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세계
정세훈은 데뷔 이후 지금껏 민중의 ‘생활주의’를 구현하는 시편들을 써온 시인이다. 민중의 생활주의적 감각에 근거한 정세훈의 시적 행보는 1990년대 이후 우리 시단에서 희유(稀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맑은 하늘을 보면』(1990)을 비롯한 다수 시편들에서 정세훈이 보여준 이러한 민중의 생활주의는 일상의 노동 경험을 상상력의 젖줄로 삼아 특유의 소박성과 원시성의 미학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러난 바 있다.
정세훈 시 고유의 이러한 미학적 특징은 1989년 『노동해방문학』 5월호에 발표한 데뷔작 「별따기」와 초기 대표작 「맑은 하늘을 보면」 같은 시들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맑은 하늘을 보면 / 걱정이 생겨/슬픔도 생겨/어디선가 갑자기/구름들이 달려와/하늘을/온통 덮어버릴 것만 같구먼.”(시 「맑은 하늘을 보면」 전문) 저 하늘의 “맑은 하늘”을 보면서도 “구름들”로 표상되는 갖은 생활난(生活難)을 예감하는 정세훈의 생활주의적 태도는 고된 노동과 질긴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는 시적 감각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이 시에 드러난 “맑은 하늘”의 이미지는 갖은 기교를 동원한 어떤 시적 표현보다 소박하지만 강렬한 심상으로 당대 독자들의 내면에 육박하는 시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정세훈 시의 이러한 민중적 생활주의는 온당한 비평적 관심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소위 ‘투쟁’의 국면을 갖고서 민중의 실체를 보려 한 1980년대 문학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新)서정의 문법과 미래파의 새로운 감각에 요동쳤던 1990년대 시단에서도 민중의 생활주의는 비평적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가령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1980년대 노동시의 성과를 말할 때, 박노해와 박영근을 먼저 언급하는 것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
신작 시집 『부평 4공단 여공』은 마침내 ‘자기의 시대’가 도래한 시인의 시적 비전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정세훈이 지향하는 시적 비전은 한 마디로 말해 ‘좋은 노동’(good work)에 관한 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현장 체험에서 발병한 병마(病魔)와 오래도록 싸우며 죽다 살아난 시인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과 사유 과정이 행간마다 묻어나기에 감히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시인 또한 「시인의 말」에서 “재생된 삶이니 더욱 공공선(公共善)에 투신하고 헌신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던가.
시집의 3~4부 시편들은 어느 시의 표현처럼 “서울 변두리 김포시/종합병원 7층 흉부외과 병동 침상”(「오월 흰 구름」) 위에서 쓴 이른바 ‘통증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병동 침상 위에서도 정세훈 시인은 “살고 싶다/정말 살고 싶다”라고 절규하는가 하면, “살려만 주신다면/인간답게 살겠다고/나보다 더 힘든 이를 위해/헌신하는 삶을 살겠다”(「혈관에 스며드는 마취제처럼」)는 고통에 찬 실존의 내면풍경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처절한 실존의 육성과 기록이 있기에 1~2부 시들에서 보이는 좋은 노동에 관한 시적 사유와 행동이 역설적 진리를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 「맑은 하늘 하나 낳아보리」와 「바다」는 정세훈 시인이 바라는 좋은 노동에 대한 태도가 자연물에 가탁되어 표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시편들에서 ‘하늘’과 ‘바다’가 수행하는 순정한 무위(無爲)의 노동에 관한 시인의 시선의 전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픈 상처/어루만져 주어//공존의 마을을/이루는 것//무지개로/마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바다」)이라는 순정한 시적 인식이다. 이것이 곧 자연이 묵묵히 수행하는 좋은 노동에 관한 시인의 시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인식 때문일까. 정세훈 시에 등장하는 ‘하늘’의 이미지 또한 저 1980년대 노동시와는 다른 구름 한 점 없는 말 그대로의 “맑은 하늘”을 “그대”와 더불어 함께 낳아보자는 적극적 연대의 감수성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점이 초기 시와는 변화한 정세훈의 시적 전환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자신의 온몸을 동원하여 촉감(觸感)을 활용하려는 민중의 생활주의적 감각과 태도는 여일하다. 어쩌면 정세훈은 그런 시인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 고영직의 해설, 「‘풍만한 노동’을 위한 시적 상상력」 중에서
* 추천의 말
그의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는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그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한다.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던 도도한 숨결들이” 떠나가고 보이지 않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의 아픔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 “내 시가 너무 고상하다”고 탄식하지만 그는 목청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살려 주십시오/빈다/나의 신께 빈다/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죄/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죄/공장에서 병든 죄를/까닭 없이 지었으나//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으며/부러워하지 않았으며/게으름 피우지 않았으며/열심히 땀을 흘려 살아왔으니” 하고 기도하듯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선 그의 시에는 푸성귀 같은 생기가 있다. 2006년 그가 생을 정리하듯이 내놓은 시집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이후, “재생된 삶이니 더욱 공공선(公共善)에 투신하고 헌신하며…… 졸시들이 거기에서 벗어나 곁눈질하지 말기를 기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의 다짐을「실직」「푸성귀」같은 시에서 확인하거니와 일찍 세상을 앓다 간 박영근에게 보여준 각별한 애정에서도 그것을 확인한다.
- 정희성(시인)
이십여 년 전에 정세훈은 이미 “시인은 노래하지만/나는 노래하지 않아/(……)//이 한세상을/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지/그저 이야기할 뿐”(「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이라고 쓴 바 있다. 이번 시집 또한 얼핏 보면, 유구한 가난의 가계사를 걸머진 채 병고에 시달리는 한 노동자 가장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지’를 ‘그저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라. 섧고 고달프고 분한 고비에서도 시선과 목소리에 진실함을 잃지 않고자, 사람에 대한 미움에 발목잡히지 않고자 그가 어떻게 애쓰고 있는지를.
그 애씀의 한 끝으로 「엄동설한」「어머니가 우신다」「첫사랑」「야릇한 통증」같은, 투명하여 가슴 아픈 가편(佳篇)들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여기저기 피어나 있다.
얼마나 힘센 소박함인가. 얼마나 무서운 선량함인가. 무엇이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 김사인(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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