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무를 겸한 여섯명의 현장 전문가가 묶은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
“문화콘텐츠는 고전의 유산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분야”
[MHN 주현준] 영화, 드라마, 공연, 축제, 게임,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콘텐츠에 관한 대중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의 문화콘텐츠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능력과 영역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매체와 플랫폼이 다양해졌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바야흐로 문화콘텐츠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문화콘텐츠에 활용되는 고전의 의미를 탐색한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가 <푸른사상 문화콘텐츠 총서 17>로 출간되었다. 각각의 분야에서 실무와 연구 경험을 쌓은 여섯 명의 저자들은 모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문들이다. 오페라, 연극, 창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장의 전문가들을 통해 고전이 어떻게 콘텐츠로 용해되어 매체와 장르의 원리로 작용하는지 좌담의 장을 펼쳐 보았다.
사회 : 주진노 발행인
좌담 : 곽이삭, 김공숙, 백운기, 윤필상, 이동형, 홍상은
“고전은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소환된다는 특징이 있어”
사회 :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 제목이 무척 재미있고 뭔가 딱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본 실제 사례로는 어떤 게 있을지 궁금합니다. 실제 본인들이 쓴 내용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주면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백훈기
백훈기 : 고전은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소환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극은 상연되는 시대의 관객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연극은 최초의 발표 때 호응을 얻지 못하면 후대에 널리 전해지기 어려운 경향이 다른 장르에 비해 큽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성공했다고 이후의 시대에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고전을 상연 시대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극의 시초라고 하는 그리스 연극 역시 그리스의 신화를 활용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소통 방식으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 연극을 무대화하는 여러 시도들 역시 원작이 그려내는 인간 행위의 보편성을 변화된 환경 속에 사는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를 중시합니다. 희곡이라는 텍스트와 상연이라는 행위가 공존하는 연극 분야에서는 고전 작품의 무대화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작품의 성패는 오늘날의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달려 있구요.
곽이삭
곽이삭 : 고전이라고 하면 흔히 고전 소설과 같은 작품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전의 의미에는 분명 ‘전통적인 사고나 양식’도 포함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놀이’를 고전의 하나로 보았고, 놀이의 본질이 어떻게 유지되며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놀이는 즐기는 연령대가 성별에 관계 없이 확대되고 있어, 향유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때문에 놀이를 즐기는 향유자들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포맷의 놀이가 생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프라인 놀이가 자연스럽게 온라인 놀이로 변화되고 있는 점이나, 연령대의 취향과 취미를 고려한 TV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편성되고 있는 점들을 보면, 놀이는 기술을 기반으로 향유자들의 취향에 맞게 콘텐츠화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윤필상
윤필상 :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성취에 주목한 연구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문화의 규범으로 인식된 고대 문명의 부활을 추구했던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으며, 새로운 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의 결과물이기도 하지요. 16세기 말 피렌체의 지식인 그룹 카메라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이라는 고전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음악극 양식인 오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김공숙
김공숙 : <별그대>가 중국에서 뜻하지 않은 대성공을 한 것은 그들에게 익숙한 사랑 이야기의 원형을 현대적으로 잘 변용했기 때문입니다. 도민준은 외계인 남성인데 지구별의 여성 천송이를 사랑합니다. 한나라 때부터 내려온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사랑 이야기 이류(異類) 연애담의 변용이고, 이류 중에서도 민준은 하늘에서 온 초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 인신(人神) 연애담입니다. 로맨틱코미디드라마의 중국적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의 특징도 녹아 있어요. 재밌는 것은 재자는 ‘꽃 같은 외모’에 감정이 풍부한데, 도민준도 예쁘장한 외모에 사랑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반면 가인은 강인하고 적극적인데 천송이가 그렇지요. <별그대>의 결말은 민준이 우주의 웜홀로 자꾸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둘이 계속 함께 있지를 못하는 불완전한 해피엔딩인데, 견우직녀설화의 변용입니다. 견우직녀는 칠월칠석에 만나지만 민준과 송이는 함께 있어도 언제 헤어질지 모르기에 더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되지요.
홍상은
홍상은 : 창극은 본래 전통극으로 고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장르입니다. 창극 <적벽>, <내 이름은 사방지>, <트로이의 여인들>, <흥보씨> 등 많은 작품들이 고전을 가져다 공연작품을 만든 예이지요. 한국의 고전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고전도 창극의 소재가 되곤 합니다. 최근 우리네 삶도 소재와 주제가 되곤 하지만 고전은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형
이동형 : 문화예술 공론장의 고전이라면 그리스 로마시대의 아고라(Agora)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근대사회로 접어들면 프랑스의 살롱과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해당될 것입니다. 이런 문화예술 공론장의 고전은 현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의 발달과 새로운 시민계급의 등장에 따라 형태만 달라졌을 뿐 살롱과 커피하우스의 문화예술 공론장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은 21세기 인터넷 시대에도 영역을 확장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 카페와 지역 중심 문화예술동호회가 그 ‘후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전은 문화콘텐츠를 통해 인간의 행동 양식에 깊은 영감을 줘”
사회 : 더 나아가 고전을 모방하려는 본능에서 문화콘텐츠가 출발했다고 했는데 문화콘텐츠는 왜 고전을 가져다 쓰는 것이며, 그 기대효과는 무엇인가요?
