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많은 원폭 피해 여성들의 일생이 다시 책을 쓰게 했죠”
[짬] ‘1세대 여성학자’ 김경애 전 교수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가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뒤에 위치한 원폭피해자 위령각 안 위령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경애 전 교수 제공
여성학자인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5년 전 정년 퇴임하고 이듬해부터 경남 합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을 떠날 때 책이며 필기구까지 다 제자들에게 주었단다. 더는 연구를 하지 않으리란 생각에서다. 남편이 어릴 적 살던 집을 고친 자택 주변엔 200종 가까운 꽃과 나무를 심었단다. 만년은 자연과 벗하리라던 그가 최근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푸른사상)이란 책을 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본 한국 여성 82명의 생애를 구술 자료로 정리한 연구서다. 이 가운데 33명은 귀촌 3년 차이던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그가 직접 만나 인터뷰했고 나머지는 선행 연구 자료를 활용했다. 합천 집에 머물고 있는 저자를 지난 27일 전화로 만났다.
“이곳에 와 깨달았어요. 책 보고 글 쓰는 게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라고요. 교수 때는 해야하니까 한다고 생각했죠.” 그를 다시 연구로 이끈 매개는 합천읍에 있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다. 회관은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서울과 대구를 오갈 때 꼭 지나가는 곳이다. “2016년 여름 <한겨레> 지역면에서 원폭 피해 실태조사를 한다는 기사를 봤어요. 바로 회관 쪽과 접촉을 했어요. 전부터 회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이어 합천에 왜 전국 유일의 원폭 피해 복지회관이 있고, 전국 조직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본부가 있는지도 공부했죠.”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 표지.
자료를 들추며 한국 원폭 피해 여성들이 겪은 고통의 무게도 알게 되었단다. “제국주의는 물론 엄혹한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죠. 세계사적으로도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여성들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 여성사에는 언급이 없더군요.” 구술 인터뷰까지 하게 된 이유다. “제 책은 한국 여성사 측면에서 처음으로 원폭 피해 여성의 삶을 다뤘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여성들이 겪은 고통은? “피폭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이 목이 달아나고 아이가 피폭 때 본 불꽃 트라우마로 평생 다락방 속에 숨어 살았던 세월을 견뎌야 했어요. 시집살이는 왜 그리 엄혹했는지요. 아이를 못 낳거나 태어난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소박을 많이 맞았죠. ‘반쪽발이’라고 손가락질도 당했죠. 자기 몸도 아프면서 아픈 아이가 잘 낫지 않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죠. 이런 비극을 겪은 집단은 전 세계적으로도 없어요.” 통계 하나를 들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비혼 여성은 정상인 취급을 하지 않았죠.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원폭 피해 남성은 90% 가까이 결혼했지만 여성은 60%만 결혼했죠.”
1945년 8월 6일 피폭 당한 한국인 7만 명 가운데 약 2만3천 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생존자는 2300명 정도죠. 그때 히로시마엔 ‘조선인 고향을 묻지 마라’고 할 정도로 합천 사람이 많았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 많이 히로시마로 갔어요. 제가 인터뷰 한 33분 가운데 27분이 합천 연고가 있어요.”
핵은 지금도 한국 사회의 뜨거운 주제다. “원폭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지식을 바탕으로 비핵화 등 핵 정책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분들은 가장 초기 형태 원폭의 피해자입니다. 저도 연구 전에는 피해 참상이 이렇게 끔찍했는지 잘 몰랐어요. 책에서 피해자들의 말을 많이 담은 이유죠.” 그가 인터뷰한 피해자들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2011년 3월)를 보며 특히 괴로워했단다. “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북한의 핵 개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죠.”
고통의 크기 때문에 인터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기록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견딘 것 같아요. 회관 쪽에서도 학자가 구술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우리 역사에서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분들을 기억하는 일은 그분들의 슬픔을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죠. 역사 기술은 치유의 과정이거든요.”
그는 책에서 일본 정부에 원폭 피해 책임을 묻고 보상을 끌어낸 여성 피해자들(고 손귀달, 엄분연, 임복순씨)과 이들을 지원한 일본 여성(이치바 준코 ‘한국 원폭 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 회장)의 용기 있는 행동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는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현재 일본 정부로부터 치료비와 월 30만 정도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며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한·일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
“현재 복지회관 입소 대기자가 100명 정도 됩니다. 피해자분들이 회관에 계시는 걸 좋아해요. 자식에 부담스럽지도 않고 병원과도 5분 거리죠. 대기자분들이 공공 요양원에라도 우선 들어갈 수 있도록 사회가 배려하면 좋겠어요.”
5년 전 동덕여대 정년 뒤 합천으로
‘연구 그만하고 자연과 벗’ 결심
이웃에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봉사하려다 ‘여성 피해자들’ 발견
구술 인터뷰·자료로 82명 ‘기록’
“제국주의·가부장제 이중고통”
그는 이화여대가 1982년 국내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개설한 여성학 석사 과정 입학생 3명 가운데 1명이다. 석사를 끝낸 뒤 만 40살에 유학을 떠나 영국 서식스 대학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신 시절인 1976년엔 해직기자 지원 기금 마련을 위해 손수건을 만들다 구속되기도 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였죠. 재판도 받지 않고 100일 가량 갇혀 있었죠.”
여성학자로서 가장 보람이 컸던 학술 활동을 꼽자면? “요즘 미투 운동이 문학계에서 활발하잖아요. 제가 옛날 문학계에서도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강조해 미투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인용했어요.” 그가 5년 전 펴낸 <근대 가부장제 사회의 균열>(푸른사상)에는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1896-1951)을 다룬 논문 세 편이 들어갔다. “김명순은 독일어로 노래 가사를 쓰고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시 ‘악의 꽃’을 번역하는 등 언어 능력도 뛰어난 작가였죠. 그런데 도쿄 유학 시절 훗날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이응준에게 성폭력을 당했어요. 그 뒤에도 김동인과 같은 근대 문학가들에 의해 2차 피해를 당했죠. 이런데도 현대 여성 문학평론가조차 김명순을 성적으로 문란하고 연애지상주의자였다고 매도했죠.”
‘여성학의 길’에 들어서고 37년이 지났다. 우리 사회의 성 평등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많이 변했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된 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여성들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여성들한테 제가 억압 혹은 차별당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줘야 했어요. 여성들이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말할 줄 알게 된 거죠.”
젊은 세대 일각에서 나오는 여성 혐오 목소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요즘 20대들이 많이 어렵고 불안감이 큰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더 약한 집단에 혐오의 언어로 투영시키고 있어요. 혐오나 대립 대신 함께한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여성들도 권리와 함께 책임도 남자들과 나눠 지겠다는 생각을 해야겠죠.”
계획은? “시골에 사니 평범한 농촌 여성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에서 가난하고 어렵게 산 농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시집살이를 한 이야기는 잘 알잖아요. 하지만 기록은 없어요. 앞으로 천천히 기록하려고 해요.”
-[한겨레], 강성만 기자,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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