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 / 외길 인생]
20여 년간 좋은 책 만들기에 앞장서온 ‘푸른사상’대표 한봉숙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지난 20여 년간 우리 문학과 역사, 사회를 다룬 각종 학술서를 펴내온 출판사 ‘푸른사상’의 한봉숙 대표는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꼭 있어야 할 책을 만드는 것이 나의 천직”이라고 믿고 살아온 출판인이다. 넉넉한 웃음이 인상적인 그를 만나 책과 함께 지내온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
‘천직(天職)’이라는 말이 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뜻하는 생업(生業)과 달리,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그래서 비록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이 바로 ‘타고난 직업’을 가리키는 천직이 아닐까. 출판사 ‘푸른사상’의 한봉숙 대표(48)에게 출판업이 그렇다. 철모르던 20대 때 출판계에 발을 들인 뒤 지금까지 그는 ‘돈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을 해왔다.
이 같은 사실은 ‘푸른사상’에서 최근 펴낸 책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2004년, 사회성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지만 일본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저항해 절필하면서 역사 속에 묻혀버린 여류 작가 박화성의 작품을 모아 20권짜리 전집을 냈다. 지난해엔 소설가이자 국문학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온 원로 문인 구인환의 작품을 모아 27권짜리 전집을 내기도 했다. ‘춘향예술사 자료총서’ ‘한국판소리 사설형성연구’ 등도 한 대표의 손을 거친 책. 그가 20여 년 전 출판계에 발을 들인 뒤 만든 첫 책이 총 60권짜리 ‘한국현대소설 이론자료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참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안 팔릴 책만 골라 만들기야 했겠어요(웃음). 안 팔릴 것 같아 보여도 꼭 필요한 책이라면 만들어왔던 거죠.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얘기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어요. 한 번에 많이 팔리지는 않아도, 우리 출판사에서 만든 책들은 한 달에 한두 권씩이라도 꾸준히 나가거든요. 전문 학술서 분야에서는 스테디셀러인 거죠.”
한씨가 출판계에 발을 들인 건 지난 85년.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때였다고 한다. 가장 친한 후배가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늘 책에 묻혀 사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국가적으로 무역업을 지원하던 시절이라 사실 제가 무역회사에 다니는 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제 마음은 출판사 쪽에 끌리더라고요. 그때는 친구끼리 선물로 사상서를 주고받고, 어느 집 거실에나 전집류가 꽂혀있던, 어떻게 보면 ‘문화의 시대’였거든요. 출판사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 인문학적인 향기가 좋았죠.”
후배에게 ‘어떻게 하면 출판 쪽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꾸 묻자, 그가 마침 잘 아는 출판사에 자리가 생겼다며 자신을 소개해줬다고 한다. 그곳이 한 대표가 지난 2000년 ‘푸른사상’을 열기 전까지 15년간 다닌 출판사 ‘국학자료원’이었다. 국학자료원은 국문학·역사학·언어학 등 우리 국학 연구서 출간 부문에서 일가를 이룬 출판사. 한 대표는 그곳에서 전문가들과 부대끼며 제대로 일을 배웠다고 한다.
“막상 취직을 하고 보니 상황이 참 열악했어요. 무역회사에선 매달 25만원씩 받았는데, 절반인 13만원을 주더라고요. 인터넷이나 팩스가 없던 시절이라 각종 자료를 찾기 위해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고, 매일 야근을 했죠.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제 손을 거친 첫 책 ‘한국현대소설 이론자료집’ 1차분 9권을 만드는 데만 3년이 걸렸어요. 대학원생 3명과 같이, 정말 청춘을 다 바쳐서 만들었죠. 이 자료집은 5차에 걸쳐 60권으로 완간됐는데, 그때 저와 함께 작업한 분들은 지금 전부 교수가 됐어요. 그때의 만남이 인연이 돼서 저명한 학자가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계시죠.”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들과 함께 꼭 필요한 책 펴내는 출판인으로 살아갈래요”
국학자료원 편집인으로 일하며 전문성을 쌓은 그가 독립을 생각한 건 지난 99년. 국학뿐 아니라 여성학, 문학 등 좀 더 다양한 분야까지 출판 영역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대표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푸른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 사업자 등록을 냈다. 그러나 창업은 쉽지 않았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말리고 나선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IMF 경제위기 상황이었거든요. 출판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죠. 다들 학술분야 책을 내는 출판사가 잘 될 리 없다고 충고했어요. 저도 ‘그럼 하지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됐는데, 막상 ‘이렇게 일을 놓는구나’ 싶으니까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더니 ‘모든 욕심 버리고, 지금껏 해온 일 취미삼아 한다는 생각으로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제게 처음으로 힘을 실어준 거죠. 얼마나 든든하던지, 남편의 그 따뜻한 격려 덕분에 ‘푸른사상’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한 대표의 든든한 지원군은 또 있다. ‘엄마가 책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두 딸. 고등학교 2학년생, 중학교 3학년생인 이들은 ‘엄마 사회생활하라고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동안 잔병치레나 말썽 부리는 일 한 번 없이 자라줬다고 한다. ‘푸른사상’에서 나온 책들을 아직 다 읽지는 못하지만, 한 권 한 권 책이 늘어날 때마다 뿌듯해한다고.
