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운 성
이천 리의 역정(歷程)과 천 년의 선적(先蹟)
160×230×38 mm(하드커버)|640쪽|48,000원|979-11-308-1236-6 03300 | 2017.11.30
■ 도서 소개
시간을 거슬러 더듬어보는 선세의 행적
그 속에서 되새겨지는 역사의 교훈
여주 이씨 밀양파의 역사를 기록한 『이천 리의 역정(歷程)과 천 년의 선적(先跡)』이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되었다. 고려 시대 여주를 본관으로 삼아 뿌리를 내린 이래 개경과 한양을 거쳐 밀양에 자리를 잡기까지 두 왕조와 근·현대의 풍파를 거치면서도 청명(淸名)과 지절(志節)을 잃지 않았던 한 가문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 도서 목차
■ 서문(序文)
제1부 여주이씨(驪州李氏) 연원(淵源)에 대한 자료
제1장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보급과 본관(本貫)
1. 성씨(姓氏)의 보급
2. 관향(貫鄕)의 생성(生成)
제2장 여주이씨 시조산(始祖山)의 존재
1. 여주향교(驪州鄕校) 앞산 소재설
2. 추읍산(鄒邑山) 기슭 무시곡(無時谷) 소재설
3. 여주읍 서쪽 천녕폐현(川寧廢縣) 소재설
제3장 여주이씨의 세 갈래 시조
제4장 여주이씨의 귀화 성씨설
제5장 실증(實證)이 안 되는 몇 가지 보서(譜書)
제6장 여주 지방 약사
제2부 우리 선세(先世)의 개경(開京) 시대
제1장 우리 가문 상대(上代)의 변천 과정
제2장 대몽항쟁기(對蒙抗爭期)와 중랑장공(中郞將公)의 생애
1. 개경(開京) 진출과 금오위(金吾衛)의 사환(仕宦)
2. 몽고의 침략과 강도(江都) 생활
3.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기록과 세 아들
제3장 정당문학공(政堂文學公)과 그 시대
1. 출생과 과환(科宦)
2. 원나라 지배하의 관록(官祿)
제4장 학사공(學士公)의 관직과 그 사회
제5장 사인공(舍人公) 시대의 사회상과 그 지행(志行)
제6장 목사공(牧使公)과 홍건적(紅巾賊)의 전란
1. 결혼과 정치관(整治官)의 활동
2. 충주목사(忠州牧使)와 그 최후
제7장 기우자(騎牛子)선생의 생애와 풍절(風節)
1. 출생과 유년 시절
2. 취학(就學)과 결혼
3. 문과 급제와 신진사관(新進史官)
4. 평해 낙향(落鄕)과 기우유상(騎牛遊賞)
5. 복직(復職)과 두 번째 낙향
6. 탐라선유사(耽羅宣諭使)와 간관(諫官) 활동
7. 왕명(王命)의 출납과 기울어진 국운(國運)
8. 신왕조(新王朝)의 수립과 강음(江陰)의 하야(下野)
9. 사초(史草) 사건과 울진(蔚珍) 유배
10. 월송정(越松亭)에서의 자정(自靖)
11. 지속적인 출사 불응과 명나라 사행(使行)
12. 한양(漢陽) 이사 후 누차의 관직 천망(薦望)
13. 후진 교육과 강산의 주유(周遊)
14. 한양과 강음 사이 왕래와 민정(民政)의 협조
15. 왕실과의 통혼(通婚)과 세종의 지우(知遇)
16. 서세(逝世)와 영원한 의표(儀表)
제3부 한양에서의 우리 가문
제1장 가문의 개요
제2장 제학공(提學公)의 출조(出朝)와 사상
1. 성장 배경과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장원(壯元)
2. 문과 급제와 신왕조의 진출
3. 어머니의 거상(居喪)과 기복(起復)
4. 불가(佛家)의 교류와 고승(高僧)의 평시(評詩)
5. 은퇴와 조용한 귀천
제3장 부훤당공(負暄堂公)의 파란만장한 관료 생활
1. 문과 2등 급제와 형제명환(兄弟名宦)
2. 선공(先公)의 가르침과 농상(農桑)의 장려
3. 폐세자(廢世子)의 논의와 상왕(上王)의 신임
