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
홍순영 지음|푸른사상 시선 190|128×205×9mm|152쪽|12,000원
ISBN 979-11-308-2150-4 03810 | 2024.6.15
■ 시집 소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카오스모스’의 세계
홍순영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가 <푸른사상 시선 190>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몸으로 체득한 일상을 토대로 삼은 ‘식물성’이 눈길을 끈다. 각 부로 나뉜 네 개의 이질적인 공간은 시인이 초점을 맞추려는 대상에 대한 시선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대상을 비자연 대상처럼 취급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제시하는 시편들에는 비일상의 미학과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일상의 미학이 공존하는 ‘카오스모스’의 세계가 들어 있다.
■ 시인 소개
홍순영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은 수원 화성행궁 인근에 산다. 시에 대한 갈증으로 뒤늦게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고, 2011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비와 달과 커피의 포옹 속에서 여전한 허기와 부끄러움을 느끼며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시집으로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이 있다.
■ 목차
제1부 히비스커스
히비스커스 /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 / 사과는 사과가 아니고, 창문은 창문이 아니어서 / 파의 국경 / 카오스 옆집에는 코스모스가 산다 / 나는 아직도 사람이어서 / 밤마다 새를 보내는 남자 / 새를 찾으러 갔다 / 사과는 먹을 만하던가요 / 껍질 / 피클 레시피 / 페트라를 넘어 온 장밋빛 뱀에게 / 구름의 시간 / 공기뿌리 / 구름의 목에 밧줄을 걸고
제2부 석류
침대 오디세이 / 벚꽃잎이 흘러간 쪽으로 눕다 / 해설(解雪) / 폐(廢)와 폐(肺)는 서로를 끌어안고 / 쓸모 있는 사물이 되려고 / 모과나무 후문(後聞) / 태어날 때부터 잉여입니다만 / 염소의 사원 / 설염(舌炎) / 입속에 선인장을 키웠다 / 침묵의 봄 / 검은 사람, 흰 마스크 / 파과(破果) / 석류 / 2분
제3부 살구
풀로 빈 땅을 덮어줄 때 / 상추 아래 무릎을 꿇고 / 처음이며 끝인 / 감자 / 옥수수수염을 세는 밤 / 살구 / 폭설 / 한 그릇 고요 속에서 맨발로 춤을 / 베개 / 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 익명의 임차인 / 한 송이의 몰(歿) / 귀를 찾습니다
제4부 맨드라미
동백의 마음 / 맨드라미 / 소리채집가 / 영혼의 필경사 / 사서(死書) / ‘이름’이라는 디저트 / 땅에서 자라는 무지개 때문에 / 겹옷을 벗어놓은 꽃들이 / 슬픔은 따뜻한 알을 낳고 / 문 / 내게 꿈틀거리는 계단을 / 느린 걸음의 / 기타 치는 눈먼 노인
작품 해설 : 카오스모스의 시학_ 고봉준
■ '시인의 말' 중에서
나를 찾아
나의 밖을 떠도는 사람 발등에
누가 씨앗 봉지를 떨구고 갔을까
삐뚤한 이랑마다 그리운 순(筍)이 돋아
안녕,
안녕,
나는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걸었다
■ 추천의 글
홍순영 시인은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관성적 사물과 익숙한 정경 속에서 존재 이전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숨결”을 읽는다. 통째 떨어지는 동백 꽃숭어리의 마음이 소용돌이치던 허공의 밀실 “문고리”를 찾아 더듬고, “겹겹의 미로를 품고” 있는 맨드라미 붉은 꽃잎의 미로 속에서 “맨 처음 그 붉은 길을 열었”던 맨드라미 이전의 설핏한 핏자국을 본다. 시인의 촉수는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의 내면이 얼마나 뜨겁게 소용돌이치는지 관찰한다. 소소하게는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의 이면에서 비장하게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은 “카오스 옆집에는 코스모스가” 사는 것처럼 존재 이전 혼돈의 에너지를 통해서 현재로 이어지는 존재들의 질서를 우주적 생태계로 포괄한다. 빅뱅 이후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탄생한 지구라는 별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들 또한 이 세계라는 뒤엉킨 에너지를 나름의 질서로 내면화하면서 간다. “돛을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험난하게 살아온 ‘눈먼 노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한 기타 연주’처럼 기타와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며 사라져가는 새로운 카오스로의 비상은 시인이 끝없이 추구하는 통속적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따고 또 따도” “새잎을 밀어내는 상추”의 지난한 성장 끝에 완성된 또 다른 혼돈의 결정체인 씨앗을 ‘무릎을 꿇고 받아 모시는’ 그녀의 수확이 알차다.
