는 말을 듣고/ 혐오, 증오, 역겨움 같은 것 그냥 견디고 씹어야 했다”고 찬미한다.

 

일제 강점기 의로웠던 목포사람들도 꼼꼼하게 들춰냈다. 시 안에는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이 나섰던 목포 4·8 독립만세, 6할의 소작료에 600여명이 단식으로 맞섰던 암태도 소작쟁의, 목포항과 목포역 사이에 사재로 다리를 놓았던 소아마비 짐꾼 멜라콩(박길수), 목원동 달동네 비탈길을 누비며 이웃을 도왔던 물장사 옥단이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한테 목포는 아직도 생소한 공간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을 다른 지역에서 보낸 그는 “목포 벗들과 약주도 허면서 잘 지내다가도 행여 용댕이 바다를 건넜다느니, 동목포역에서 공짜 기차를 탔다느니, 유달산 물장시가 어쩠느니, 이런 추억담으로 흐르면 머리가 하얘졌다”고 했다. 풀 죽는 게 싫었던 그의 ‘목포 사랑’은 벗들의 놀림 덕분에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내 고향 당봉리가 그리운디도 여그 머무는 까닭은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귄 벗들이 수두룩하고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산도 바다도 섬들도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목포에서 세상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는 시를 쓰고 싶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애초 목포와 전혀 연고가 없었다.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2년 완도로 첫 발령을 받았고 3년 뒤 목포로 들어와 항도여중, 청호중, 제일여고, 목포공고, 목포상고 등에서 가르쳤다. 목포에서 뜨거운 6월항쟁을 겪었고, 이듬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가 해직돼 4년 반을 떠돌아야 했다. 이후 목포에서 교육운동과 시민운동을 펼치다 복직했다.


“전교조 결성 때 교직을 떠날지 남을지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섰지. 해직을 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글을 쓰고 싶어서였어. 그때 한참 글이 나오려 했었거든. 그런데 동지들 만나야지 집회에 나가야지 바빠서 글쓰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는 1992년 교육문예 창작회지에 시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슬픔아 놀자> 등 시집 6권을 냈다.

 

시집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에 실린 시 ‘은어 떼’는 그가 어떤 교사인지 엿보게 한다. “아이들을 은어 떼로 여겼더니/ 내 썩은 가슴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내가 강물이라고/ 아이들의 여린 등을 밀어주는/ 잔잔한 강물이라고 다짐했더니/ 아이들의 등에서 지느러미가 자라났다.…”

 

2014년 명예퇴직했지만 그는 목포를 떠나지 않고 벗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문예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목포작가회의 지부장과 전남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을 지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 관련 작품을 썼다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는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에말이요’라는 방언에는 언어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담겼다. 표준어를 뛰어넘는 민중들의 정서 전통 풍습이 두루 녹아 있다. 시인은 ‘에말이요’라는 토속어를 연결고리로 삼아 목포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평했다.

한겨레, “가슴 철렁했던 ‘에말이요’ 이젠 살가우니 목포사람 다 됐네”, 안관옥 기자, 2021.2.2

링크 : www.hani.co.kr/arti/area/honam/981543.html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