4. 자부(姉夫)의 구명 운동과 강서(江西) 생활
5. 함길도(咸吉道) 유배와 특사(特赦)의 은전
제4장 여천군(驪川君)의 생애와 그 공훈(功勳)
1. 소년기의 학업과 무과(武科) 급제
2.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참여와 공신군호(功臣君號)
3. 정경(正卿)의 승진과 봉조하(奉朝賀)의 은전
제5장 돈녕공(敦寧公)의 왕실 혼인과 벼슬
1. 할아버지의 무육(撫育)과 청소년 시절
2. 세종의 명으로 이루어진 혼사와 관직
3. 류방선(柳方善) 문하의 수학(修學)
4. 승중상(承重喪)과 복직 및 별세
제6장 재령군주(載寧郡主)의 생애와 부도(婦道)
1. 어린 시절의 고난과 조모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보살핌
2. 출가 후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실천
3. 사패지(賜牌地)의 유택(幽宅)과 내외 자손
제7장 중화공(中和公) 형제와 그 자질(子姪)
1. 중화공(中和公) 내외분의 평온한 금슬(琴瑟)
2. 포천공(抱川公) 증약(曾若) 내외분과 그 묘소
3. 침류당공(枕流堂公)의 풍류와 교우(交友)
4. 별좌공(別坐公) 사연(師衍)과 첨사공(僉使公) 보(俌) 부자
5. 직장공(直長公) 사진(師鎭)과 그 자손의 출계(出系)
6. 포천공(抱川公) 아랫대의 낙향과 세거(世居)
7. 충순위공(忠順衛公)의 밀양 입향(入鄕)
제4부 밀양 입향(入鄕) 후 문벌(門閥)의 형성
제1장 문벌 형성의 토대
제2장 진사공(進士公)의 가업(家業)과 염퇴(恬退)
1. 결혼과 사마시(司馬試)의 합격
2. 낙남(落南) 후의 통혼(通婚)과 향선생(鄕先生) 추존
제3장 월연공(月淵公)의 깨끗한 풍표(風標)와 생애
1. 출사(出仕)와 청직한 사관(史官) 활동
2.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예견과 귀향(歸鄕)
3. 월연정(月淵亭)의 창건과 필한(筆翰)의 취미
4. 후산시풍(后山詩風)과 명류(名流)와의 시교(詩交)
5. 출처(出處)의 고민과 권신(權臣)에 대한 혐오
6. 월연에서의 자적(自適)과 그 신후(身後)
제4장 생원공(生員公)의 재망(才望)과 조세(早世)
1. 뛰어난 재사(才思)와 별시직부(別試直赴)
2. 김하서(金河西)와의 우정과 안타까운 하세(下世)
제5장 금시당공(今是堂公)의 벼슬과 금시(今是)의 깨달음
1. 태학(太學) 시절과 유생(儒生) 활동
2. 대과(大科) 급제와 한림원(翰林苑)의 활동
3. 목민관(牧民官)의 체험과 출처(出處)의 고민
4. 이단(異端)의 배척과 왕권의 옹위
5. 사유(師儒)의 간택과 은대(銀臺)의 충언
6. 귀향의 결심과 용호(龍湖) 위의 장수(藏修)
제6장 제헌공(霽軒公)의 지상(志尙)과 선업(先業)의 수호
1. 과거 공부와 주지(州誌)에 실린 소담(笑談)
2. 깨끗한 행의(行義)와 담박한 수양
제7장 증참의공(贈參議公)의 분거(分居)와 치가(治家)
제5부 각 파 자손들의 세거(世居)와 인물
제1장 밀양 사파(四派)의 성립과 임진왜란
제2장 용성구장(龍城舊莊)을 지켜온 진사공(進士公) 자손들
1. 승벌(僧伐)과 사인당(舍人堂) 마을 이름
2. 진사공(進士公) 경승(慶承)과 임진왜란 창의(倡義)
3. 선교랑(宣敎郞) 래(
4. 처사공(處士公) 장윤(長胤)의 승종(承宗)
5. 사과공(司果公) 만용(萬容)의 자손들
6. 처사공(處士公) 만성(萬宬)과 자손들
7. 처사공 만최(萬㝡)와 그 자손들
8. 용성처사(龍城處士) 만시(萬蒔)와 그 자손들
9. 자유헌공(自濡軒公) 만백(萬白)과 그 자손들
제3장 백곡(栢谷)의 선업을 가꿔온 근재공(謹齋公) 자손들
1. 아름다운 별서의 수호와 자손들의 복거(卜居)
2. 근재공(謹齋公)의 생애와 학행
