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최기순 시인이 11년 만에 내놓은 첫 시집이다.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의 모성이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주름’을 ‘물결이 찰랑찰랑 넘치는’ 존재의 우주적 순환원리를 내포한 ‘그늘’로 치환해내고 있다. 환유와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읽는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해주는 근래 보기 드문 시집이다.
1. 시집 내용(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나쁜 시간들
버터
어족들
닭고기 스프
소
바람에 잎사귀들이
그 물가에서
오래된 연인
음표들의 집
구름 보는 사람
봉지들
내 입김이 잠깐 유리창을 흐렸다
먼 바다를 돌아온 뱃사람
그늘론
무늬
제2부
목련나무
발굽들
타인의 고통
조용한 대낮
배나무가 있는 풍경
월계동의 기억
흰 구름 한 송이
족보
용담꽃
튤립이 필 때
그 여름의 낮잠
아버지의 저녁
한 나무에게 가는 길
숟가락
퐁퐁 병
제3부
흰 소와 푸른 얼굴의 사나이와
기타리스트의 연인
그녀들
나의 켄터키 시절
창
사과
소나기
진달래
아그배나무
물달개비
발자국
물방울
메타세쿼이아
안산역
피리를 갖고 싶다
제4부
관곡지
물양귀비
동태국 끓이는 저녁
최후의 손
새집
수박선인장
늙은 고라니
손가락 자국
아름다운 숲
군자란
월화수목금토일
어미 목(木)
첫눈
굴참나무 기둥
딸기나무
영계백숙
해설 푸른 발굽의 시간-이재복
2. 시인 소개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2001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새」 등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오후 4시’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3. 시세계
최기순의 시에는 시간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 시간은 순전히 시인만의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시 속의 시간이 자신만의 독특한 시적 정서와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시간이 시인 자신만의 독특함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평범하거나 개념화된 시간의 세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시간이 독특한 것은 여기에 그늘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그늘 혹은 그늘의 시간은 아주 섬세하면서도 끊임없는 흐름을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그늘은 변화의 속성인 음과 양을 모두 지니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그늘하면 우리는 단순하게 밝음에 대한 대비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는데 기실 이 그늘 속에는 밞음과 어둠이 함께 공존한다. 밝음과 어둠, 다시 말하면 음과 양의 공존으로 시간은 실체성을 지니게 된다.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거나 ‘그늘이 세계를 만든다’라는 말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늘의 세계에서는 변화지 않는, 늘 그대로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늘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늘의 세계에 있는 시인에게 지각되는 모든 대상이나 사물은 생명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지각장 속에서 그것이 ‘버터’든 아니면 ‘어족들’이든 모두가 현상으로 드러날 뿐이다. 시인의 지각 장 속에서 버터는 ‘말과 말 사이의 각을 미끄러트리고 주전자와 입 사이의 컵 집행관들의 모자 속을 유유히 흘러 다니는 유체 혹은 지느러미’(「버터」)이고, 어족들은 ‘저마다 뻐끔거리는 아가미와 살랑이는 지느러미’(「어족들」)를 지닌 존재일 뿐이다. 버터와 어족들의 경우처럼 하나의 현상은 하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현상은 개념화는 물론 거짓된 차원을 넘어 진실 혹은 진정성의 차원으로 드러나기에 이른다. 시인은 자신이 지각한 세계를 시 속에 풀어놓는다. 그 풀어놓음이 바로 시인이 지각한(체험한) 현상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시인이 풀어놓는 세계가 응어리지고 그늘진 시간 속에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번 생은 너무 엉클어졌어요’(「나쁜 시간들」)라고 고백한다. 시인의 고백 속에는 자신의 생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시인의 엉클어진 생은 ‘나쁜 시간들’로 존재하면서 시인의 주의와 관심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평소 주의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현상의 장 속에서 탈은폐된다는 그만큼 그 세계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의 엉클어진 생은 반드시 엉클어진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급하게 집어먹은 날들을 토해 버리려는 것’(「어족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이 경험한 엉클어진 생과 급하게 집어먹은 날들은 지각의 장에서 깨끗하게 사라질 수도 또 깔끔하게 정리될 수도 없다. 시인의 몸속에서 그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시퍼렇게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것을
흰 갈기도 우아한 준마인지/혹은 반인 반마/황금 소나기 메뚜기 떼였는지/다만 그 발굽 아래/얼굴을 목을 가슴을 밟혔던 기억//장수한 거북이들과/만장일치의 깃발들/지나가는 발자국들마다/촉수 세운 혈관 위에/통증 아닌 것들 없이//사랑할수록 사나워져서/즐겁게 당연하게
한 번 더 치명타를 먹이며/넘고 또 넘어오는 수천수만의- 「푸른 발굽들」 부분 인용
