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무한의 오로라
이하언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57|146×210×15mm|232쪽
18,500원|ISBN 979-11-308-2149-8 03810 | 2024.6.15
■ 도서 소개
나 아닌 모든 이들을 염려의 대상으로 삼는
소설로 표현된 타자 윤리학
이하언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무한의 오로라』가 <푸른사상 소설선 57>로 출간되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을 넘나드는 이 소설집에는 소외되고 고통받은 인물들에 대한 책임감이 등장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감은 궁핍하고 억압당하는 얼굴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호해야 할 민족, 국가, 조상의 땅에까지 나타난다.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이하언의 작품들은 주체를 타자에게 개방함으로써 삶의 장을 무한하게 확대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이하언
2007년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장을 역임했다. 소설집으로 『검은 호수』, 공저로 『버터플라이 허그』 『코로나 19 기침소리』 『카페인 랩소디』 『내 이야기 어떻게 쓸까』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혼자 괜찮아』 『거짓말 삽니다』 등이 있다. 평사리 문학대상을 수상했다.
■ 목차
개
무한의 오로라
어디에서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특수임무 수행
풀꽃
광야에 서다
태양을 품은 여인
▪ 『무한의 오로라』에 나타난 타자 윤리학_ 이덕화
■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져갔다. 가까이 지냈을 수도 있고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만남은 물론,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없이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씨줄 날줄처럼 얽혀서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이 세상을 이루어왔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사람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모두 다 그렇지는 않다. 남긴 것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의 뒤에는 실상 얼마나 더 많은 사연들이 변하고 지워지고 숨겨져버렸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낼 수 있을까.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언어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내면들을 드러내보고 싶어서이다. 또한 세월이 지워버린 많은 이야기들, 어디엔가 다른 모습으로라도 남아 있을 존재했던 흔적을 되살리고 싶어서이다.
이 소설집 속의 시간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넘나든다. 등장인물들은 존재했고, 혹은 존재했을 법하고, 앞으로 존재할지도 모를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내었을, 하지만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들의 가치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새삼 깨닫는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를 추구했고 얼마나 생명을 소중히 여겼는지,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부단한 노력들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계속 써보고 싶다.
■ 작품 세계
이하언의 창작집 『무한의 오로라』에 나타난 작가 의식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가족, 혹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가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타자에 대한 책임감은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각인된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수호해야 할 민족, 국가, 조상의 땅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개」에서는 개로, 「무한의 오로라」에서는 헤어진 옛 애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는 초점 인물, 「특수임무 수행」부터는 국가, 「풀잎」에서는 작가의 대타자라고 할 수 있는 힘없는 민중, 「광야에 서다」에서는 민족, 「태양을 품은 여인」에서는 조상의 땅이었다.
이하언의 『무한의 오로라』에서 타자의 개념은 주체의 존재를 초월해 타자를 염려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대상을 타자로 지칭하기로 한다. 또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불가시적 세계의 선험적 타자라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쳐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 타자로 설정한다. (중략)
“나의 욕망은 타자를 통해서만 활동하고 타자를 통해서만 대상을 포착한다”는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 없이는 어떤 것도 욕망할 수 없다는 그 타자의 개입은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즉 타자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의식이며 가능 세계의 표현이며, 작가가 가야 할 세계의 무한자가 현시하는 지평이다. 『무한의 오로라』의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주체는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신에게 받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을 실천하는 윤리학, 타자 윤리학의 실천의 장이다.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일상 소쇄사(小瑣事)를 중심으로 서사가 이루어진다. 그에 비해 이하언 작가는 일상 소쇄사를 떠난 다양한 소재, 역사물조차 고대사, 현대사를 가리지 않고 서사화하는 노회(老獪)한 작가이다. 타자 윤리학을 실천하는 장으로서의 이하언의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주체들은 타자에게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삶의 장을 확대하고 있다.
― 이덕화(소설가, 문학평론가)
■ 출판사 리뷰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을 넘나들며 서사가 펼쳐지는 이하언의 소설집에는 소외되고 고통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현실의 문제와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가족과 연인, 심지어 국가에 이르기까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모든 이들을 염려의 대상으로 삼으며 타인을 향한 책임감을 드러낸다.
말레이시아에 방문하여 숙소로 향하던 한 여성이 도랑에 빠진 개를 발견하는 「개」에서, 그녀는 어릴 적 엄마의 학대로 인해 화장실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목숨을 잃은 동생을 떠올리며, 자신이 구출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개를 살려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다. 표제작인 「무한의 오로라」의 화자는 헤어진 전 애인 ‘혜진’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는다. 이별한 후에 다른 남자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혜진’의 사정을 알게 된 화자는 가상세계인 ‘무한한’에 접촉하여 혜진의 행복을 빌어준다. 이하언의 소설에 나타나는 타자를 향한 책임과 연민은 국가와 민족 등으로 확대된다. 북파공작원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했으나 국가로부터 외면받는 인물을 그린 「특수임무 수행」, 문인 간첩 사건을 그린 「풀꽃」 등이 그렇다.
현대사의 비극과 오늘날 사회문제 등 다양한 소재로 한 여덟 편의 소설에서 작가는 상처받은 이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통에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 작품 속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혜진이 그토록 갈구하던 것들이 무한한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강에 몸을 던지기 전에 핸드폰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이름, 혜령과 나는 그 공간에 없었다. 혜진은 나와 혜령을 초대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로라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잠든 혜진을 돌아보았다. 혜진은 무한한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기 전 헤드셋을 벗겼다. 혜진의 행복한 꿈을 빼앗는 듯해서 미안했다.
(「무한의 오로라」, 56쪽)
귀가 너무 커져 흔들렸다. 귀만 도드라져 거울 속에서 나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정도에서 자라기를 멈추었으면 좋은데. 문득 귓속으로 작은 소리들이 들렸다. 원룸은 층간의 방음 장치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위층의 소음이 곧잘 들리곤 했다. 처음에는 신경이 거슬렸지만 이제 어지간한 소음에는 무디어졌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것은 소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나는 벽에다 귀를 대었다. 귀가 크니까 벽에 귀가 착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벽 속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어느 집에서 다투는 소리, 텔레비전 소리, 심지어 텔레비전의 내용까지 다 들렸다.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사랑을 나누는 소리. 어느 집에서는 울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상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 모든 내용들을 똑똑하게 다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다락방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113~114쪽)
어머니는 그가 왜 그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선에서 관리들의 폭정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연해주로 왔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갈대와 자갈만 무성했던 황무지를 맨손으로 일구고 논밭으로 바꾸었다.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조선을 떠나온 어머니를 만나 가정도 이루었다.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남의 일에 참견도 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소신이었으며 제 식구 굶기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살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했고 결국 과로로 죽었다.
(「광야에 서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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