3. 통덕랑(通德郞) 옹(㻾)과 향사림(鄕士林) 활동
4. 선교랑(宣敎郞) 창윤(昌胤)과 그 배위
5. 백곡공(栢谷公)과 그 자손들
제4장 월연(月淵)의 청풍을 기려온 겸재공(謙齋公) 후예들
1. 교위공(校尉公)과 내금공(內禁公) 경청(慶淸) 형제
2. 겸재공(謙齋公)의 생애와 불행한 최후
3. 전화(戰禍)를 딛고 일어선 증참의공(贈參議公)의 가업(家業)
4. 병자호란 때 의기(義氣)를 떨친 번수공(樊叟公)
5. 증참판공(贈參判公) 만형(萬亨) 형제와 환고(還故)의 염원
6. 월암공(月庵公)의 합경(合慶)과 그 자손
7. 월연공 손자 경옥(慶沃)의 출계 사실 오류와 그 시정
8. 첨헌공(忝軒公) 만전(萬全)의 출세와 그 아들
9. 무중군자(武中君子) 오호공(午湖公)의 건절(建節)과 자손
10. 처사공 장신(長新)의 분파(分派)
11. 묵헌공(黙軒公)의 행검(行檢)과 그 자손
제5장 무리실(茂李谷) 전통을 이어온 창암공(滄菴公) 자손들
1. 무리실(茂李谷)마을과 여주이씨 복거(卜居)의 내력
2. 창암공(滄菴公)의 청직(淸直)한 생애와 시혜(施惠)
3. 증정부인(贈貞夫人) 풍산류씨(豊山柳氏)의 규범(閨範)
4. 매원공(梅園公)의 제가(齊家)과 그 후손
5. 국창공(菊牕公)의 인술(仁術)과 사환 및 자손
6. 물헌공(勿軒公)의 문행(文行)과 그 자손
7. 호우공(湖憂公)의 학행(學行)과 그 후손
■ 색인(索引)
■ 저자 소개
이운성 李雲成
1929년 경남 밀양(密陽) 출생. 초명은 건성(建成)이고 자(字)는 이정(而靜)이며 호(號)는 석농(石農), 동애(東崖), 무심관주인(無心觀主人). 1960년대 초에 자유문학(自由文學)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고 재야 국학자이다. 50여 년간 문학(文學)과 한국학 관계의 저서·논문 그리고 고전(古典)에 관한 역주서(譯註書) 등을 다수 남겼다. 현재 여주이씨(驪州李氏) 돈녕공파(敦寧公派)와 밀양파대종회(密陽派大宗會)의 고문 및 문절공기우자선생숭모사업회(文節公騎牛子先生崇慕事業會) 회장으로 있다.
■ 서문 중에서
이 책은 우리 여주이씨의 밀양파 대종중이 1980년에 창립한 사인당리무본회(舍人堂里務本會)에서, 1989년에 연간(年刊) 교양지로 ?무본(務本)?을 창간한 이래 매년 그 지면을 빌려 연재되어온 글을 묶어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처음으로 게재(揭載)된 것은 제2호인데 ‘선세 연구’라는 지면에 원고지 100장 내외의 글을 실었다. 그 뒤 매년 빠짐없이 동일한 분량의 글을 수록함으로써, 2010년 8월에 나온 제22호를 끝으로 드디어 탈고(脫稿)를 하였다. 모두 21회에 걸쳐 3,000장이 넘는 원고를 소화한 것이지만, 그 내용에 무게와 깊이가 없고 체계 또한 산만한 것이어서, 도리어 민망한 마음과 함께 도로(徒勞)에 그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가 끝난 뒤에는 많은 독자들이 선세(先世)에 대한 아름다운 여운(餘韻)을 간직한 채, 자라나는 후진들에게도 우리 가문의 뿌리와 지엽(枝葉)을 알게 하고 조상의 사행(事行)에 관한 교육의 자료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담한 책자로 엮어 보급할 것을 주문하는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사실 애초에 필자가 이 글을 시도할 때도 만약 이 연재물을 하나의 열매로 거둘 수만 있다면, 자손들에게 가문의 내력과 조상의 사적을 교육하는 자료로서 활용이 가능하겠다는 은근한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독자들의 바람은 시의(時宜)를 얻었고 필자의 마음속 기대와도 부합이 되었다.