윤필상 :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매체와 장르는 고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의 모든 문화와 예술은 그것의 뿌리를 고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의 특징을 모방하고 이야기의 구조, 형식을 빌리는 등 대부분의 콘텐츠는 옛것에서 힌트를 얻거나 재해석하는 거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기술의 영역을 흡수한 뉴미디어조차도 고대 혹은 근대 문화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성장했습니다. 즉 문화콘텐츠는 고전의 유산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백훈기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듯 연극은 인간 자체를 다룬다기보다 인간의 행위를 다룹니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의지와도 연관되지만 목표를 방해하거나 지지하는 등의 다채로운 환경의 영향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은 과거와 오늘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은 이러한 맥락을 성공적으로 그려냅니다. 인간과 환경과 그 역학 관계에 대해 고전이 보여주는 성찰과 성과는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콘텐츠에서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깊은 영감을 줍니다. 오늘날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입맛이 당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김공숙: ‘문화콘텐츠’는 대중의 관심과 보편적인 사랑 없이는 존재 가치가 희미해집니다.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바로 고전이지요. 고전은 인간 심리의 보편성이 담겨 있기에 시공을 초월해 사랑을 받습니다. 창작자는 고전에서 주제를 선택하여 자기만의 발견으로 해석하여 콘텐츠를 내놓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콘텐츠에 공감하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지요. 주의할 것은 고전에서 차용해야 하는 것은 ‘원형(原型)’ 즉 그 안에 담긴 가치나 정신 구체적으로는 모티프나 메시지입니다. 시대정신이 다른데 그대로 가져다 쓴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고전에 담긴 보편성을 시대에 맞게 잘 변용해야 ‘익숙하면서도 낯선’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놀이가 교육, 공연, 축제에도 많이 접목되고 있는 추세”
사회 : 고전이 대중문화인 영화, 드라마, 공연, 축제, 게임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는데, 미래에는 어떨까요? 문화콘텐츠에 영향을 미치는 고전의 역할은 변함이 없을까요?
곽이삭 : 아마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놀이를 즐겨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놀이가 갖는 ‘무상성’이라는 특징이, 놀이를 일의 반대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특정 놀이를 즐기지 않는 비향유자들의 생각도 어느 시점에는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놀이의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게임에 있어서 강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요즘은 놀이가 교육, 공연, 축제에도 많이 접목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추세로 놀이가 접목된 콘텐츠가 늘어난다면, 자연스럽게 놀이 향유자가 많아지지 않을까요?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지금까지의 놀이 확장이 그래왔듯, 새롭게 놀이를 접한 세대의 향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콘텐츠 종사자가 되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현상도 예측 가능합니다. 놀이를 하면 즐겁기 때문에 삶에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놀이는 문화콘텐츠에 계속해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백훈기 : 성서에서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아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도 모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의 모습을 본땄지만 아담은 신이 아니라 아담입니다. 고전은 모방 가능한 다양한 소스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모방물은 변주되고 독자화됩니다. 인간상, 내용, 형식, 세계관, 문체, 플롯 등등 다양한 모방 가능한 소스는 다양한 대중문화로 스며들어 변주를 만들 것이고, 그 결과물들은 단지 모방물이 아니라 독자적인 '이삭'과 '아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작품들이 살아남게 될 경우 이후 고전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후보 자격을 얻게 되겠지요.
홍상은 : 모든 예술작품이 모방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이런 면에서 고전은 여러 예술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미래에는 지금의 고전을 비롯해 현시대에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새로운 것들이 꾸준히 나타나겠지만 고전이라는 뿌리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문화뉴스, "이론과 실무를 겸한 여섯명의 현장 전문가가 묶은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 주현준 기자, 2020.9.9
'푸른사상 미디어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일보] 윤필상 외,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 (0) | 2020.09.10 |
---|---|
[영남일보] 정대호, <가끔은 길이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다> (0) | 2020.09.10 |
[국제신문] 박정선, <순국> (0) | 2020.09.09 |
[경북매일] 서숙희, <먼 길을 돌아왔네> (0) | 2020.09.08 |
[경북일보] 맹문재 엮음, <박인환 시 전집> (0) | 2020.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