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관 시집
너를 놓치다
128×205×9 mm|136쪽|값 8,800원|979-11-308-1196-3 04810|2017.6.10
■ 도서 소개
정일관 시인이 16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 『너를 놓치다』가 <푸른사상 시선 76>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시인이 시를 떠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와 함께 걸어왔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편들이 실려 있다.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고 생태계의 일원으로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이 여실하다.
■ 시인 소개
정일관
1961년 부산 송도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며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8년 3인 시집 『새를 키울 수 없는 집』을 출간하였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인 전남 영광의 영산성지고등학교에서 대안교육의 텃밭을 일구는 데 함께했고, 2001년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를 출간하였다. 현재 경남 합천 적중면 황정리 너른 들판과 원경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목련 / 산책 / 해봐라, 사랑 / 해바라기 / 등 / 이면의 기다림 / 팔만대장경 / 너를 놓치다 / 먼 곳 / 사이 / 깜짝 놀라게 하는 / 가시나무 / 금방 져버릴
제2부
경례 / 덜컹거리는 / 마늘을 심으며 / 어제 내린 비 / 도토리 / 다행이다 / 그냥 / 곱빼기 / 독립기념관에서 / 처서 무렵 / 편안한 눈물 / 바닥
제3부
길에서 길이 / 락, 즐거운 / 모과 / 검은 가지 / 우주의 전화 / 아픈 거야 / 박새와 거울 / 물길 / 밭벼 / 위대한 비 / 노을 / 풀 / 시들다
제4부
꿈 / 가자 / 싸락눈 오는 밤 / 저녁 / 미장원에서 / 고양이 울음소리 / 그날 밤 / 감물 염색 / 제적 등본 / 아버지 1 / 아버지 2 / 봄날의 지구 / 빈 들 / 곶감
제5부
오래된 시 1 / 오래된 시 2 / 오래된 시 3 / 오래된 시 4 / 오래된 시 5 / 오래된 시 6 / 오래된 시 7
작품 해설:자연을 경배하는 은유자의 산책― 나민애
■ 작품 세계
『너를 놓치다』는 정일관 시인이 16년 만에 선보인 시집이자 삶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생애 보고서적인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지닌 삶의 자세이자 시적인 자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집의 제목, 특히 ‘너’라는 말이 지닌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너’야말로 시집을 독해할 열쇠이며 시인의 생과 시의 수원지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일관 시인의 ‘너’란 한용운에게 있어서 ‘기룬 님’과 유사한 심급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시인의 말’을 통해 그 구체적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다.
시인은 “세월이 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과 보이던 것들이 문득 자리를 바꾼다.”(「시인의 말」)고 적어놓았다. 이 문장에 적힌, ‘보이지 않던 것들’이야말로 시인이 말하는 ‘너’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보이던 것들, 즉 가시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왔던 대상들로 인해 보이지 않던 것들인 ‘너’를 놓쳐왔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보이던 것들을 기꺼이 놓치고자 한다. 대신에 그는 잃어버렸던 ‘보이지 않던 것들’을 시집을 통해 담아내고자 시도한다.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야말로 시인에게는 가장 소중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며 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야말로 “내 심장 뛰게 하는 것들, 살아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며 생래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원래부터 있었으며 지금까지 있어온 것이기도 하다. 자연적 대상들은 애초부터 시인의 근원과 터전에 이미 깃들어 있었으나 속세의 가치관으로 인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해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세계관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인지하고 가치를 두어야 비로소 그 대상이 한 사람의 인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정일관 시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진가를 알아보면서부터 자연 대상들은 비로소 새롭게 ‘발견’될 수 있었다. 이렇듯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고 본래적 생태계의 일원으로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초상을, 이 시집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 읽기는 여행이라든가 걷기에 비유할 수 있다. 시집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만나게 된다. 이 시집도 그러했다. 책장 사이에서 간간히 산과 숲의 냄새를 맡았고, 흙의 조용한 부산함도 들었고, 시인의 삶과 땀도 보았다. 그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에서는 더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시인이 2001년 이후 침묵한 시인이 맞는지 다시금 약력을 들춰보게끔 만들었다.
우선, 목련이 무너져 내린다든가 떨어진다든가 이런 표현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애도 쓰지 않고 그만 무너져 내”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건강한 허무함에 놀랐다. 한껏 잘 피어 있었고 그러다가 불행히도 지고 말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이제는 힘 내지 마시길” 빌 수 있을까. 마치 오래 아프다 천천히 저물어가는, 어머니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 같다. 이 시인은 죽음이라든가 사람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깊이 새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흔적은 마지막 부분에서도 느껴진다. “예쁘게 보이지 않을 때/바람이 불어와도 안심하겠지”라는 구절은 죽어가는 한 존재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다정한 시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구절에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죽음, 자연이라는 큰 생명계의 일원으로 생겨나 조금씩 노화되고 있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별이나 죽임이라는 것이 마냥 비극적으로만, 또는 안타깝게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몹시 시원섭섭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그려져 있다.
이 또한 자연에 스스로를 은유하고, 스스로를 자연에 은유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정일관 시인에게 있어 세상은 모두 스승이고 자연 모두가 벗이며 부모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항심을 지키고 사는 자의 내면은 밝고 자연스러우며 환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민애(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시인의 말
철쭉 피어 있는 화단 막돌 위에
날렵하게 도사리고 있는 도마뱀, 날 보고도 의젓한 도마뱀,
초록 잎사귀 한 닢 같은 청개구리의 야무진 울음소리,
흐르는 시냇물 잔돌에 부딪치는 물결,
어디로 불어갈지 모르는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모과나무,
참새 떼들이 자지러지고, 물드는 하늘과 저 태연한 구름,
들판을 가로지르는 하얀 길, 고요히 퍼져가는 억새꽃,
차오르는 달빛에 뒤척이는 잎사귀들.
세월이 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과
보이던 것들이 문득 자리를 바꾼다.
삶의 오솔길에서
내 심장 뛰게 하는 것들, 살아 있는 것들.
세월이 가면, 세월 따라 나도 가면.
16년 만에 시집을 낸다.
드넓은 적중 들판을 바라보며 숨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 추천의 글
2001년 9월에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를 내고 16년 만에 새 시집을 내는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시인은 시를 떠나 무얼 하고 있었을까? “교실에서 수업하다가/창밖으로 열심히 내리는 비를 보며/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그저 호스 하나 붙잡고/텃밭에 물 뿌리는 것 같”다는 구절처럼, 시를 쓰는 일 또한 그런 탄식이었을까? 그래서 “너르게 펼쳐진 들판/나무도 풀도 담장도 적시고/그윽하게 숨겨둔 옛 마음과/가슴 속에 피어 있는 꽃마저도/온전히, 온전히 적시”는 비가 되고 싶어서 16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 배움 가운데 가장 큰 배움이 ‘기다림’이구나 싶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저 느려터진’ 기다림이 튼실한 열매를 맺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어찌 반갑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정일관 시인은 시를 떠나 있었던 게 아니라 시와 함께 걸어왔다고 해야 맞을 듯합니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말이죠. ‘바닥만큼 단단한 수평이’ 되어 ‘바닥의 힘’으로 쓴 이 시집이 메마른 세상을 촉촉이 적셔주는 ‘위대한 비’가 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해집니다.
―서정홍(농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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