이 글은 당초에 일관된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 금년 봄에 서거하신 우리 종중 최고의 장로(長老)로서 필자가 스승으로 존경하던 벽사선생(碧史先生)께서, 일찍이 이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앞으로 책이 나올 경우 ?사인당리종사(舍人堂里宗史)?라는 제목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신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뜻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제목에 비하여 내용이 어울리지 않았고, 사서(史書)라는 의미 부여가 너무나 무겁고 외람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단계적으로 종파별 테마를 붙여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그 해제(解題)의 의미와 상징성을 고려하여 ?이천 리의 역정(歷程)과 천 년의 선적(先蹟)?이라는 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다만 그 부제(副題)로 선생의 애정과 함축된 뜻을 나타내었을 따름이다.
‘이천 리의 역정’이란 우리 성씨의 시조이신 교위공이 경기도 황려현(黃驪縣)의 향호(鄕豪)로 자리를 잡으신 이후, 13세조 충순위공이 밀양으로 입향 정착하기까지 그 변천의 장정(長征)을 일컫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4세조 중랑장공이 고려 정부의 관인으로 진출하여 누대로 개성(開城) 사람이 되었고, 9세조 문절공(文節公) 기우자선생의 아들 제학공 형제가 조선조의 개국과 함께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서의 지위를 얻어 다시 수대를 한양인(漢陽人)으로 살았다. 그와 같은 경로가 일천 리(一千里)인데 우리 밀양 입향조께서 또 천 리 길을 더듬어 낙남(落南)을 한 후, 사인당리(舍人堂里)에 삶의 터전을 일구었으니 줄잡아 이천 리의 역정이 되는 셈이다.
‘천 년의 선적’ 또한 시조공이 고려 시대 중기인 11세기 중엽에 여주(驪州)를 본관으로 삼아 성씨의 뿌리를 내리신 이후 ‘즈믄(千) 세월’에 걸쳐 우리 선조들이 끼친 자취와 행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가문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 중·후반기에 작성된 개성부호적(開城府戶籍)이 유전(遺傳)되어왔다. 그것을 바탕으로 시조공과 함께 그 아들과 손자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호장(戶長)과 군윤(軍尹) 등 향직에 종사하면서 관향지를 지키던 약 100년간의 ‘황려 시대’가 있었다. 그를 효시(嚆矢)로 하여 뒤이어 ‘개경 시대’ 200년과 ‘한양 시대’ 100년간이 각각 열리었고, 낙남 입향 후에는 ‘밀양 시대’가 시작되어 5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수놓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대체로 책명이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이천 리’라는 장정(長程)을 날(經)로 삼고, ‘천 년’이라는 세월을 씨(緯)로 하여 필목(疋木)을 짜낸다는 심정으로 편집하였다. 다섯 부(部)의 큰 묶음에다 32개 장(章)이나 되는 시대적 종파별 테마 속에, 무려 103개의 항(項)과 131개에 이르는 목(目)으로 짜여진 목차(目次)의 구성이 어느 정도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할 것이다. 비록 필자의 무능과 자료의 빈곤으로 우리 성씨와 가문의 고금(古今)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사(通史)는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후손들이라면 누구라도 각자의 서가(書架)에 갈무리가 되는 문헌(文獻)을 만든다는 태도로 최선을 다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책자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상재(上梓)된다는 사실에 직면해보니, 문득 지난날 문중의 어른으로서 지금은 선계(仙界)에 계실 많은 부로(父老)들의 인자한 자태가 떠오르면서 그때가 그리워진다. 이 못난 필자를 ‘우리 가문의 보배와 같은 존재’라 또 한 번 치켜세우시며 ‘긴요한 문중 사업 하나를 이루어내었구나!’ 하고 기뻐해주실 것만 같다. 종원 여러분들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를 드리며 이 책의 간행을 자축하고 싶다. 끝으로 밝혀둘 일은 편집 과정에서 시종일관 종중을 대표하여 격려를 해주는 한편, 특히 내용 면에 삽입할 수십 건의 사진을 구해 제공해준 성순(成珣) 대종회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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