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역사 개척한 건 조선 사기장이었다
비요(秘窯)- 강남주 장편소설 /푸른사상 /1만6800원
- 강남주 작가, 4년 집필 장편소설
- 정유재란 때 강제로 끌려간 그들
- 비밀의 가마에 갇혀 도자기 구워
- 살기 위해 더욱 정교한 기술 연마
- 당시 日도자기 열풍의 숨은 주역
강남주(82) 작가가 새 장편소설 ‘비요(秘窯)’를 내놓았다. 푸른사상 출판사는 자사의 ‘소설로 읽는 역사’ 시리즈에 이 책을 배치했다. 장편소설 ‘비요’의 성격과 좌표는 이로써 한결 선명해졌다. 소설 형식으로 역사를 생각하고 오늘·여기·우리 앞으로 가져온다는 의도다.
강남주 작가에 관한 소개가 필요하다. 그는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부경대 국문학과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조선통신사 기념사업을 오랜 기간 주도했고,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공동 등재 한국 측 학술위원으로 활동했다. 쓰시마(대마도)는 100여 회 다녀왔고, 이를 포함해 일본을 150여 회 왕래했다. 첫 장편소설 ‘유마도’는 조선 후기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동래부의 화가 변박과 정사 조엄의 행로를 바탕으로 펼치는 역사소설이다.
이런 흐름 위에 두 번째 장편소설 ‘비요’는 있다. 숨길 비(秘), 도기·자기 굽는 가마 요(窯).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가마. 어떤 사연이 있나? ‘비요’는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까?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4년 취재와 공부, 집필 과정을 거쳐 ‘비요’를 세상에 내놨을까?
일본이 정유재란(1597~1598)을 일으켜 조선을 임진왜란 때보다 더 참혹하게 짓밟고 탈취했을 때 경상도 하동현 진교 백련리 사기골에서 사기장(沙器匠)으로 살아가던 젊은이 박삼룡은 순왜의 인도를 받은 왜군에게 잡혀간다. ‘순왜(順倭)’는 ‘징비록’ 등에도 나오는 낱말로, 왜병에게 순순히 부역하는 조선 사람을 뜻했다. 삼룡은 일본으로 끌려간다. 가족·조국산천과는 찢기듯 생이별했다. 삼룡뿐 아니라, 잡혀간 사기장은 셀 수 없이 많다. 사기장은 도기·자기를 만들던 조선의 기술자·전문가를 일컫는다. “왜병들은 사기장을 도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도공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어딘지 사기장들을 하대하는 말처럼 들려서였다.”(14쪽) 여기가 소설의 출발선이다.
장편소설 ‘비요’는 이제부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 간 숱한 사기장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첫째, 장면과 과정이 뿌옇지 않고 상세하며 또렷한 점이 특징이다. 삼룡이 끌려간 행로는 하동~사천 선진리 왜성~쓰시마 도마리·후주~이키섬~규슈 서북단 요부코~나가사키 북서부 히라도~가와치 언덕(규슈 올레길에 속한다)~이마리~아리타~이마리(오카와치야마)로 이어진다. 작가가 세심하게 고증하는 데 공력을 쏟았음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실감 나게 소설을 펼쳐 가려고 작가가 치밀하게 취재하고 준비했음을 알 수 있는 서술과 장면이 생기를 불어넣는다. “마침구이는 소성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의 단계다.…기술적으로 일순 산소를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마침구이의 기술적 특징이기도 했다. 1300도 정도의 열을 계속 가할 때면 자칫 그릇이 열에 녹는 수도 있다. 흙보다도 가치가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 삼룡이는 마침구이 때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다 매화토도 뿌렸다. 매화토는….”(276쪽)
오랜 세월 일본을 숱하게 다니며 보고 듣고 탐방하고 사귀고 공부했을 작가가 조선 사기장의 삶과 운명에 접근하는 관점도 눈여겨보게 된다. 작가는 약간은 멀리서 조금은 높은 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를 통해 제안하는 듯하다. 일본 침략군의 표적이 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은 거기서도 살아야 했고, 살았다. 탈출해 귀국할 기회는 거의 잡기 힘든 형편이었는데, 뒷날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요구로 극히 일부 조선인이 돌아온 사례뿐이다. 규슈의 사기장 다수는 조선통신사가 온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조선 사기장을 많이 끌고 간 일본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아리타·이마리 지역을 도자기 예술과 산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조성하겠다고 구상한다. 기량과 예술성이 빼어난 조선 사기장들이 있고, 그들이 아리타 산속에서 질 좋은 백자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던 조선 사기장들은 일본 사회 안에서 도자기 기술을 끌어 올리고, 일본 도자기가 당시 유럽에서 인기 선풍을 일으키게 하는 주역이 된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사무라이 가운데 가장 낮은 직위인 아시가루가 되기도 한다. 그 거점이 오카와치야마의 비밀 가마, 비요다.
작가는 상징적인 장면을 넣었다. “오카와치야마의 큰어른인 상급 사기장 박 씨가 사기장들을 모두 불렀다. 사기장들의 솜씨가 완전히 본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조선에서 일했던 옛날 방식을 잊는 것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옛날 방식보다 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기장으로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 그동안 연마해온 솜씨만으로도 이제 이 나라 안에서는 사기장으로서 주눅들 일은 하나도 없어요.”(253쪽) 그들 앞에 펼쳐졌던 또 다른, 새로운 삶은 그것대로 들여다보자는 뜻으로 다가온다.
역사적으로 피해-가해 구조와 과정이 워낙 선명한 한일 관계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대립 구도와 관점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작가의 상징적인 제안은 생각거리를 준다. 작가는 소설 끝에서 조선 사기장이 일군 비요가 신화의 탄생지로 변해갔음을 밝힌다. 그리고 비요 근처에 실제로 있는 ‘조선 도공의 묘’ 풍경에서 느낀 쓸쓸함과 아픔도 명기했다.
국제신문, "일본 도자기 역사 개척한 건 조선 사기장이었다", 조봉권 기자, 2021.11.18
링크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211119.2201400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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