― 이덕규(시인)
■ 작품 세계
홍순영의 시집은 네 개의 이질적 공간이 합쳐져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시집을 펼쳐들면 눈앞에 네 개의 방(房)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방들에는 ‘히비스커스’, ‘석류’, ‘살구’, ‘맨드라미’ 같은 식물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이것은 이 시집의 기본 성질이 식물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사의 모티프와 사회적 상상력이 옅게 투영된 작품이 일부 포함된 2부를 제외하면 홍순영의 이번 시집에는 도시적인 삶과 문명의 흔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시적 삶을 배경으로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첫 번째 시집은 물론이고 반복되는 일상의 질서 바깥으로 도약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두 번째 시집의 세계와도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 그리하여 꽃과 나무보다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한층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독자에게는 이번 시집이 더욱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홍순영의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식물의 상당수가 소위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파, 옥수수, 감자, 상추처럼 농작물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추측건대 이번 시집의 식물성은 시인의 농경 체험에서 비롯된 것, 따라서 이것들은 관찰자의 객관적인 시선에 포착된 사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일상의 흔적에서 기원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식물성’은 삶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삶의 변화는 언어와 상상력의 변화, 궁극적으로는 시의 변화를 초래한다. (중략)
홍순영의 이번 시집의 특징은 ‘자연’에 대한 이질적인 감각과 경향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에는 자연적 대상을 창조적으로 재계열화하는 비일상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고 그것에서 삶의 윤리를 이끌어내는 일상의 미학이 있다. 이번 시집에서 전자의 경향은 주로 전반부에, 후자의 경향은 주로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아서 어떤 경향을 중심으로 읽느냐에 따라 시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이질적 경향의 공존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시적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해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 시집에서 확인될 듯하다.
― 고봉준(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
달을 만질 수 없어서
귤을 만진다
너는 노랗고 둥글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와 달이 되고,
나의 손바닥에 붙들린 우주가 되고
이곳에서 차디찬 귤 하나를 들고
너의 이름을 부른다는 상상만으로
나는 둥근 목소리가 되지
허공에 뜬 비상구를 두고
너와 나는 가쁜 숨을 공유하지
달은 나날이 커지고
우리는 분명 저곳으로 사라질 수 있을 거야
분명하고 유쾌한 예언을 품고
하루를 굴리지
애써 말하지 못하는 눈사람이 되지
데구루루 굴러온 귤이 눈앞에 수북이 쌓이고
달은 하나, 둘, 셋……
아아, 이토록 많은 너와 나의 날들이라니
상추 아래 무릎을 꿇고
봄, 여름 내내 상추를 따 먹었지요
그동안 상추를 앉은뱅이로만 알았지 뭐예요
따고 또 따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새잎을 밀어내는 상추 때문에
나, 사실 상처 받았어요
끝까지 가보겠다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꽃대 올리는 상추를 보고
나, 눈물 났다니까요
상추꽃이 하나둘 작은 입들을 벌렸다 오므리면
상추 주변으로 노을이 펴요
이제 나의 숙제만 남았어요
씨앗 받는 일
두 손을 깨끗이 씻어야겠어요
이처럼 거룩한 생을,
제가 언제 또 받아 안아보겠어요
펄펄 끓는 태양 아래 무릎을 꿇고
오늘, 상추의 온 생애를
두 손으로 받아 모셔요
슬픔은 따뜻한 알을 낳고
어제는 당신에게서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서랍에 넣어두었지
밤새 슬픔은 따뜻한 알을 낳고
오늘은 그 알을 호주머니에 넣고 걸었어
가을 햇살마다 갈대 울음이 묻어 있었지
슬픔은 울음 곁에 두는 것이 맞으리
주머니 속 알을 꺼내 갈대 곁에 묻어주었네
만일 그 슬픔을 서랍 속에서 꺼내지 않았더라면
슬픔과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버려둔 채
완벽한 혼자가 되기로 했어
다시 잠자리에 들면 오늘은
갈대 날아오르는 소리 들리려나
새의 날개 옆에
아직 꾸지 않은 꿈을 묻어두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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