“20대에는 일에 빠져 사느라 결혼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러다 서른 살에 우연히 소개받은 남편과 석 달 만에 결혼하게 됐죠. 공무원인 남편은 제가 천진난만해 보일 만큼 세상사를 모르고 일에만 푹 빠져 있는 게 좋아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글솜씨가 있는 큰딸에게 ‘너도 엄마처럼 출판일 해보면 어떠냐’고 말할 만큼 제 일을 좋아해요. 주부는 사회생활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전 남편과 아이들 덕에 오히려 많은 힘을 얻죠.”
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또 있다. 안 팔릴 것을 알면서도 어렵게 펴낸 책이 세상의 인정을 받을 때, 그리고 ‘푸른사상’ 책을 믿고 읽어주는 독자를 만날 때라고 한다.
“자식은 열 달만 지나면 세상에 나오지만, 책을 만드는 데는 몇 년도 걸리잖아요. 책 한 권 한 권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학술서를 낼 때는 각주 하나 하나까지 신경 쓰느라 여덟 번, 아홉 번씩 교정을 보죠. 그렇게 애써서 만든 책이 문예진흥원 등 여러 기관에서 선정하는 ‘우수 도서’로 뽑히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독자 전화를 받을 때도 기쁘죠. 저희 독자 중엔 전문가가 많거든요. 가끔은 ‘쉼표 위치가 잘못됐다’거나, ‘맞춤법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분들까지 있어요. 그런 전화를 받으면 처음엔 ‘아유, 뭐 이렇게 예민하나’ 싶다가도 바로 ‘이런 독자들 덕분에 우리 출판사가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애써서 만든 책을 귀하게 읽어주는 분을 만나면 가슴이 떨려요.”
하지만 가장 보람된 순간은 노학자가 평생 매달려온 연구 결과를 집필하고는 출간된 책을 들고 기뻐할 때라고 한다. 사실 그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이들 가운데는 인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책이 거의 팔리지 않기 때문. 그런 책의 저자가 바라는 건 자신들의 연구 성과가 역사에 남는 것뿐이라고. 책이 완성되면 대학 도서관에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운당 구인환 선생 전집을 낼 때도 그랬어요. 처음엔 20권 예정이었는데, 선생께서 계속 알려지지 않은 저작을 찾아내시고, 심지어 미완성된 작품을 마저 쓰시는 바람에 계속 분량이 늘어나 결국엔 27권에, 1만4천 쪽짜리 전집이 됐어요. 제작비용이 자꾸 늘어나니까 전 속이 바짝바짝 탔죠. 그런데 출판기념회에서 선생님이 ‘(내 모든 글을 모아 책을 낸 지난 한 해가 내겐) 정말 꿈같은 한 해였다’고 말씀하시는데 문학에 평생을 바쳐온 노학자의 기쁨이 제게도 전해지면서, 그동안 쌓였던 어려움이 다 녹아내리더라고요.”
그래서 한 대표는 앞으로도 계속 ‘돈은 안 돼도 꼭 필요한’ 책 출판에 매달리게 될 것 같다고 한다. 휴일에 집에 있을 때는 몸이 찌뿌드드하다가도 회사에만 나오면 기운이 나는 걸 보면 자신은 ‘행복한 일중독자’인 것 같다는 그는, 최근엔 ‘푸른사상’의 자매사로 어린이·청소년 전문 출판사 ‘푸른생각’도 세웠다. 여기서는 ‘금오신화’ ‘구운몽’ ‘옹고집전’ 등 ‘우리가 읽어야 할 고전’ 시리즈와, 교과서 등을 통해 제목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읽은 이는 많지 않은 유명 작가의 작품을 모은 ‘우리가 읽어야 할 현대소설’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지방에 조그만 도서관을 하나 세우고 싶어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책을 가득 꽂아놓고, 사람들과 함께 책과 인생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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