에서 알 수 있듯이 ‘푸른 발굽들’로 표현해내고 있다. 시인은 그 발굽들에 자신의 ‘얼굴, 목, 가슴을 밟혔던 기억’(「푸른 발굽들」)을 되살려 낸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기억이란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그 기억을 ‘넘고 또 넘어오는 수천수만의 발굽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얼굴, 목, 가슴 곧 몸을 짓밟았던 수천수만의 발굽들은 단순한 기억의 장이 아닌 감각의 장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 자신의 몸을 밟았던 아니 밟고 있는 수천수만의 발굽들을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감각인 것이다. 기억과는 달리 감각은 단절이 아닌 연속의 형태로 존재한다. 감각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시인이 수천수만의 발굽들에 짓밟혔던 기억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또는 미래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그 발굽들이 현재의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 현재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푸른 발굽들’은 시인의 상처를 상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상처가 기억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푸른’과 ‘발굽’이 상징하듯이 지금 이 순간(현재)에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감각성을 드러낸다. 푸른 발굽들로 상징되는 시인의 상처가 시퍼렇게 살아 날뛴다는 그러한 감각의 연속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며, 그 흔적이 바로 ‘주름’이다. 시인이 세계의 존재성을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곧 시간이 주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간이 주름이고 주름이 시간이라면 그 주름만큼 시간의 존재성은 견고해진다. 푸른 발굽들로 이루어진 시인의 상처의 이면에는 이러한 견고한 시간의 존재성 곧 주름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주름은 견고한 시간 혹은 견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시인의 징표이다. 상처가 깊으면 주름도 깊어지고 또 그만큼 존재성도 견고해지는 것이다. 왜 시인이 ‘그녀들이 믿을 건 시간뿐이에요 난간들이 회색빛으로 낡아 가는 동안 눈치 빠른 날들은 얼마나 익숙하게 주름을 접어가겠어요’(「그녀들」)라고 했는지 또 ‘칸나의 목구멍은 붉고 깊어서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와요’(「나의 켄터키 시절」)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이번 시집이 개념이나 관념이 아닌 감각과 지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를 좀 더 현상적으로 발견하고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많은 시인들이 세계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의미를 지나치게 자신의 관념이나 개념화되고 도구화된 틀에 의존해 들추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에 대한 시적 감성이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시인이 세계와 진정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그것을 현상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어떤 도구적 연관성도 없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기순 시인의 시적 태도는 이런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푸른 발굽으로 표상되는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우리는 ‘그리운 통증’(「물양귀비」)처럼 밀려오는 그녀의 상처를 체험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좀 더 구체화되고 선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늘의 속성과 세계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 있고 강렬한 주의와 집중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이재복(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4. 추천의 글
최기순 시인의 시를 읽으면 사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가 집어낸 황무지 같은 우리들의 삶의 현실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최 시인은 때론 시니컬하게, 때론 지독하게 우리 삶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겠지만……. 그래서 그의 시는 ‘으슥한 그늘의 시간 속으로’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시인은 삶의 부정적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리면서도 용케도 견뎌낸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를 읽어가며 그 통증을 통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최기순 시인의 시는 편치 않게 시작되지만 결국은 통증을 통증으로 끝내지 않고 마음을 쓸어내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상상력이 미치고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칼로부터 시작하여 미치도록 푸른 하늘로, 철쭉꽃잎에서 닭고기 스프로, 까만 비닐봉지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그의 상상력의 자유로움이 시를 읽는 재미를 흠뻑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이 아닐까?
최기순 시인의 시는 읽는 재미를 줄 뿐 아니라, 생각의 심연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다. 사실 사고의 과잉은 자칫하면 시를 관념적이게 만들지만 최 시인의 시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이를 극복해내고 있다. 현상, 시간, 질량과 같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까지도 유리창을 통해 잘 형상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최 시인이 진정으로 사물을 사랑하는 눈으로 깊이 있게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 시인의 시는 쌀쌀한 겨울 초저녁 어스름 속 희미한 별빛 혹은 숲 속 머언 곳에서 새어나오는 상징의 불빛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박상천(시인, 한양대학교 교수)
최기순 시인의 첫 시집 『음표들의 집』 속엔 창조적 삶의 원천이자 가장 숭고한 정신의 근원으로 모성, ‘온 우주의 바닥에 철썩이는 물소리’로 대변되는 모든 것의 어머니로서 무의식이 꿈틀대고 있다.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꽃과 나무 등 식물적 이미지들 역시 그렇다. 이러한 식물 세계에 뿌리를 둔 ‘모계의 버릇’은 모든 존재들을 먹여 살리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위대한 어머니’의 부활로 이어지며, ‘나쁜 시간들’과 깊은 ‘그늘’의 시간 속에서 ‘줄기의 상부’에 피워낸 ‘군자란’은 그녀가 마침내 도달한 영적 발달을 나타낸다. 우린 지금 모든 생명을 거두거나 출산하는 대지에 우뚝한 세계의 나무로서 그녀가 쏟아내는 ‘음표’또는 ‘피리’ 소리에 즐거이 붙들려 있다.
- 임동확(시인,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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